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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 - 전면개정판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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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속인다. 모든 걸 해결해줄 것인 양 군다. 사람들은 속는다. 어떤 문제들은 일찍이 종결된 문제처럼, 조금은 고리타분한 문제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고 그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와 있다. 오래된 문제들을 향한 시선이 매섭다. 자신의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고 싶은 이들은 고전적 이슈에 냉소를 보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가치가 실제로 훼손되거나 해체되지는 않는다. 원형적인 문제들은 위대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역사 밖에 자리한다.

죽음, 자유, 무의미, 흔히 실존적 문제라 칭해지는 이들이다. 그들은 인간 삶의 조건이자 그 한계를 규정짓는 이들이다. 그들은 인간 삶에 일종의 형태를 부여한다. 이들을 인식하는 순간 선명했던 것들이 흐릿해진다. 카뮈가 말했듯 ‘문득 무대장치가 붕괴되는 일이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메고 가야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일단 한번 자신이 ‘시간 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나면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다. 자신의 육체가 언제 어떻게 무너질 지 알 수없다. 믿음과 기대 그리고 신뢰는 언제나 배신당할 위험이 있다. 그들은 이제 ‘사람의 일은 언제나 잘못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 불행히도, 죽음과 같은 것은 여태 단 한번도 극복된 적이 없는 것이어서 어떤 모습으로 내게 얼굴을 들이밀지 예측할 수가 없다. 시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사람은 언제까지나 취약한 존재라는 말이다.

<화이트 노이즈>는 어떻게 보면 취약함에 대한 이야기다. 여느 훌륭한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화이트 노이즈>는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모호하고 복잡하다. 은유는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저 암시할 뿐이다. 예컨대 소음이다. ‘균일한 화이트 노이즈’. 그것은 정신을 흐린다. 자기 것조차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 자신이 말하고 느꼈던 것들에 대해 말할 권리를 위임하고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무엇이 내것이고 무엇이 내것이 아닌지 분간할 수 없다. 그곳에서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 한편으로 소음은 위안이 된다. 누구나 연약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눈 돌리기 위해 몰두할 것을 필사적으로 찾아낸다. 하지만 찾아내지 못해도 괜찮다. 세상에는 공포를 흐리게 할 만한 소음들로 가득 들어차 있으니까.

모든 것이 연결되고 교차된 오늘 <화이트 노이즈>는 의미가 깊다. 물리적으로 접촉하지 않아도 전염되는, 파동과 반사를 통해 사람에서게서 사람에게로 향하는 일종의 정신감응. 꽤나 가깝게 들리는 이야기다. <화이트 노이즈>가 얼마나 당대의 미국 사회를 현실감 있게 반영하고, 그것이 또 우리 사회와 얼마나 유사한지 대조하고 투영하는 작업도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렌즈로 작품을 보고 싶지는 않다. 거대서사와 총체성을 거부하면서 시대적 렌즈를 통해 작품을 읽는 것은 멋없는 일이다. <화이트 노이즈>는 현실의 나열이나 재현 혹은 재배치가 아니다. 그것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새롭게 인식된 하나의 상이다. <화이트 노이즈>는 시종일관 인식의 문제를 거론한다. 실제 감각하는 것과 허공에 부유하는 정보를 수신하는 것이 더는 구별되지 않는 세상이다. 중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구분되지 않는 세상이다. 그 뒤에서 무엇을 읽어낼 지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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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정동호 지음 / 책세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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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니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누구나 한번쯤은 “신은 죽었다” 라는 말로 표현되는 그의 철학을 접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명성에 이끌려 책을 펼쳐보면 그의 철학이 결코 기꺼운 종류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니체의 대표작에 등장하는 인물인 차라투스트라는 옛날 사람이다. 그리고 니체도 옛날 사람이다. 자고로 젊은이가 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춘을 이해하려는 노인 만큼의 심력이 필요한 법이다. 오래된 것은 새 것만큼이나 낯설다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니체는 글을 쓰려면 피와 넋으로 쓰라는 자신의 말에 따랐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온갖 상징으로 점칠된 잠언의 형태로 남긴 것이다. 이에 니체를 처음 읽고자 하는 이는, 특히 철학을 니체 처음 접하는 이는 덜컥하고 겁을 먹기도 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이 시대가 어느 시대인가? 문명의 이기로 가득 들어찬 21세기 아닌가? 우리에게는 유튜브가 있고 인스타 그리고 위키가 있다. 하지만 당당함도 잠시, 우리는 곧바로 우리 시대의 다른 이면과 마주하고 만다. 우리는 스토리와 틱톡, 쇼츠의 시대를 살고 있다. 스낵 컬쳐처럼 우리를 흘려지나가는 정보로는 어디가서 아는 척 하기도 힘들다. 이런 스낵컬쳐로는 어려운 철학책을 찾아 펼칠 만큼 비대해진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도 걱정할 필요 없다. 이 세상에는 더 없이 무거워진 지혜를 품은 채, 온갖 고난에 시달리는 인류를 위해 몰락을 감수하는 이들이 있다. 이유가 어떠하든 오늘같은 시대에 철학에 투신하여 그 명맥을 이어주는 이들이 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더 알고자 하는 것은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과신에 들어차서 고집피우는 것은 조금 꼴 사나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보다 쉽고 편리한 길을 걷는게 현명한 모습으로 비칠지도 모를 일이다. 해설서를 집어드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의할 점은 있다. 이 책을 펼치면 우리는 필히 정동호라는 프리즘을 통해 니체를 읽게 된다. 해설서의 태생적 한계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혹자는 해설서를 읽는게 헛된 일이라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기억하라. 보다 적게 안다고 해서 오독할 확률이 적어지는 것은 아니다. 잘 못 아는 것이 두려워 배우는 것을 멀리한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철학책을 찾아읽을 만큼 사유와 가까운 사람들 아닌가? 텍스트를 판별하는 능력 쯤이야 모두들 갖추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매일같이 살아남기 위해, 범람하는 텍스트 속에서 컨텍스트를 읽어내야 하는 현대인이 아닌가!

물론 주변을 읽어내다 보면 어느새 피로감에 젖어들어가는 오늘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듯이 오늘날에는 신이 부재한 듯 싶다. 이제 사람들은 서로 자기를 주장한다. 이에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면 무엇이 자기 것이고 어디까지 남의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니체를 찾는 것은 우연이 아닐 지 모른다. 필연보다 우연을 말한 차라투스트라지만 그 스스로가 자신의 철학이 돌아올 것을 예고하지 않았는가?

살아가다보면 언젠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카뮈가 말했듯이 “마찬가지로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우리는 시간에 실려 흘러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가 시간을 떠메고 가야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이유모를 더부룩함이 느껴질 때, 나를 단단히 둘러싼 세상이 허물어지고 틈틈이 드러난 균열 사이로 뭔지 모를 무언가가 흘러들어올 때, 등에 짊어진 허상을 떨쳐내고자 할 때, 차라투스트라는 어김없이 찾아올 것이다.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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