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히피드림~ > 와이오밍 스토리: 바꿀 수 없다면 견딜 수 밖에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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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을 읽은, 혹은 앞으로 읽게 될 많은 독자들은 미국의 중서부 와이오밍 주를 배경으로 하는 이 열 한편의 소설을 쓴 작가 애니 프루가 와이오밍 토박이이거나 이 곳 출신일 거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목부의 고단한 삶과 중서부 자연의 황량한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는 이 소설들은 마치 작가 그 자신의 경험처럼 생생하고 디테일이 살아 있다. 하지만 1935년 생으로 나이 쉰이 넘어서 등단한 이 노작가는 와이오밍에서 산지 이제 겨우 일 년이 넘은 올해 나이 71세의 할머니 작가이다. 젊을때부터 글을 쓰던 작가라 할지라도 나이가 들면 지력이나 기억력이 쇠하기 때문에 글을 쓰기가 힘들어 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와이오밍에 살며 지금도 글을 쓰고 있고, 아카데미 수상작의 원작 소설가라는 큰 영예를 안았다. 또 그녀는 1998년과 99년 연달아 오.헨리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98년 수상작은 이 책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소설이자, 이안감독의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원작 동명소설이며, 그 다음해엔 로데오 카우보이의 이야기를 담은 진창(The Mud Below)이 연거푸 같은 상을 거머쥐는 보기드문 전례를 남겼다. 또 애니 프루는 지난 2004년 이 책 브로크백 마운틴(Close Range:Wyoming stories)의 속편 격인 Bad dirt :Wyoming Stories 2를 내놓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내가 좋아하는 음악영화인 "올모스트 페이머스"의 DVD를 준다는 것에 혹해서(?) 샀다. 아직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 열 한편의 빼어난 단편들은 영화라는 이슈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의미있게 존재하고 있으며, 삶에 대한, 고통스럽지만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그 누구에게도 삶이란 만만치 않은 그 무엇이며, 결국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바로 그 순간부터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삶을 하릴없이 견디기 마련인 미천한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만들어 준다. 비록 인간들이 오만하게도 삶을 당당히 극복해 나가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지만.
이 단편집을 통해서 보건데, 애니 프루는 무엇보다 문체적으로 잘 단련이 된 작가이다. 젊은 시절에는 기자로 활동했고 쉰이 넘은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했다면 어느 날 나이 든 그녀가 글을 썼다기 보다는 젊은 시절부터 그만큼 '긴 습작의 시간'이 있었다고 믿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오랜시간 단련된 무쇠와 같은 은근함과 끈기로 그녀는 자신의 문장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한다. 은근하고 세련된 뉘앙스가 풍기는 문장과 적확한 단어들에 삶의 잠언들을 실어 강렬하고 안정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쓸데없이 멋을 부리는 법도 없고 학자적인 현학성으로 알기듣기 힘든 애매한 말을 하는 법도 없다.
보통의 단편소설들이 비교적 짧은 시간동안 일어난 일을 소재로 뼈대보다 살을 더 중요시 여기게 마련인 구성을 취한다면, 그녀는 풍부한 이야기성을 무기로 삼아 꽤 오랜 시간동안 점진적으로 일어난 삶의 복잡다단한 이야기들을 짧은 수십 페이지의 이야기 안에 집어넣는다. 불과 수 십 페이지 안에 한 가계 혹은 한 사람의 일생 전체를 담아내는 것이다.(그래서 40페이지 짜리 단편이 장편영화로 탄생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전체를 아우르는 대담한 방식을 취할때, 우리는 인간의 보잘것 없는 삶과 그 비극성에 주목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단편소설과는 사뭇 다른 이런 그녀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절망적인 고향을 떠났던 스물 세살 청년이 60년 만에 아버지와 아우가 묻혀있는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그는 60여년간 완전히 잊었다고 믿었던 그 곳이 사실 한번도 자신의 곁을 떠난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언제라도 불구가 될수도 있는 로데오를 할때에만 자기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젊은이의 이야기는 어떤가. 똑똑하고 호기심많던 젊은이가 시골 한구석의 목장에서 젊음을 낭비하기를 거부하고 더 넒은 세상을 보고 싶어서 고향을 떠났는데 불과 몇년 후, 젊은이다운 호기심과 야심은 간데 없고 그를 덮친 불행은 또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매정한 부모와 어쩔 수 없는 환경때문에 미래를 포기하고 목장 한구석에서 늙어갈 운명의 처녀와 고집스럽게 100살을 넘긴 그녀의 할아버지. 그녀가 어머니의 결혼 밀을 벨때 정말 통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차치하고라도 이 소설은 미국이라는 문명권 밖에서 막연히 가질법한 카우보이와 목장생활에 대한 동경과 낭만을 무참히 깨버린다. 한국에서 농사짓는 것이 한없이 막막하고 고된 일인 것처럼 미국의 중서부 시골에서 인구밀도도 낮고 정부의 쇠고기정책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21세기임에도 불구하고 홍수나 가뭄같은 자연재해에 소떼를 모두 잃고 파산해 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목부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책머리에 어느 이름없는 카우보이의 말을 인용한 "이 곳보다 더 현실적인 곳은 없다"라는 말이 가지는 리얼리티를 책을 다 읽고 덮으며 실감할 수 있었다. 굳이 "이 거칠고 무자비한 땅에서 목장 일로 생계를 꾸려간다는 결정 자체가 환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현실과 직면하는 것" 이라고 말하는 애니 프루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