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의 기도 비아 기도
스탠리 하우워어스 지음, 정다운 옮김 / 비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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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소서

예수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막1:35, 마14:23, 마26:39-44, 눅5:16, 눅6:12, 눅22:41-43) 어느날 여느 때처럼 한적한 곳에서 기도를 마친 예수에게 제자들이 물었다. “요한이 그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소서” 곧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다. 기독교의 뿌리가 된 ‘주기도문’ 탄생의 순간이다. 여기서 질문, 제자들은 기도하는 법을 정말 몰랐을까? 아닐 것이다. 독실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야훼에게 늘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편 기자가 부르짖는 수많은 기도를, 구약의 예언자들이 간절히 드렸던 기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제자들은 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예수를 유심히 보고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이는 ‘바쁜 중에도 항상 기도하는 예수가 어떻게 기도 할까’라는 궁금증에서 나온 질문일 것이다. 또 그동안 보지 못했던 권위로 말씀을 가르치고, 여러 기적을 행하는 훌륭한 선생에게 사사를 받고 싶은 배움의 욕구일 수도 있겠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언어로, 그들의 수준에서’ 기도를 가르쳤다. ‘하늘, 땅, 아버지, 거룩, 빵, 죄(또는 빚), 용서(또는 탕감), 시험(또는 유혹), 악’ 등 이스라엘의 역사와 세계관에서 ‘그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이점이 중요하다)로 그들이 기도하게 했다.


기도를 못하는 “미국 최고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신학자의 기도] (정다운 옮김, 비아, 2018) 본 책의 서문에서 기도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고백을 한다. “저는 기도에 대해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 그리스도인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심장과도 같은 역할을 함을 이해했지만, 이른바 ‘저의 말로’ 드리는 기도는 할 수 없었습니다.” 당황스러웠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아닌가! 타임지가 선정한 “미국 최고의 신학자”인 그가, [평화의 나라], [교회됨] 등 기독교의 명저를 저술한 그가 ‘기도에 감을 잡지 못했다’니. ‘지나친 겸손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자에게 기도는 ‘자신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으며, 인간적인 욕구를 확인하는 감정의 토로가 아닌, 꾸밈없는 평범한 것’이다. 또한 ‘기도는 결코 우리의 삶과 떨어진 모호한 것이 아니므로 인간의 기도를 듣고 싶어 하는 그분께 드리는 기도, 곧 “우리의 언어, 우리의 삶에서 나온 언어로 드리는 기도”가 그의 기도의 특징’이다. 지나친 겸손이 아니었던 것이다! 본 서는 저자의 이런 기도문을 모은 기도집이다. 즉석에서 떠오르는 대로 기도할 수 없던 그가(이 얼마나 정직한가!) 강의 시작 기도문을 아침마다 시간내서 작성하고, 수업 시간마다 드린 그 기도문들을 모은 것이 바로 이 기도집이다.


대화로서의 기도
   대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행위다.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행위다. ‘마주 대하는 것’, 곧 일방적인 응시가 아닌 눈과 눈이 마주하고, 서로의 음성언어와 동작언어가 뒤엉키는 사건이 전제된 행위가 바로 ‘대화’인 것이다. 따라서 대화가 연설이나 설교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상대를 바르게 마주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대화를 할 때 ‘나’를 꾸밀 필요없다. 지금, 이곳에 당신을 마주한 나를 있는 그대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대화의 상대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나길 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신뢰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용기가 없으면 우린 내가 아닌 가면의 뒤에 숨은 나로, 부차적인 언어들로 꾸민 나로 상대를 마주하게 된다. 이는 정직한 마주 대함이 아닐 뿐더러 진짜 대화라 보기 어렵다.
   이 기도서에 수록된 기도들의 특징은 ‘대화로서의 기도’를 지향한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대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상대인 “그분께서 우리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신다는, 그분이 듣고자 하시는 기도가 바로 우리의 언어, 우리의 삶에서 나온 언어로 드리는 기도라는 것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미 다 나를 알고계시니 나를 숨길 필요 없다. 숨겨서도 안된다. 그래서 우리는 화려한 말놀음과 억지로 쥐어짜낸 생각들로 기도하기 보다는 “우리의 언어, 우리의 삶에서 나온 언어로”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분을 정직하게 마주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가 대화가 아닌 자폐(자폐 장애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로 끝나선 안된다.자폐는 “심리적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자기 내면세계에 틀어박히는 정신적인 질환. 현실 세계는 꿈과 같이 보이며, 대인 교섭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태다. 마주 대하지 못하는 대화, 일방적인 말의 배설만이 존재하는 기도는 그분과의 대화가 아닌 기도자의 자폐 행위일 뿐이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그래서 우리는 이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나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누구인지 집요하게 스스로에게 묻는 자만이 ‘자신의 언어’, ‘자신의 삶에서 나온 언어’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타인이 보는 나, 타인의 시선에 맞춰진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닐 뿐더러 진정한 내가 될 수 없다. 저자가 작성한 기도문을 읽노라면 이러한 ‘자기 물음’이 그의 삶에서 얼마나 치열했을지 생각하게 된다. 저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 같다. 그래서 저자의 기도문엔 저자가 어떤 사람으로 그분께 기도를 하는지, 저자가 어떤 생각과 마음을 그분께 품고있는지가 묻어난다. 그 묻어남 덕에 저자의 기도문엔 특별한 울림이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도 기도에 앞서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누구인가?”하고 말이다. 어쩌면 이 물음은 모든 기도에 선행되어야 할 질문일지도.


'있는 그대로' 기도하기
   소위 ‘정상성’이라는 말이 주는 폭력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정상은 “있는 그대로의 사정과 형편”이라는 의미에서 정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기도문은 정상이다. 저자는 있는 그대로의 사정과 형편을 숨기지 않고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기도한다. 어려운 말과, 휘황찬란한 수식어로 저자의 사정과 형편을 빗겨가려 하지 않는다. 전쟁과 자연재해, 자살, 죽음, 공동체의 아픔 ∙∙∙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정상으로 기도한다. 저자라고 해서 그러한 아픔을 왜 숨기고싶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저자는 용기를 낸다. 그의 용기 이면엔 “기도가 우리 삶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그의 신념이 있다. 저자는 탄백한다.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말한다. 우리가 기도 드리는 그분은 굳이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아신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저자처럼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그분께 나아가야하지 않을까. 애매하고 모호한 언어의 그늘에 숨고 싶은 유혹을 뒤로한 채로 말이다.


나를 엮어내는 언어


신학이란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분과 함께, 그분을 향해, 그분에 관해 말하는 법을 익히는 끝없는 훈련입니다. 기도란 모든 말 중의 말 그 모든 말의 결정체입니다. 모든 신학은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21) 


   신학에 관해 수 많은 정의가 있지만, 저자가 말하는 신학은 내게 진정성 있게, 보다 진실하게 다가왔다. 보이지 않는 그분을 향해, 없이 계시는 그분에 관해 말하는 법을 익히는 끝없는 훈련. 그게 바로 신학이다. 그 말 중의 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알짬이 기도기에 저자의 기도문엔 그의 신학이 짙게 베여있다. 오해하지 마시라. 그가 기도문의 형식을 빌어 그의 신학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도 이를 가장 경계한다. 그의 신학이 사변적인 언어의 나열이 아닌 저자의 삶을 담은 고백의 언어를 향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감각으로 깨달아지지 않으면 설명해내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다. 그러나 저자의 기도집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된 것이 있다면 나의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진리를 어떻게든 설명해내려는 욕구를 조금 누그러뜨려야겠다는 것. 때로는 일상의 언어와 보통의 삶을 담은 기도문 한편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자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일지도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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