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낙담하는 이에게 위로하듯 말을 건넨다. 지나간 것에 매이지 말라고. 몸서리치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한다. 오늘을 소중히 하라고. 멈춰선 이에게, 주저 앉은 이에게 그리고 남은 기억에 발 묶인 이들에게 사람들은 늘 말한다. 현재에 충실하라고.

그러나 현재란 것은 애매모호하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좀처럼 분명히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시간이다. 곧 다가오거나 밀려날, 그래서 결코 마주칠 수 없는 어떤 순간이다. 그것은 감각이고 감정이다. 그들은 언제나 곁에 와 있다. 아무리 단단히 묶어놓아도 절로 풀려버리는 실타래처럼, 그것은 별것 아닌 일에도 언제든 툭 터져나올 것이다.

현재는 결코 마주칠 수 없거나 항상 곁에 있기에 분명히 인식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현재성을 절실히 통감하게 되는 때가 있다. 그때는 다름아닌 자기가 늦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을 때이다. 얄궂은 일이다. 우리는 매번 지나간 뒤에만 그 일의 의미를 안다. 다음에는 다르리라 끊임없이 되내어봐도 우리는 늘 같은 일을 되풀이 한다. 실수하고, 과오를 저지르고,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며, 두 번 다시 없을 순간들을 후회들로 점철한다.

그 일은 과거에 벌어졌다. 돌릴 수 없고 다시 마주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한 기억이 그때의 떨림을 재현한다. 그 떨림이, 그때의 감각이 얼굴을 달아오르게 한다. 그리고 그 감각이나 감정은 현재의 것이다. 그렇게 과거는 현재에 머물며 현재를 끊임없이 밀어낸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시름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 시름들은 때때로 과거와의 단절을 종용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삶은 통시적이다. 나는 언제나 하나의 연속선상 위에 있으며 과거와 단절될 수 없다. 진실로 현재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에 대한 긍정은 과거에 대한 체념에서 오지 않는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남아 있는 나날>에서 현재를 새롭게 맞이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과거를 들춰낸다. 조금은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분명하게. 그렇게 과거를 이루는 장면장면들을 하나하나 골라내고 그들을 충분히 애도하고 난 후에야 이시구로는 ‘저녁’을 말한다.

근래에 보았던 소설 중에 가장 소설 같은 소설이었으며 가장 이야기 같은 이야기였다. ‘품위’라는 테마 아래 스티븐스라는 개인을 전 시대적 가치와 나란히 병치하면서도 그를 단순한 상징물로 격하시키지 않는다. [둘째날 아침, 솔즈베리]의 연회 장면에서 영국 혹은 아름다운 시절 그리고 달링턴 경과 스티븐스의 ‘품위’를 다루는 솜씨는 결말보다도 인상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