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로렌 허프 지음, 정해영 옮김 / ㅁ(미음)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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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은 이 두꺼운 책으로 얻어맞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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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한 내 일 - 일 잘하는 여성들은 어떻게 내 직업을 발견했을까?
이다혜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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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다양하게 사는 여성들을 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꿈의 범위가 달라지니까요,"




  <내일을 위한 내 일>의 인터뷰이 중 한 명인 경연인 엄윤미씨가 한 말이다. 이 말로 <내일을 위한 내 일>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대신할 수 있겠다. <내일을 위한 내 일>은 이다혜 기자가 여러 직종에서 한창 일하는 중인 여성들의 현장감 있는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집이다. 9명의 인터뷰이는 모두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영화감독부터 프로파일러까지 부러 다양하게, 주변에서 흔히 접하기 어려운 직업들로 꾸린 목록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다양하게 사는 여성들을 보일 것. 여성들의 일과 삶에 대한 빈약한 상상력을 자극할 것. 아마 여성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엄윤미씨가 말했듯, 꿈의 범위를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 단단히 자리 잡은 여성들은 자신의 일을 찾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존재 자체만으로 길잡이이자 멘토일 수 있다.그러나 이 책은 여성을 그와 같이 '이룬 자'와 '쫓는 자'로 이분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서문에서 '이 책은 위인전이 아니다'라고 못 박은 이다혜 기자는 인터뷰이의 말이 '지금 함께 고민하는 자'의 말로 읽히길 원한다. 그의 관심은 '완료형'보다 '현재진행형'에 있다. 이미 무엇이 된 것 같은 사람들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전히 '되고 있는 중'이다. 배구선수가, 바리스타가, 고인류학자가 되고 난 이후에도 계속 그것이기 위해서, 혹은 더 나은 그것이 되기 위해서 그들은 고민한다. 저자는 인터뷰이들이 '되고 있는 자'로서 했고, 또 하고 있는 고민들을 포착한다. 그렇게 이 책을 독자의 앞보다는 곁에 두고자 한다.  



 그리고 저자는 (완료형) 성취에 집중하지 않는 대신, 인터뷰이들의 고민과 고민 사이에 놓인 분명한 도약들을 건져 올린다. 그 도약들은 A to Z의 요령이 아닌 그들 각자가 일과 삶에 대해 갖는 태도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대부분의 인터뷰이들이 타인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중요시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일 잘하는 여성은 자신이 누군가와 '함께' 일하고 있음을, 자신의 일이 누군가와 반드시 연결됨을 잊지 않는다는 메시지는 특별하게 고무적이다. 나는 이 책이 시리즈로 꾸준히 나왔으면 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언급했듯 충분히 다양한 직종을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언젠가, 소위 흔하고 평범하다고 (혹은 평범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직종에서 자신만의 길을 뚫어온 여성들 또한 책에 실리길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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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
김초엽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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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


1. 팬데믹XSF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한 폐렴'이라고 불릴 때, 폐쇄된 우한의 실시간 상황이라며 떠돌던 영상들과 텅 빈 명동거리 사진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아포칼립스를 연상했다. 그 한두 달 간의 뒤숭숭했던 공기를 기억한다. 이후 몇 번의 분수령을 거쳐 다다른 지금 여기는 어느 때보다도 미래와 가까운 것 같다. 아니 언제나 지금이 가장 미래와 가까우니, 대신 시시각각으로 도래하는 미래를 어느 때보다 더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돌아보지 않으려면 앞을 보는 수 밖에 없으니까. '돌아갈 수 없다'는 문장을, 술자리에서 나의 스무 살을 아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늘 관심 밖이었던) 인류의 운명을 애도하기 위해 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맨 얼굴로 가을 바람을 맞고 친구들과 내킬 때마다 어디서든 술을 마시고 여행을 떠나고 날마다 수영을 다니던 시절로 당분간은-이라고 간절하게 덧붙인다-나는, 또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과거와의 깊은 단절로 우리는 미래를 날카롭게 실감하는 중이다. 더 외롭고 차가울 미래를 예감하고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질 미래를 소원하면서. 이런 상황 속에서 SF는 시기 적절한 장르가 되었다. 코로나(팬데믹)과 SF를 크로스한 기획이 놀랍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다. 어쩌면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상상력으로 알 수 없는 미래를 메우고 불안한 현재를 위로 받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의 표지 뒤, '우리에겐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라는 문구에 고개를 크게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책은 Apocalypse : 끝과 시작 / Contagion : 전염의 충격 / New normal : 다시 만난 세계, 총 세 파트로 나뉘어 있다. 각 파트엔 두 개의 글이 실려있는데, 그 중 가장 따뜻하고 유쾌하게 읽은 김초엽의 <최후의 라이오니>와 배명훈의 <차카타파의 열망으로>에 대해 짤막하게 써보려 한다.


2. 김초엽, <최후의 라이오니>


<최후의 라이오니>엔 보편의 인간 종보다 훨씬 담대하고 강인하며 용감하다는 종족, 로몬이 등장한다. 로몬은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기 때문에 우주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멸망을 기꺼이 목격하고 분석하길 원한다. 그들은 폐허에서 남은 자원과 정보를 회수하여 우주의 다른 공간으로 보내는, 태생적인 회수인이다. 그러나 주인공 '나'는 로몬임에도 불구하고 멸망에 대해 너무도 구체적으로 두려워 하는 별종이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시스템은 의문의 거주구 3420ED의 단독조사를 의뢰하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쓸모 있는 로몬으로 거듭나기 위해 묘한 끌림과 함께 그곳으로 떠난다. 이미 멸망한 줄로만 알았던 그곳에서 '나'는 기계들과 조우해 '라이오니'라는 이름을 처음 듣게 된다.


'나'는 김초엽의 전작 <인지 공간>의 이브와 마찬가지로 그가 속한 세계의 기준으로 '열등하다'. 열등함은 사회가 그들에게 지운 한계에서 비롯되는 특성이다. 지식의 거대한 구조물은 이브의 작은 체구를 허락하지 않는다. 로몬의 임무 또한 '나'의 두려움을 용인하지 않는다. '약함'은 그들의 사회에서 결함이고 제외의 대상이다. 그러나 김초엽의 시선 안에서 그들의 약함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된다. 이브는 인지 공간의 바깥을 상상했고, '나'는 누구도 가치를 두지 않는 행성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닫고 의연히 멸망을 지켜본다.


김초엽은 '미래 사회에서까지 차별과 배제가 공고히 유지되는 이야기를 써야 하냐'는 물음에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모순에 맞서며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애써 상상해 보는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 말대로다. 김초엽의 미래에선 지금과 다를 바 없이 누군가 소외되고 '잘못된 종에 갇혀 있다는 감각'을 느낀다. 그러나 그 미래에서 그들이 반드시 스스로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김초엽의 SF는 완성된다.


<인지 공간>에 이어 <최후의 라이오니>에서도 김초엽은 사회의 '완전한' 몸만을 위한 설계를 성찰한다. <최후의 라이오니> 속 불멸하는 존재들을 위한 행성(3420ED)은 질병과 사고에 정신적으로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몸이야 언제든 교체하면 되는 것이기에 불멸인들은 질병과 장애, 노화와 죽음에 무지한 채로 사회를 설계했을 것이다. 책에는 그들이 죽음이 발생하자 준비되지 않은 공포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모습이 주로 묘사되었지만, 행성을 걷잡을 수 없이 멸망으로 내몰았던 건 이제 다치고 아프고 늙게 된 몸을 감당할 수 없는 사회의 물리적 설계 방식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행성의 멸망은 일종의 경고처럼 느껴진다. '완전한' 몸에 대한 열망으로, 우리의 몸이 병들고 장애를 가지고 늙을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설계되는 우리 사회를 향한 경고. 결국 그 안에 누구도 살 수 없는, 잔인할 만큼 완벽한 구조를 김초엽은 믿지 않는다.


3. 배명훈,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처음엔 오타인가 싶었다. 시기 맞춰 급하게 나오느라 검수가 제대로 안 된 건가? 몇 문단을 더 읽고 나서 다시 제목을 봤다. 아 이 '차카타파'가 그 '차카타파'야?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단박에 알 것이다. 아직 안 읽은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일독을 권하고 싶다. 읽는 데 다른 글보다 1.5배 정도 더 걸린 이 글이 이번 기획의 엑기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명훈의 22세기 속 한국어엔 거센소리가 없다. 사람들이 2020년-대감염병의 시대를 통과하며 더욱 위생적인 생활양식에 집착하다 결국 '비말이 튀는' 거센소리를 사용하지 않기까지 이른 것이다. 된소리의 실종은 2113년의 뉴 노멀이 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22세기 인간인 '나'가 하는 모든 말엔 (그러니까 1인칭 시점으로 쓰인 이 글 전체에) 거센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설명은 21세기 독자가 '날자를 일괄적으로 득정할 수 없는 것은 분야마다 수집 기준일이 다르기 대문이다.''와 같은 문장에 충분히 당황한 이후에 주어진다. 처음 이 문장을 읽고 눈을 비볐다. 그리고 물었다. 지금 뭐가 잘못된 거지?


'나'는 2113년의 역사학과 학생으로, 논문 쓸 자격을 얻기 위해 격리실습을 하는 중이다 격리실습이란 현재라는 시간으로부터 격리되어, 2020년 5월 어느 날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정보만 모아놓은 근대사 아카이브에 4주간 기거하며 소논문 한 편을 완성하는 일이다. 실습 도중 '나'는 아카이브 방문객과 교류하면 안 된다는 규칙을 깨고, 유명 배우 서한지가 차기작을 위해 열람하는 영상자료를 염탐한다. 그리고 그 문제의 '거센소리'를 아주 강렬하게 듣고 보게 된다. 사극 배우들이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외치고 뮤지컬 배우들이 서로에게 거침없이 침 튀기며 노래할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노력 끝에 21세기의 발성법과 그 안에 담긴 진심까지 획득한 서한지의 한 마디를 듣고 나서 '나'는 거센소리, 즉 차카타파에 전율할 줄 아는 미래인이 된다. 달줄이 아니라 탈출이다, 가다르시스가 카타르시스다!


미래는 우주탐사, 타임슬립, 순간이동, 인공지능, 로봇 등 온갖(이라기엔 소박한 목록이다) 방식으로 상상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무리 그럴 듯하게 묘사돼도 어쩐지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아마 상상의 바탕이 될 경험이 빈약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언어에 관해서라면 우리 모두가 전문가이다. 매분 매초를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언어적 변화는 어떤 기술적/물리적 격변 보다 더 날카롭고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나 기계와의 우정보다 거센소리 없는 언어가 훨씬 더 실감난다는 얘기다. 배명훈은 그 점을 적극 이용해 독자들로 하여금 뉴 노멀의 미래를 언어적으로 직접 경험토록 한다. 독자는 차카타파의 부재 속에서 (더듬더듬) 글을 읽으며 차카타파를 열망하게 되고 종국엔 22세기 인간과 함께 차카타파의 카타르시스를 함께 느낀다. 이 때의 '차카타파'를 우리가 이전엔 당연히 여겼지만 더 이상 누리지 못하는 일상에 대한 은유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노드'로 완성되는 이 이야기의 기발함과 유쾌함을 코로나 시대의 많은 독자들이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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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동네
손보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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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의 <작은 동네>는 엄마가 꾸린 세계의 끝에 다다른 딸의 이야기다. '너의 삶, 너의 행복, 너의 안전'을 지키는 게 자신의 지상 과제라고 말하는 엄마 밑에서 주인공은 폐쇄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과보호를 받고 자란다. 무엇이 엄마로 하여금 그토록-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할 정도로- 딸 걱정을 하게 만들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엄마는 늘 말하기보다 다물기를 택했고, 엄마의 침묵이 일군 세계 속에서 '나'는 어느 정도 엄마의 바람대로 자란 듯했다. 결혼까지 한 '나'를 보며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했으니까.


'이제 좀 안심이 된다, 너의 인생이.'


그러나 죽음을 앞둔 엄마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그 세계엔 서서히 균열이 인다. 엄마의 이야기는 정말 중요한 건 말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나'가 열한 살 때 집을 나간 아빠까지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며 엄마의 장례식에 찾아오자 '나'는 무언가 감춰졌음을 직감한다.('나'는 아빠의 얘기를 듣길 거부한다. 아빠에 대한 괘씸함-'나'는 그런 감정 따위 남았을 리 없다고 부정하지만-이 직감을 앞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말해진 것들 사이에서 울리는, 말해지지 않은 사실들의 진동이 '나'가 발 딛고 선 세계의 지반을 집요하게 뒤흔든다. 물러졌던 기억들은 불시에 단단히 융기하고 '나'는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이 한동안 함께 했던 "작은 동네"로 자꾸만 이끌려 들어간다.


작은 동네. 엄마의 말대로라면, 큰 화재가 났던 곳.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고 떠났지만 정착할 곳이 없어 돌아왔던 곳.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오빠가 죽었던 곳. '나'가 그곳에서 보낸 유년은 어쩐지 살풍경하다. '나'의 부모는 담장을 높이 쌓고 그들 가족을 동네로부터 고립시켰다. '나'는 무엇을 하든 엄마의 허락이 있어야 했고 어딜 가든 엄마의 손을 잡아야 했다. 자유와 모험으로 가득한 어린 시절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엄마와 아빠가 승인한 세계 안에 머물러야만 했다. '나'의 회상에서 부모는 '나'를 어떤 비밀로부터 철저히 제외시켜려는 공모자처럼 비친다.'나'는 불안하고 수상한 기운이 감도는 유년의 뜰을 샅샅이 뒤진다. 무엇인가 기어코 드러나기를 기다리면서.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가 교직되어 지그재그로 나아간다. 현재의 '나'는 과거를 곱씹는 동시에, 과거와 미묘하게 연결된 듯한 일들에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뻗는다. 어느 순간부터 남편의 기사 스크랩북을 강박적으로 뒤적거리고 남편이 일하는 연예 기획사 소속의 여배우(윤이소)가 갑자기 증발해버린 이유에 집착한다. 그런 '나'의 혼란스러운 행동들은 일종의 단서다. 윤이소는 '나'의 엄마가 작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관계를 맺은, 왕년에 유명 가수였으나 정치인과의 스캔들로 인해 일순에 무대에서 사라져 외딴 별장에 갇힌 여가수와 겹쳐진다. 윤이소가 사라진 이유를 여가수로부터 유추할 수 있듯, '나'의 기억이 '나'에게 설명하지 못하는 지점을 스크랩북(의 바로 '그' 기사)가 폭로할 것이라는 예감을 독자는 갖게 된다.

지그재그의 진폭은 점점 줄어들어 단 한곳으로 이어진다. 바로 기억과 다른 사실말이다. 거기서 마침내 지금까지의 세계는 깨어진다. 엄마가 꾸린 세계는 엄마가 꾸민 세계가 되고, '나'의 발밑은 꺼져버린다. 이제껏 나의 '과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일 위로 줄을 그어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딛고 서야 할까?


마지막 장면은 무너진 세계를 애도하는 것만 같아 인상적이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엄마의 옆얼굴이 떠올랐다. 엄마의 옆얼굴은 어딘지 두려운 데가 있다. 내가 아닌 먼 곳에 무심히 던져둔 시선은 엄마를 모르는 사람으로 만든다. 나를 익숙하게 걱정하고 사랑하고 때론 미워하는 눈동자가 거기엔 없다. 대신 내게 말하지 않은 것과 영원히 말하지 않을 무언가만 어둡게 고여있다. 한 사람으로서 삶에서 내린 결단들과 그로부터의 회한은 엄마라는 호칭을 벗어난다. 그럴 때 엄마는 내가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아 절망스럽다. 답해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무엇을 왜 말하지 않는 거냐고 갈급히 물어 엄마를 내가 알던 엄마로 되돌리고 싶어진다.


늘 더 모르는 쪽은 딸이라고 생각한다. 딸은 별 수없이 털어놓아야 경우에도 엄마는 원하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다. 마침내는 먼저 죽음으로써 완전히 감출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엄마가 죽고 나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나'는 늦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죽은 엄마의 옆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볼 수밖엔 없는 것이다. 죽은 이는 말이 없으니 묻거나 불러도 돌아볼 리 없다. 그러나 그 침묵과의 대결 끝에 '나'는 엄마와 '동등'하게 알게 되지만, 앎의 대가 또한 치러야 한다. 엄마가 일으켜 세운 세계가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함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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