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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TexTan > HOW TO READ

반가운 책들이 봄싹 피듯 눈에 들어온다.

HOW TO READ 시리즈...

소박한 두께지만 거장들의 사유를 본격적으로 탐험하기 앞서 안내 역할을 하는 책들이 있다. 가령 나의 경우엔 '시공사 로고스 총서'나 '시공 디스커버리' '시공 아트', 그리고 김영사의 '하룻밤의 지식여행', 청미래의 '만화로 보는...'  등에서 톡톡하게 도움을 받았다. 아무래도 수월하게 볼 수 있고, 그 대신 뭔가 가벼운 뒤끝을 남기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간혹 다른 책들에서 건지지 못하는 명료하고 단순한 끈들을 발견하기도 한다(기억나는 책이 있는데, 시공사 로고스 총서로 나온 '데리다'는 어떤 데리다 입문서 보다 데리다의 기본 골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던거 같다) 

 

 

 

 

 

최근에 눈에 띄는 이와 유사한 시리즈-HOW TO READ도 왠지 기대되는 책들이다.  소개글을 살펴보니, 영국 그란타 북스(Granta Books, Granta Publications)의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시리즈로, 이와 유사한 다른 시도들과는 질적인 차별성도 갖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책의 저자들이 그들 나름대로 소화한 것들을 알기 쉽게 풀이 하는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HOW TO READ'답게 -원전 텍스트를 중심으로 직접 읽기의 과정이- 이 시리즈의 큰 특징에 속하는 거 같다.  

 

참여한 필진들도 (몇몇은) 예사롭지 않다. 우선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가 라캉을 맡았다니, 내용이고 번역이고 생각할 겨를 없이 충동적으로 보고 싶어진다. 물론 지젝의 스타일로 볼 때, 얌전하고 친절하기만 한 라캉의 전달자 역할을 기대하진 않지만 말이다.

 키스 안셀 피어슨(Keith Ansell Pearson)은 니체를 맡았다. 그가 쓴 <싹트는 생명>은 폭넓은 자료들을 촘촘하게 활용하면서 들뢰즈의 '생명철학' 이라는 주제를 유기적으로 잘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베르그송이 큰 기둥 역할을 하며, 더불어 니체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키스 안셀 피어슨 자신이 ('생명'이란 화두로) 니체-베르그송-들뢰즈에 관심이 큰 만큼, 이번 책에서도 그만의 니체 접근법이 기대된다.

 

 

 

 

 

그 외, 우리나라에도 이미 나와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형식의 책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저자 레이 몽크가 <비트겐슈타인>을, 여성으로서 사회와 성(性)에 관한 주제의 책들을 써왔던  페넬로페 도이처가 <데리다>를 맡았다. 여성 학자의 시선에 담긴 데리다, 그것은 그 전 데리다에 관한 책들과 사뭇 다른  긍정적인 보완을 기대하게 만든다.

HOW TO READ 시리즈에는 우리나라에선 아직 나오진 않았지만, 사르트르, 사드, 키에르케고르, 칼 구스타프 융, 제임스 조이스, 하이데거, 아퀴나스, 보부아르 그리고 이집트 사자의 서(Egyptian Book of the Dead)등도 보인다. 사드와 하이데거도 이번에 같이 나왔다면, 프로이트, 라캉과 함께 연대(連帶)적 읽기도 가능했을거란 생각도 해본다.

나는 아무래도 이 시리즈에서 <니체> <라캉>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 <마르크스> <데리다> 순으로 모아 볼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시리즈물에서 프로이트는 단골로 자주 등장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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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알라딘도서팀 > <야구감독> 서평단 알림

안녕하세요, 알라딘 편집팀입니다.
<야구 감독> 서평단 모집에 많은 관심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뽑히신 분들은 '서재주인에게만 보이기' 기능을 이용하셔서
댓글에 1. 이름 2. 주소 (우편번호 반드시 포함) 3.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3월 19일 오전 10시 이전까지 부탁드립니다.

그 시간까지 댓글을 남기지 않으시면, 가장 최근에 알라딘에서 주문하셨을 때의 주소로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선물 주문 제외) 주문 기록이 없거나 편의점 배송을 선택하신 경우, 최근 주문 이후 주소가 변경된 경우엔 댓글을 남기지 않으시면 책을 보내드릴 수 없으니 이 점 꼭 유의 부탁드립니다.

책은 이르면 다음 주 중에 받으실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책이 도착하지 않으면 댓글로 알려주십시오.
서평은 4월 13일까지 꼭 올려주세요!

jedai2000
디렉터스컷
화류
얼음장수
커피우유
시릴로
바이올렛
히죽이
종이정원
바바빠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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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나온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은 소설

국내에 번역되는 작품들이 작가가 발표한 순서와 달라서 독자에게 불안감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정말 이렇게 아무렇게나 읽어도 되는 걸까?'

순서가 정말로 중요한 작가도 확실히 있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겠습니다.

1. 레이먼드 챈들러: 필립 말로는 흔들림 없는 인물이긴 하지만 조금씩 달라지고 신념에 회의를 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특히 <리틀 시스터>와 <기나긴 이별>은 앞의 작품들과 상당히 다릅니다. 따라서 읽기에 따라 첫인상이 많이 달라지지요.

전 <안녕 내 사랑>을 처음에 읽고 그 다음에 <기나긴 이별>을 읽었더니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젊고 팔팔한 말로가 왜 이렇게 지치고 감상적이고 느끼하게 되었는가 하고. 해설과 교열 일을 하면서 다시 순서대로 읽었더니 변화가 이해가 가더군요. 그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좋고, 정 안 되면 최소한 <리틀 시스터>와 <기나긴 이별>은 좀 나중에 읽는 것이 좋습니다.


2. 로스 맥도널드: 딴 건 몰라도 <움직이는 표적>과 <마의 풀> 같은 초기 작품과 <위철리 여자>, <소름>, <순간의 적>, <지하인간> 같은 중, 후기 작품은 구별해야 합니다. 사실 중후기 작품을 읽다가 초기 작품을 읽으면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긴 합니다. 상반기와 하반기 작풍과 탐정의 모습이 꽤 달라지기 때문에 상반기만 읽고 평가를 내린다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반기 작품들이 더 걸작의 풍모를 갖고 있습니다.


3. 엘러리 퀸: 라이츠빌 시리즈 이전과 이후를 구별해서 읽어야겠지요. 가급적이면 국명 시리즈 등을 먼저 읽고 라이츠빌을 읽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라이츠빌의 다소 무거운 분위기와 중후한 엘러리를 보다가 국명 시리즈의 가볍고 경박한 엘러리를 보면 실망할지도 모르지요.

딴 건 몰라도 <열흘 간의 불가사의>와 <꼬리 아홉 달린 고양이>는 순서대로 읽어야 합니다.


4. 크리스티: 크리스티는 사실 순서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만 가끔 몇 작품은 순서를 가릴 필요가 있습니다. 유명한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과 <커튼>은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으로서 연결되기 때문에 순서대로 읽어야 좋습니다. <할리 퀸> 다음에 <3막의 비극>을 읽는 게 좋고. 토미와 터펜스 시리즈는 <비밀 결사>를 처음에 읽어야 합니다. 젊고 팔팔한 연인이 다정한 노부부로 변해 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좋겠죠.

<오리엔트 특급>을 읽은 다음 <죽음과의 약속>을 읽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후자에서 전자를 언급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화요일 클럽의 살인>을 마플 시리즈 중에서는 처음에 읽는 것이 좋긴 하군요. 여기서 마플 할머니가 초라한 듯 시치미를 떼고 등장해서 점차 입을 벌리게 하니까요.

5. 체스터튼: 브라운 신부 시리즈도 은근히 순서가 중요합니다. 적어도 <동심> 또는 <결백>은 처음에 읽어야 합니다. <푸른 십자가>와 <비밀의 정원>도 반드시 차례대로 읽어야 하고요. 그리고 신부에게 매번 잡히던 플랑보가 나중에 탐정이 되는 과정과, 신부와 헤어져 스페인에서 살다가 재회하는 과정이 시리즈가 진행되며 나옵니다. 중간에는 신부가 미국에서 유명인사가 되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6. 아야츠지 유키토: 관 시리즈도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탐정의 이름과 신분이 바뀌기도 하고 작가의 테크닉이 점점 발전하기도 합니다. <시계관>을 먼저 읽었더니 처음에 탐정과 가와미나미의 관계 등이 잘 이해되지 않더군요. 그리고 <십각관>이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7. 퍼트리샤 콘웰: 스카페타 시리즈도 주변 사람과의 관계가 발전해 가기 때문에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8. 에드 맥베인: 87분서 시리즈는 여러 형사가 주인공으로 계속 돌아가기 때문에 순서가 꽤 중요합니다. 풋내기 형사로 등장해서 베테랑으로 성장하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 전입하기도 하고. <살의의 쐐기>가 <10플러스 1>에서 농담으로 인용되기도 하므로 순서대로 읽으면 좋지만 책을 구하기가 어려우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9. 밸린저: 이건 좀 다른 의미입니다. 국내에 소개된 두 작품 <사라진 시간>과 <이와 손톱>은 어느 쪽을 먼저 읽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집니다. 먼저 읽은 작품을 더 좋아하게 되거든요.

전 <이와 손톱>을 먼저 읽어서 이 작품을 더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사라진 시간>을 먼저 읽은 분들은 또 <사라진 시간>을 더 높이 평가하지요. 아마도 이 작품이 구하기가 쉬워서 이런 분들이 더 많으리라 봅니다.


10. 콜린 덱스터: 요즘 많은 분들이 의문을 표합니다. 해문에서 순서대로 나오지 않는데 정말 괜찮은 거냐고. 지금 확실히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만... 덱스터가 TV 시리즈에 맞춰 인물의 모습이나 설정을 나중에 바꾸었습니다. 독자들이 대부분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스와 루이스의 나이 문제가 이것 때문에 생겼지요. 그리고 모스 경감이 점점 나이를 먹고 병에 걸려 쇠약해져 갑니다.

사실 해문에서 먼저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을 낸 것에 약간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시리즈 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것이라 무척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국내 독자들은 대부분 이 작품으로 모스를 만나는 바람에 그 다음에 나온 <숲을 지나가는 길>을 더 낫다고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옥스퍼드>는 모스 시리즈의 외전에 가까운 것인데 말이죠.

그리고 <숲을 지나가는 길>과 <사라진 소녀>는 매우 흡사하므로 읽은 순서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먼저 읽고 <우드스톡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읽으면 좀 실망할지도 모르고요. <우드스톡>은 시리즈 첫 작품이므로 좀 빈 듯한 느낌이 들지요.

이외에도 생각나는 것이 많지만 나머지는 다른 분들께 맡기지요.



-출처: 싸이월드 화요추리클럽 장경헌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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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시리즈를 읽으실 때는 1권부터...

시리즈를 읽으실 때는 1권부터 읽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개별로 읽어도 상관없는 시리즈도 있지만요.

예를 들면 아카가와 지로의 얼룩 고양이 홈즈 시리즈...

이 시리즈에서 가타야마와 그 주변 인물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예...

퍼트리샤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를 보면

스카페타의 법의학자의 관점이나 사건에 초점을 맞출수도 있지만 스카페타와 그 주변 인물들의 관계 변화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필립 말로 시리즈를 보면...

책 속에서 대사나 장면에 가로를 치고 어느 작품에 나온 것임 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그러니 시리즈는 만화처럼 1권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별로 쓸 말이 없어서리^^;;;

 

 

 

 

 

이것이 순서대로의 스카페타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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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20세기 한국시에 대하여

한 교외강좌에서 3주 연속으로 한국 현대시에 대한 강의를 맡게 됐다. 오늘이 첫날이었는데,  대략 '한국 현대시 개관'이란 제하의 강의였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좌이기 때문에(모두 여성이고 대부분이 주부) 가급적 평이해야 한다는 게 제1원칙이고, 웬만큼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제2원칙이다(요즘은 대학강의에서도 이런 원칙들이 요구되는 듯해서 유감스럽지만). 모두가 경청해주신 건 아니지만 고개를 끄덕이시는 분들이 더러 계셔서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요즘은 대학에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은 드물게 만난다).

강의자료로 쓴 것 중 일부는 이미 6년전에 써두고 강의했던 것이어서 이번이 말하자면 '재탕'이었는데, 그간에 늘어난 건 시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이래저래 순발력을 발휘하는 '능청'이 아닌가 싶다. 이전에 '기형도 시에 대한 편집증적 읽기, 분열증적 읽기'에 포함돼 있었던 간략한 현대시사를 조금 보충해가며 다시 올려놓는다. 이 또한 '재탕'일 텐데, '이미지-버전'이란 핑계가 없지는 않다(능청과 핑계가 어쩌면 나의 왼팔과 오른팔인가?). 읽기에/보기에 편하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대신에 군더더기말들을 더러 집어넣었다.

강의는 시 일반론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서 20세기 초반부터 최근에 이르는 한국시의 대표적 시인들을 거명하는 식이었는데, 여기서는 20세기 시사에 대한 간략한 리뷰만을 정리해둔다.

 

 

 

 

<황무지>(1922)의 시인이자, 아마도 가장 유명한 20세기 시인, T. S. 엘리엇은 시뿐만 아니라 시론에서도 정력적이었는데, 그가 유달리 강조한 것은 전통과 역사의식이었다(러시아에서 '토마스 엘리어트'의 두툼한 비평적 에세이 선집이 작년에 나왔었는데, 나는 그가 '티. 에스. 엘리엇'이란 걸 뒤늦게야 알았다. '토마스'란 이름이 너무 낯설었기에! 거기에 러시아어로 번역된 평문 '전통과 개인의 재능' 등이 포함돼 있었을 터인데, 애석하게도 책을 구입할 여유가 내겐 없었다. 참고로, 엘리엇은 우리 시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외국 시인의 한 사람이다. 비록 요즘은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이란 <황무지>의 시구를 읊조리는 중고생들을 만나기가 아주 힘들 뿐더러 젊은 시인들조차도 '열심히' 읽는 것 같지 않지만).

 

 

 

 

모름지기 25세 이후에도 시를 쓰려는 자는 역사에 대한 '감'을 먼저 연마해야 한다는 것. 그가 말하는 역사는 단순한 시사(詩史)를 넘어서 종교사, 종교적/상징적 상상력의 역사에 걸쳐 있지만, 하여간에 시란 것이 젊은 날의 겉멋이나 치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줄곧 강조하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김춘수는 (25세 이후에도?) 시론(詩論)을 갖고 있지 않은 시인은 천재이거나 아마추어라고 평했는데(<시의 위상>), 시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 혹은 관념(idea)이 없다면 일찌감치 시는 그만두는 것이 좋다는 뜻을 그의 주장은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참고로, 시작법이 아니라 작시법이 거의 부재하는 한국 현대시에서 '천재'가 나오기는 매우 힘들다. 그것이 우리의 '언어적 조건'이다. 그러니 '치기'나 '도취'로 시를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시론은 필수적이다. 새삼 확인해두자면, '시론'이란 시에 대한 로고스, 즉 논리를 갖추는 걸 말한다).

그런데, 시론이란 것이 모국어에 대한 감각과 시사(詩史)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가능하지 않다고 할 때,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시의 전통과 역사적 전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에 대한 부단한 의식 속에서, 그것과 맞서며 아주 조금씩 전진해나갈 따름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편집증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인은 그 이전에 씌어진 모든 시를 다 읽고 나서야 거기에 한 문장, 혹은 한 글자 덧붙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한 시의 역사를 재구성할 때, 20세기 한국시란 무엇이었나?(한국 현대시의 세 가지 원천으로 나는 민요, 한시, 그리고 번역시를 꼽는다. 김소월과 이육사는 각각 민요적 전통과 한시적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는 시인들이다. 이상은 많이 밝혀진 바이지만, '한국어'라는 자연어가 아닌 '기호'로 시를 썼던, 보다 정확하게는 문학행위를 했던 시인/작가이다) 20세기 초에 한국시의 기초를 이룬 시인들의 이름으로 김소월(혼의 시), 이육사(정신의 시), 이상(기교의 시) 등등의 계보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김윤식의 분류이다). 

 

 

 

 

 

 

 

 

 

하지만, 20세기를 통틀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시업(詩業) 60년을 넘긴 미당 서정주를 들 것이다(물론 미당에 버금가는 시인으로 백석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의 시업은 상대적으로 너무 짧았다. 때문에 백석은 '제도로서의 문학'과는 거의 무관한 시인이다. 물론 그의 계보를 따르는 시인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가령, <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시인 안도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의 정치적 과오 때문에 폄하되기도 하지만 그가 우리 부족시의 족장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이 '부족시'는 상대적으로 '국가'나 '민족'과는 무관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을 자임하던 그의 시를 보라.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시를 못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깎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깎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이/ 아내 손톱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시를 못쓰날에 할망구 손톱 발톱 깎어주며 마음 달래는 일도 '이뿌게' 시로 만드는 그의 솜씨는 대가급이다. 그러나 서정주의 시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있는, 체념적 달관 혹은 달관적 체념의 세계(비평가 김현은 서정주의 정신주의에 대해서 “그의 정신주의는 그가 그의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않는 데서 기인하는 태도의 희극”이라고 적은 바 있다.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 참조)는 이념(idea), 혹은 형이상(形而上)을 배제한 세계이다(“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추천사(鞦韆詞)>는 구절에는 그의 체념적 달관이 집약되어 있다(참고로, 요즘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친일파' 미당의 시들이 거의 빠져 있다고 한다. 문학 교과서에서 경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라고. 대개 학생들은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부정적으로' 인지하곤 하므로, 역설적이지만 미당 시의 독자들에겐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다. 학생들에게 미당의 시를 안 읽히는 방법은 교과서에서 빼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물리도록' 혹은 '신물이 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이념-이후에 그는 “가난이란 한낱 襤樓에 지나지 않는다/.../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無等을 부며>)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것이 또한 달관적 체념의 세계이다). 참고로, 한국시에 형이상학적 깊이가 결여돼 있다는 비판은 김우창 교수의 평문 '한국시와 형이상'을 참조할 수 있다(<궁핍한 시대의 시인> 혹은 <김우창 전집1> 참조. 나는 이 절판된 전집에 재출간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기이하며 유감스럽다. 더불어 유감스러운 건 김화영 교수의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민음사, 1984)도 절판된 채로 다시 구해보기 어렵게 된 것. 본격적인 시인론이자 시분석론인데 당시로서는 드문 시도였다).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같이 활동했던('부락'은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천민집단'을 뜻하는 걸로 안다) 청마 유치환은 서정주와 달리 이념적 ‘깃발’을 표나게 내세운 바 있으나, 언어적 조탁에 있어서 그에 미치지 못했고, 한자어투로 이루어진 그의 남성적 어조는 계보를 얻지 못했다(청마를 가까이 한 이에 김춘수가 있지만, 김춘수의 여성적 세계는 유치환의 남성적 세계와 대조적이다. 김춘수 자신이 시인하는 바이지만, 그의 초기시는 서정주의 계보에 속한다). 그리고 그의 시업(詩業) 또한 너무 일찍 한국시사에서 단절되었다. 그리하여 멀리는 40년대부터, 한국시단은 미당과 그 일가(一家)에 의해 접수된다(이른바, '미당스 패밀리' 되시겠다. 문단 용어로는 '미당 사관학교'라 하고).

 

 

 

 

 

 

 

 

한편으로, 한국시사에서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사례인 ‘청록파’의 경우, 박두진의 몇몇 시편들을 제외하면 비이념적 정관적(靜觀的)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다. 박목월의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구름에 달가듯”한 세계엔 이념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그림(=풍경)만 남고 목소리가 빠진 시는 왜소하다(지난주 고종석도 자신의 연재 '시인공화국의 풍경들'에서 지적한 것이지만, 이러한 '과대평가'에 한몫한 것은 이 세 시인이 모두 훌륭한 인격으로 후배 시인들이나 학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이들과 다른 경향의 시(인)들이 문학사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하여 여기에 유사-오디푸스 콤플렉스가 개입한다. 미당 이후의 시인은 하여간에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미당과 싸워야 했다(김현의 어투이다). 그를 넘어서거나 그와 다른 세계로 질주해야만 했던 것이다. 5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이 잠시 시림(詩林)을 떠들썩하게 했지만(박인환, 김수영 등이 참여한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곧 빈수레였다는 것이 들통난다. 그들은 木馬를 타고간 소녀의 옷자락 얘기만 잠시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언어(말부림)’를 가지고 미당에 맞서 그보다 윗길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고은 정도가 서정주의 어법을 가지고도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남은 희귀한 사례이다. 그의 시업이 60년을 넘길 수 있을는지? 한편, 미당학교의 '장학생'이었던 박재삼 등도 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당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이라는 것은 미당의 이념적 ‘퇴행’을 걸고 넘어질 수 있는 이념이어야 했다. 60년대 김수영과 김춘수는 이 점에서 제각각의 방식이긴 하지만, 뚜렷하다. 60년대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이념적 화두가 ‘자유’였다는 점에서 김수영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손색이 없다. “달나라의 장난” 같은 그의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노래, 아니 절규한 것이 바로 자유였기 때문이다. 산문적인 그의 시의 어법 또한 미당과는 전혀 종류를 달리하였다. 4.19 이후에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그 방을 생각하며>)고 그는 적고 있는데, 조금 다른 맥락에서, 김수영은 미당의 그늘 아래 놓인 해방 이후 한국시사에서 자신의 ‘방’을 마련한 드문 예에 속한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김춘수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미당의 빈 자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는 언어의 이념(이라기보다는 관념)을 자신의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이 또한 의미(=역사)로부터의 도피, 혹은 퇴행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힘든 경우지만, 어쨌거나 언어의 가지 끝에 매달리는 데는 성공한다. 이념의 부재로 미당의 시를 특징지울 수 있다면, 김춘수의 시는 한술 더 떠서 의미의 부재를 지향한다. 언어적 자의식을 대표하는 그에게 시는 “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고 “얼굴을 가리운 나의 新婦”이다. 그것은 말부림의 세계가 아니라, 말 비우기의 세계, 의미의 빈 그릇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어쨌거나 김수영과 김춘수에 와서 한국시는 미당시에서 탈색된 근대성(=시대성)을 다시 획득한다. 그러나 그것은 김수영의 이른 죽음을 대가로 치른 것이었다. 그리고 맞은 70년대에도 미당시는 여전히 도전/극복의 대상이다.

 


 

 

 

 

 

 

젊은 전사들의 이름으로 평론가 김현은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을 지목하고 있는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즐거운 편지>)의 황동규는 “물 빛 라일락의 빛과 香”을 가진 미당의 '永遠' 대신에 비극적 세계인식의 '자세'를 대립시키고,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병신 같은 女子, 시집 같은 女子...”(<한 잎의 女子>)의 오규원은 대상과 언어와의 관계를 의혹이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연기(緣起)론 세계인식에 딴지를 건다. 거기에 “나는 별아저씨, 바람 남편이지”의 시인 정현종의 '숨통'과 '걸음걸이'가 미당의 행보를 뒤쫓는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70년대를 증언할 수 있는 시인은 70년대의 포문을 연 <오적(五賊)>(1970)의 김지하이다. 그는 대뜸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던가. “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이 황토(黃土)의 땅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일에 비하면, 조곤조곤한 시들은 좀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70년대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것 또한 그의 ‘대표성’을 수긍하게 한다. 시 또한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마땅했을 시기가 아니었던가.

 

 

 

 

 

 

 

 

 

80년대 한국시는 80년 광주에서 시작된다. 그보다 조금 먼저 등단한 이성복은 이 “정든 유곽”의 땅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진단서를 제출한 바 있지만, 가장 명료하게 80년대를 규정한 이는 황지우이다.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에프킬라를 뿌리며>) 여기서 황지우의 '초토'는 김지하의 '황토'에 견줄 만하다. 80년대는 죽음의 연대였고, 시인들은 네크로필리야(necrophilia)에 들린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그 죽음을 파헤치고 음미하였다. 죽음에 분노하였고, 그 부채의식에 통곡하였다. 간혹 미치기도 하였다. “아싸라비야, 도로아미타불”이나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찍이 나는>)고 한 최승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성복의 어법을 빌리자면, “모두 죽었는데, 아무도 죽은 줄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죽음의 기운이 조금씩 떨쳐지는 것은 87년 이후이다. 그 이후 한국사회는 개량적․형식적 민주화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이어진 90년대에 80년대는 이미 '과거'가 돼 버리고, '후일담'이 횡행한다(한국사회는 가끔 (나쁜 쪽으로) 정신분열증적이다. 과거-망각(청산이 아니다!)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듯하다. 정신분열증적인 포스트-모던사회에서의 선전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우울'을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까?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 돼지들아!"

 


 

 

 

 

 

 

90년대적인 시(현상)으로 장정일과 유하의 경우를 들고 싶다(비록 그들이 등장한 건 80년대 말이지만).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의 장정일과 <무림일기>(1989),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유하는 키치적인 상상력과 패러디적인 기법으로 무장하고 “진지한 시”의 전통에 냉소를 퍼붓는다(이미지가 지원되지 않는군. 이게 언제적 유하인가?).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식혀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신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 무렵 하남 땅에서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아,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大血劫)/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空輸無極破天掌)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이들의 “가벼운 흥분”과 재미의 세계는 80년대적인 무거움과 극적이면서 단호하게 결별한다. 이는 새로운 시이면서, 시의 끝(=종말)이다. 근황? 장정일은 일찍이 시를 그만 두었고(소설을 쓰다가 급기야는 <삼국지>까지 옮기고 방송진행자까지 되었다. 오래 살고 볼일이다!), 유하는 영화계 주변을 맴돌다가 다시 시의 초심(初心)으로 되돌가겠다며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를 발표하고 욕을 먹는다. 하지만, 다시 영화를 만들고 이번엔 성공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생각만큼 미친짓은 아니다. 특히 요즘은.

 

 

 

 

 

 

 

 

 

그리고 기형도. 그의 시가 자리하는 건 80년대 말이다. 이 글은 전체가 사실 기형도론의 서론으로 씌어진 것이기도 했다. 물론 100년의 한국시사가 두 쪽 분량으로 요약될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편집증적인 시읽기에 있어서) 시의 전사(前史)를 모르고 한 시인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전공작이 필요하다고 당시엔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시에 대해선 얼마전에도 몇 자 적어둔 바 있다. 언젠가 제대로 된 규모의 글을 쓴다면, 아마도 이 전사(前史) 또한 제대로 된 규모로 재구성되어야 하리라. 제대로 읽는다는 건 제대로 사는 것만큼이나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05.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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