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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1 - 1910-1915 무단통치와 함께 시작된 저항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ㅣ 35년 시리즈 1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8년 1월
평점 :
역사에 거부감이 드는 가장 큰 이유는
학창시절에 겪었던 '암기'의 고통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근대사는 그야말로 암기지옥인데,
근대사 관련 문제에 단골로 출제되는 '사건순서배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매년마다 쏟아져 나왔던
무수히 많은 사건들과 협회들, 인물들의 이름을
말 그대로 '꿰고'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런 괴로웠던 기억때문에 나름 역사애호가
취미라고 하면서도 근대사쪽은 엄두도 내지 못했었고,
그렇기에 박시백의 [35년]이 여간 반갑지 않았다.
허나 책을 다 읽은 후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강하게 남았는데, 우선 이 책은 '만화'라는 매개물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때문이다.
만화는 활자보다 그림의 면적이 더 큰 특성으로
'네러티브 서술'에 적합한 형식이다.
즉 어느해에 누가 무엇을 했다는 식의 단편적인 교과서적
서술이 아니라 기승전결이 이어지는 '스토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다른 예를 댈 것도 없이 박시백의 대표작인 [조선왕조실록]이
가장 훌륭한 예시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지난
역사적 사건들을 그저 단편적인 사실들의 나열이 아닌 그 흐름 속의
인과관계를 만화라는 형식으로 풀어냈고 덕분에 우리는 역사가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닌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활극임을
생동감있게 느낄 수 있었다.
허나 당작 [35년]은 무수히 많은 인물들에 대한 단편적인 설명들만
범람하고 있어 전작에서 느낄 수 있었던 즐거움은 커녕 어느샌가
만화를 보는 게 아니라 만화 속의 활자에만 집중을 하게 되었다.
이는 근대사에 대한 나의 배경지식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만화로 된 이 책에 관심을 보이는 독자들이라면 대부분
나처럼 근대사에 대한 소양이 충분치 않아 입문서로
쉽게 다가가보려는 생각일테니 아마 그런 독자들 중
적잖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피로함을 느꼈을 것이다.
책의 서문에서 박시백은 책의 집필목적이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로, 친일부역자는 친일부역자로 제 위치에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 라고 했는데, 이를 위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친일파를 상세하게 찾아내어
소개해주는 것은 좋지만 그로인해 왠지 일제시대를 다룬
통사가 아니라 친일인명사전의 만화판을 본 듯한 느낌이다.
물론 총 7권이라는 큰 구상에서 이제 겨우 1권을 보았을
뿐이므로 이 작품의 전체성향에 대해 속단하는 것은 이르지만
좀 더 네러티브의 비중이 늘어나면 전작 [조선왕조실록]처럼
재미와 지식을 모두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장황하게 썼지만, 단점은 위에 서술한 점 하나 뿐이다.
1권을 다 읽자마자 2권을 주문하게 될 정도로 유익한 면이 많은데
우선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많은 인물들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교과서엔 언급되지 않은 독립운동갇들의
초창기 활동들도 꼼꼼히 언급해주고 있어 청년시절부터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들의 삶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 느낌이며
지금도 교과서에 실리고 있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
출소 후 친일활동을 했던 점, 도마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 일왕에게
아버지의 반일행적을 사과했던 사건 등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사실 이광수나 김활란 처럼 적극적 친일을 한 친일파들은
논할 것도 없지만, 3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정말 생계를 위해
붓을 꺾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아는 채만식 역시 일제말에 결국 친일행위를
하게 되는데 해방 후 자책과 반성을 토로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빨리 일제가 패망할 줄 알았다면!!"이라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사실 지금의 우리야 길고 지난했던 일제의
식민통치가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끝난다는 걸 알지만,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1945년은 그저 일제의 식민지배가
35년째에 접어든 해였을 뿐이었다. 35년이면 첫해에 태어난 아이가
아버지가 되고도 남는 기간이다. 당시 서슬퍼런 폭압속에서 35년이나
지배받던 사람들이 식민지배가 바로 그 해에 그렇게 갑작스럽게
종언을 고할 거란 걸 상상이나 했을까?
채만식 역시 버티다 버티다 굴복했던 것이다.
직관적으로 채만식같은 생계형 친일과 이광수같은
적극적 친일을 같은 반열에 올리는 것은 불합리해보인다.
허나 이광수도 초기엔 계몽운동을 열심히 하던 인물로
그 역시 생계를 위해 친일을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기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진다.(실제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의
후손과 제자들이 격렬한 반발을 하며 했던 주장도 이 것이었다.)
이광수의 친일행적이 훨씬 더 많다는 점을 짚을 수 있겠지만,
만약 일제의 식민지배가 더 오래 연장됐다면 채만식도 분명
더 활발한 친일행위를 했을 것이기에 이 역시 명쾌하게 선을
그을 수가 없게된다.
즉 어떤 기준으로 생계형과 적극형을 구분할 것이며
그렇다면 생계형의 친일은 정상을 참작해야 하는가?
즉 매국행위에도 급을 나누어야 하는가?
등의 쟁점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지식인들의 이런 전향은 그 자체가 별도의 챕터로
구성돼야 할 정도로 논쟁이 많은 역사인데 앞으로 박시백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다룰지가 특히 기대되는 부분이다.
또 각 만화칸의 구성이 심플하고 활자와 딱 맞아 떨어지는
높은 퀄리티가 인상적인데, 작가가 한컷 한컷에 들인 공이
어느정도인지 느껴져 책의 가치가 더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웹툰이 각광받는 시기이니만큼 혹시 역사웹툰을 기획하는
사람이라면 장면구성기법과 구도만으로도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시백의 '사관'이 어떻게 녹아들어갈지
기대반 걱정반이다. 위에 언급한 것 처럼 서문부터
아주 분명하고 명쾌하게 책의 집필목적을 천명했는데,
역사에서 '명쾌'와 '분명'은 늘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우려스럽다.
역사에 대한 무지가 단정적인 감정과 만날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근래에 있었던 '명성황후'만 보아도 알 수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미디어가 창조한 명성황후의 이미지에
끊임없는 우려와 반론을 제기했지만 조선의 마지막 '악녀'로
동시대인들에게 지탄받았던 민비는 단지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조선의 마지막 '국모'로 탈바꿈되었다.
박시백의 '제자리찾기'가 혹여 친일/반일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채만식같은 이들에게 영구적인 낙인을 찍거나 또하나의 민비를
만들어내진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된다.
책의 부록 중 인명사전에서 김구에 대한 설명이 조금 걸리는데,
잘 알려져 있듯 김구는 젊은시절 주막에서 쓰치다라는 일본인을
살해하고 돈을 갈취한 적이있다.
이에 대해 그는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쓰치다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낭인이기에 죽였다고 해명하지만, 이후 재판에서 스스로가 증언했듯
그 증거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남아있는 자료를 추적해보면 쓰치다는
대마도출신의 상인으로 김구가 주장한 것처럼 상인으로 위장한 게 아닌
진짜 일개 상인이었던 것이다.
김구는 또 '나이도 젊은 놈이 나이많은 사람들도 기다리고 있는데
감히 주막에 와서 먼저 밥을 달라고 한 게 괘씸해서'라고 했는데
한마디로 젊은놈이 줄을 안서서 죽였다는 말이다.
정황을 살펴보면,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행상을 떠난 젊은이 쓰치다는
을미사변으로 조선 내 반일정서가 심해지자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타러 인천으로 내려가던 중, 급한 마음에 빨리 밥을 먹으려고
새치기를 했다가 그걸 괘씸하게 생각한 김구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고,
'조선인 행세를 했다'는 김구의 진술도 을미사변에 따른 반일감정을 의식해
최대한 일본인인 걸 숨기려고 했던 걸로 보인다.
진실이 무엇이든 이 쓰치다 살인사건은 객관적으로 엄연한 강도살인이고
김구의 '자서전'외엔 어디에도 쓰치다가 밀정, 낭인이라는 증거가 없는 것이
드러났음에도 2017년에 출간된 [35년]의 인명사전 김구편엔 여전히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맨손으로 처단하고 은신해 있던 중' 이라고 쓰여있다.
상대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칼로 난자해서 죽이고(재판과정에서 김구가 진술했다)
시체를 버린 뒤 돈을 갈취해 '홧김에' 나귀를 사고 남는 돈은 주변사람들에게
나눠줘 버려도 되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유명한 김구가 한 행동이기에
그냥 적당히 넘기거나 김구의 자기변호만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김구옹호론자들은 '그 당시엔 을미사변으로 분위기가 워낙 험해서 일본인이라는
사실 만으로 살해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데
그렇다면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퍼뜨리고 있다는 소문에 분노한
일본민중이 조선인들을 사냥하고 다니며 학살한 사건에 대해 일본인들이
똑같은 논리로 옹호한다 해도 할 말이 없다.
김구가 쓰치다가 을미사변의 주범이라고 '오해'했듯 일본인들도 그당시엔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탄다고 '오해'해서 벌이진 일이기 때문이고
이로인해 그 당시엔 분위기가 워낙 험해서 조선인이라는 사실 만으로
살해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권에선 아직 김구의 쓰치다 살인사건이 다뤄지지 않았으니
이 또한 속단할 순 없지만, 어쨌든 인명사전에 이 사건이
김구편향적으로만 기술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친일파를 제대로 단죄하지 못해 아직도 진행중인
근대사를 다루는 책이니만큼, [35년]은 박시백이라는
일개 개인의 사관이 녹아든 책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균형을 유지하며 비판적으로 보는 신중함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