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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 - 개정판
채만식 지음 / 창비 / 2006년 5월
평점 :
시골에서 살다가 돈을 빼앗으러 오는 사람들이 무서워 서울로 올라온 윤 직원 영감은 구두쇠이다. 그는 시골의 평민 지주 출신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여의고, 남은 재산을 관리하여 더 많은 부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부가 많다고 한들 그는 평민이라는 계급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급기야 공직을 사기에 이른다. 또한 손자들에게는 군수와 경찰서장이라는 고위직을 얻게 하려하고, 양반집 자제들과 혼인을 맺는 등 자신이 평민출신이라는 열등감을 벗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관공서에서 민간인을 위해 만드는 사업 같은 것에 기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가족 즉, 아들, 손자, 며느리, 증손자까지 그에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는 돈을 조금이라도 모으려고 노력하며 고리대금을 하고 소작을 주어 세금을 걷지만, 그렇게 번 돈은 그의 식구들 덕에 적자가 날 뿐이다. 무능력하고 노름과 여자만 아는 아들 창식이 윤 주사가 그 첫 번째이고, 군수가 된다는 핑계로 여자와 술을 가까이 하며 심지어 윤 직원 영감의 도장까지 도용하는 손자 윤종수가 두 번째이다. 윤 직원 영감을 힘들게 하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1년 만에 과부가 되어 돌아온 딸 서울아씨, 언제나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는 며느리 고씨, 병신 서자 태식이, 멍청한 증손자 경손이까지 그를 괴롭히는 것이 너무 많다. 심지어 큰 손자 종수는 너무 멍청해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믿고 있던 경찰서장이 되어야 할 작은 손자인 종학이 사회주의사상을 가지고 피소되었다는 소식은 그를 절망으로 빠뜨린다.
이 책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그 시대에 조선인 부자 영감을 그려 넣어 사회를 비판하고 희화화 하고 있다. 한편, 뜻을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사투리들로 이루어진 대사들은 책을 읽는 데 조금 힘겹게 느껴졌지만, 그러한 사투리들이 조선인 부자 영감인 윤 직원 영감의 출신에 대해서 나타내 주고 있으며 글에 사실성을 부여한다. 하루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일어난 사건들이 이 책의 주 내용이다.
이 작품은 각각의 캐릭터들이 살아 숨쉬는 듯한 리얼리티가 뛰어났지만, 일제강점기의 고달픈 우리 민족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모두 태평한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속에서는 뭔가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일제강점기 때 모든 국민이 힘들게 살았는지 알았는데 역시 그 때나 지금이나 돈이 있으면 안 되는 게 없는 모양이다. 아마 작가가 노린 것도 부정적인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반어적으로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해주려는 데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에 일본에서 유학중인, 윤 직원 영감의 손주 ’종학’이 사회주의를 하다 경찰에 잡혀갔다는 전보만 전해주고 끝나, 사회주의가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가능성만 얼핏 내비쳤을 뿐,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지 못한 소설인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여건들은 윤 직원 영감이 고리대금이라는 나쁜 짓을 하고, 소작을 주는 것은 자신의 자선사업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불쌍하게 여길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뭐든 아끼려는 자세는 윤 직원 영감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게 만든다. 그를 불쌍하게 만드는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급적으로 우위에 차지하고 앉아 조선인이라면 마땅히 해방되길 원하고 증오하는 일제시대를 태평천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또다시 그에게 생긴 동정마저도 저버리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 그가 가진 생각과 그가 가진 사상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것은 용서와 화해와는 분명히 의미가 다르다. 동정 때문에 그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라온 환경으로 인해 그가 그렇게 구두쇠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고 지금 그의 계급과 그의 처지로 인해 일제시대처럼 태평천하인 시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비록 윤 직원 영감을 희화화하고 풍자하며 개인이 아닌 계급을 비판하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그의 상황들을 서술해가며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일제시대를 태평천하로 여기며 이해타산적인 모습을 보이는 윤 직원 영감을 통해 부와 권력을 추구하던 당시 일부 계층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제 딸의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