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
정현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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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홀로 남겨져있는 시간이 싫어 문지방을 항상 밟고 다니고, 깎은 손톱을 아무 데나 버려두는 것으로 반항을 했다는 소년.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반항 아닌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에세이는 절대적으로 필자의 매력에 의존하는 장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ㅡ이렇게 섬세하게 아파할 수 있는 사람이 시를 쓰는 거구나.
  떠나보낸 사람들, 지나왔던 슬픈 기억, 가난했던 유년의 기억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다. 지극한 슬픔과 사랑의 기록이 마음을 울린다. 휠체어를 탄 수족관집 소녀와의 추억, 고양이 묘묘와의 아지트는 청춘영화의 에피소드 같기도 하다. 그런 경험 속에 담긴 작가의 순수하고 여린 마음을 읽어나가면서 나의 감수성까지도 확장되는 기분을 느끼는 게 독자의 기쁨이겠지. 한편으론 마주하기 힘들어 그냥 외면하고 꼭꼭 숨겨두었던 내 안의 슬픔과 상실의 기억을 건드리기도 해서, 200페이지 남짓을 읽는 데에 며칠이나 걸렸다.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계절의 경계가 자연이 가진 가장 외롭고 아름다운 선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풍경들이 얼음옷을 입기 시작하면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은 마음. 혼자 눈 내린 길을 걷고 있으면 눈 밟는 소리들이 작고 크게 들려온다."('시간의 태엽' 中)

  시인이라서 쓸 수 있는 문장. 이렇게 찬바람이 시작되는 계절에도 (나처럼) 무딘 사람은 느껴보지 못한 감각. 매일 이렇게 많은 것들을 느끼고 살 수 있다면 인생은 좀더 깊고 넓은 것이었을텐데, 싶어 조금 아쉬워지기도 한다.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김치를 꺼내지 못했다.

  눈물을 소금으로 만들 수 있다면
  가장 슬플 때의 맛을 알 수 있을 텐데
  ㅡ'소금 달' 中(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정현우, 창비)


  시집에도 에세이집에도 초반에 실린 '멍'과 '포도나무 아래서'처럼, 시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글들도 많다. 시 뒷이야기 같은 기분도 들면서, 시를 좀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도 된다. 내가 생각했던 시의 의미와, 작가가 담고 싶었을 마음을 대어 보면서, 시인과 나의 합을 맞춰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 저자가 얼마 전 창비에서 낸 첫 시집도 잘 읽었던지라, 사적인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좀더 빨리 책을 구하고 싶었는데 운좋게 서평단에 당첨되어 가제본을 받았습니다. 감상은 저의 날것 그대로입니다.

떠난 사람들이 찾아와 닫힌 문을 두드리는 날에 나의 문장은 쓰였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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