'이름이 지워진 한 성폭력 생존자의 진술서 너머 이야기' 책의 부제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저자 샤넬 밀러는 파티에 다녀온 후 성폭행을 당했다. 그는 아마 처음에는 이 사실을 이렇게 글로 쓰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그는 사건 이후 조사를 받고, 법정에 서고, 지지부진한 소송을 겪는다. 과정은 길고 험난했다. 가해자와 피해자와 피해사실만 오가는 공방 속에서 '나'라는 '인간'이 지워지는 경험을 했다. 꾹꾹 눌러담은 듯한 펜의 촉감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꽤 두꺼운 책이지만 여기에도 분명 다 못한 말이 있을 것같았다. .이 책은 폭력에 대한 경험과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사람에 따라 트리거를 유발할 수 있으니 주의해서 봐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자아가 지워진 경험이 있다면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은 양가적 감정이 든다. 책은 불필요한 묘사나 과잉되는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려고 노력한 느낌이다. 따라서 샤넬이 걸어온 상황을 같이 짚어나감으로써 오히려 다친 마음을 회복하는 경험이 들수도 있겠다 싶고..우리가 때때로 [김지은입니다]나 [디어 마이 네임]과 같은 기록을 응원하는 이유는 이 기록이 단순한 리코딩을 넘어서는 함의가 있기 때문이다. 읽는 것만으로도, 아니 그저 단지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사실에 대해 연대할 수 있다. 나는 성폭력 범죄와 관련한 몇 개의 사건과 사실을 알고 있다. 계속 주시할 수도 있다. 행동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은 이상, 샤넬 밀러를 기억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