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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퍼슨
크리스틴 루페니언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책 표지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책이었다.
"캣퍼슨"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무슨 내용일까-.
이 책에는 단편소설 <캣퍼슨>을 포함하여 11편의 소설이 포함되어 있다.
각 소설마다 분위기가 매우 다른데, 옮긴이의 말을 빌리자면 "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장르나 주제, 등장인물 면에서 아주 폭넓은 다양성을 보인다."
나는 소설 배경이 음침하거나 마무리가 찜찜한 소설을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에, 모든 작품이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었는데, 책을 읽으며 누군가를 욕하고, 무시하는 (예를 들어, 찌질이같다는 생각...)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개인적 취향은 <캣퍼슨>, <무는 여자>, <좋은 남자>, <룩 앳 유어 게임, 걸> 이었다.)
책 속의 여러 작품 중 <캣퍼슨>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캣퍼슨>은 이제 막 20대에 들어선 한 여성의 데이트 이야기를 담고있다. (내용 스포 약간 있음)
이 소설은 특히 주인공 '마고'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는데, 그 전개가 꽤나 흥미롭다.
예술영화 전용극장 매점에서 일하는 마고는 손님이었던 로버트와 연락을 주고받게 된다. 로버트와 짧은 데이트를 하고 문자를 주고 받을 때, 마고는 설렘을 느끼고 그와의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노력을 한다.
그녀는 아주 열심히 애써야만 그에게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지않아 그녀는 자신이 문자를 보냈을 때 대개는 그가 바로 답장을 보내지만 자신이 답장이 몇 시간 이상 늦어지면 그다음에 오는 그의 문자메시지가 늘 짧고 뭔가를 묻는 질문이 들어 있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므로 대화를 다시 주도하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고, 대개 그녀는 그렇게 했다. (p.20)
마고는 로버트와 데이트를 하고 그의 집에서 섹스를 하게 된다. 그녀는 그의 방에서 온갖 복잡한 감정에 빠져든다. 막상 섹스를 하려니 마고의 몸매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자신이 먼저 제안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를 중단하기에는 늦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정쩡하게 몸을 숙인 자세, 털에 가려진 물렁하고 불룩한 배를 보며 마고는 생각했다. 아 싫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발동을 걸어놓고 이제 와서 중단하려면 얼마나 많은 것이 요구 될까, 생각만 해도 까마득 했다. 대단한 재치와 상냥스러움이 요구될 테지만 그녀로서는 도저히 그런 수준을 보여주지 못할 것 같았다. (p.37)
마고는 서툰 솜씨로 섹스를 하는 로버트에게 조금은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내 그의 표정을 보며, 그가 어리고 몸매좋은 자신과 섹스를 한다는 것에 흥분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기 자신(마고)에 대한 판타지로 황홀경에 빠져든다.
그때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표정은 이제껏 그녀의 벗은 몸을 본 모든 남자들의 얼굴에서 보아온 표정을 과장된 형태로 담아낸 것 같았다. ... 자신이 섹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이것, 즉 속을 훤히 드러낸 남자들의 모습일 것이라고 마고는 생각했다. ... 키스하는 동안 그녀는 그런 판타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순사하게 자아에 대한 판타지로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이 아름다운 여자 좀 봐.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거라고 상상했다. 완벽히, 몸매도, 모든 것이, 겨우 스무살이야, 피부에 흠 하나도 없어, 이제껏 만난 그 누구보다 간절히 그녀를 원해, 너무 간절해서 죽을 것 같아. (pp.39-40)
그러나 이내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를 느끼고, 자기 혐오와 수치심까지 느끼게 된다. 이날 이후, 마고는 로버트를 피한다. 마고의 룸메이트가 로버트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문자를 대신 보내고 나서야 둘의 관계는 끝난다. 한 달 뒤에 마고는 로버트를 술집에서 마주치지만, 그를 피한다. 그리고 그에게 문자를 받게 되는데... 이것은 너무 큰 스포이므로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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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퍼슨>이 발표될 당시, 미국에서는 '미투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였다고 한다. 이 작품이 <뉴요커>에 발표되고 몇 주 되지 않아 입소문이 났을 때 작가는 꿈이 실현되어 좋기도 했지만, 압도당한 느낌과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는 당시의 느낌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세상을 향해 "누구 이런 감정 가져본 적 있나요?" 하고 물었더니 세상이 귀가 먹먹할 만큼 큰 소리로, "있어요!"하고 대답한 것 같았다.
그녀는 독자들의 반응을 통해, 이 작품이 특정 문화, 특정 연령의 여성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한국의 독자들도 모든 이야기 속에서 뭔가 진실이라고 느껴지는 것(더러는 느낌일 수도 있고, 이미지나 농담, 단 한줄의 대화)을 발견하게 되길 희망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마다 느끼는 것과 발견하는 것은 다르겠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 다른 독자들 역시 그녀가 의도한 바를 느끼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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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한 구절
<룩 앳 유어 게임, 걸>
결국 가볍게 지나간 거라고, 제시카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쨋든 찰리가 그녀에게 입힌 피해라고는 목 안에 작게 긁힌 상처를 남긴 것이고 이조차 그녀의 상상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 그럼에 결혼을 하고 그때 그녀 나이인 자녀들까지 두었으며 캘리포니아를 떠나 멀리 옮겨 온 이후로도 제시카는 오랫동안 자정이 지나기 전에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 pp.78~79
<좋은 남자>
세상은 냉혹하다. 아무도 다른 누군가를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 p.221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 건 망나니들이나 하는 짓이고, 그, 테드는 망나니가 아니었다. 그는 …… 착한 남자였다. - p.223
그는 '좋은 남자'를 받아들이 게 된 그녀들이 얼마나 우쭐해하는지 그들의 눈에서 본다.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남자'란 그 남자에 비해 자신이 너무 좋은 여자라고 마음속으로 은밀히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남자다. - p.271
<무는 여자>
코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정말로 높았다. 그는 한동안 복사실에 남아 상황을 곰곰이 생각하고는 다음 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라고 결심할 것이다. 그녀의 치아가 남긴 반달 모양의 자국, 그의 팔에 난 흉한 멍 자국을 가리기 위해 그는 긴 소매 셔츠를 입고 출근 할 것이다. ... 코리는 평생 엘리를 기억할 것이고 두 사람은 코리가 지닌 공포의 번득이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 pp.408~409
그럼에도 엘리는 6개월이 안 되어 새로운 출발을 찾아 직장을 그만두었고 이후 매년 직장을 옮겼다. 모든 직장마다 그런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어떤 남자에 대해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저 귀 기울여 듣고, 기다리고, 그에게 '기회'를 주기만 하면 머지않아 그녀를 찾아내곤 했다. - p.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