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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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명실상부한 현대인이다. 알람 소리와 함께 깨어난 당신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정신없이 머리를 가다듬고 온 집안을 이러저리 왔다갔다 하면 어느새 전차 안이다. 일터에 도착한 당신은 한 켠에 커피 한잔을 놓아둔채 시간을 흘려보내기 시작한다. 째각째각, 째각째각, 당신의 몸짓에서 시계 바늘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언제가 이런 생활을 청산하고자 하지만 당장에 밀어닥친 하루하루에 급급하다 보면 당신은 어느새 시간에 떠밀려 저 멀리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야말로 범을 타고 달리는 형세다. 한 번 인정에 얽히고 나면 벗어날 수가 없다. 그저 전차에 올라탄 채 끝없이 상승하는 사회와 함께 그대로 실려갈 뿐이다.

당신은 언제나 인정에 붙들려 사는 것이다. 당신의 이웃도, 이웃의 이웃도 그렇게 산다. 나도 그렇게 산다. 오늘은 즐겁고 내일은 서글프다. 어떤 날은 무겁고 또 다른 날은 가볍다. 내 마음 하나 멋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세상 일이라고 원하는대로 할 수 있을 리 없다. 우리가 인정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언제나 주체로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당신의 일을 제아무리 남의 일처럼 여겨보려 해도 당신의 일은 당신의 일이다. 가만히 놓아둘 수 없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참참이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인정이다.

소세키는 인정을 멀리하고자 한다. <풀베개> 속 화공도 그리 하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근대 이후 인간은 그리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근대성은 어찌보면 닳고 닳은 개념이다. 상승하는 사회, 과거에 대한 부정, 새로운 자기 체계의 정립 이 모든 것들이 아직 유효하다. 탈근대를 말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꽤 많이 흘렀지만 아직 무엇이 탈근대인지 딱 잘라 말하기 쉽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 4차 산업혁명 시대, 포스트 코로나 시대 등등, 다름 이름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그 무엇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금세 뒤로 떠밀려가고 만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는 유효성을 다했다고 말하는 근대란 이름 아래서 내일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근대 이후 세상에 나고 자란 우리는 근대적 인간이다. 100년이 지난 소세키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

근대성에 대응하는 방식이란 주제는 소세키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테마 중 하나다. <풀베개>에서는 '비인정'을 통해 그것을 그려보고자 한다. 그리고 소세키는 분명 그것을 그려냈다. <풀베개>에서의 장면장면은 몇장의 삽화 혹은 하나의 무성극처럼 보인다. 색이 빠진 그림처럼 보이는 장면들은 그리고 소리 없는 극처럼 보이는 장면들은 특유의 정적인 묘사를 통해 '인정'의 배제를 표현해낸다. 대문호라는 말이 괜한 것이 아니다. 한줄한줄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구름 위 도원이다.

도원은 아름답다. 딴 생각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 느끼면 된다. 하지만 어째선지 무언가 허전하다. 그렇다. 우리는 어찌나 저찌나 인간이기에 인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도원에 평생을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 않건만 소세키는 그곳에 근대의 발명품인 전차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 전차가 몰고온 인정이, '연민'이라는 인정이 화공의 그림을 완성한다. "그거예요! 그거! 그게 나오면 그림이 됩니다." 인정도 마냥 나쁜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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