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 <낯선 여인의 키스>
세상에나. 안톤 체호프. 의사이자 작가였던 러시아의 대문호.
그의 책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새롭게 일깨워주는 이런 식의 책 디자인, 구성, 소설 목록 설정 모두 너무 완벽하게 마음에 들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박성민 대표님/번역가님의 "시와서"(시와서는 일본문학 전문 1인 출판사)와 더불어 내가 또 너무 사랑하는 박소정 대표님의 지성과 감성 완전 최고이십니다!!!!!
나도 출판사에서 일해봐서 알지만 저런 패브릭 소재로 책 표지 만드는 거 생각보다 쉬운 선택은 아니다. 이송 과정에서 때가 탈 수 있고 얼룩 남으면 클레임이 들어올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감하게 그걸 무릅쓰고 저런 식으로 너무나 아름답게 책을 만드셨다니 녹색광선 책은 앞으로 연속 구매할 수밖에 없자나...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자나... 확실히 비즈니스는 뛰어난 지성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예술을 평소에 사랑하는 자의 높은 안목과 탁월한 미적 감각이 받쳐줘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물성 너무 마음에 든다고...
안톤 체호프. 그는 참 못됐다. 글을 이토록 훌륭하게 잘 쓰는 인간이 남겨놓는 메시지란 결국 지극히 현실적이고 비관적이다. 이토록 사람을 쥐락펴락하면서 매력적인 문체에 홀리게 만든 다음에 결국 나락으로 치닫게 만드는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야... 소설집의 순서도 참 감칠맛 나게 잘 구성해놓으셨다. 비교적 덜 무거운 단편과 무거운 단편을 잘 섞어 놓으셔서 읽으면 마음이 쫄깃해지는 기분이 있었다. 나는 모든 단편을 다 사랑하지만 모든 단편 속에 한결같은 냉소의 이미지, 그리고 (감성적인 여자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뭔가 상처받은 남자의 우수 젖은 애상감 같은 것이 함께 녹아들어 있어서 읽어가면 읽을 수록 이 작가의 매력에 점점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표제작이 되는 <낯선 여인의 키스>는 말 그대로 외모로나 여러모로나 볼 품 없는 남자가 여자한테 관심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 초라한 처지에 놓여있는데 갑자기 어느 여자가 자신에게 진한 키스를 하고 떠나가 버린 내용이다. ㅎㅎ 그 남자는 가슴이 두근 거린다. 과연 그녀는 누구였을까. 키스했던 그 순간의 짜릿한 황홀감, 그녀의 화장품 냄새,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 모두 아른아른거리는데 그녀는 나를 다시 찾아줄까? *스포일러 죄송* 역시나 체호프 답게 하늘을 치솟을 것 같은 그의 심정은 바닥으로 내리꽂아지고 만다. 그녀는 다른 남자로 착각하고 잠시 그에게 뜨거운 기회?를 주었던 것뿐이지 정작 그 볼품없는 남자에게는 전혀 관심조차 없었던 것. 그는 쓸쓸하게 사람들 사이를 비집어 들어가고 터덜터덜 공허한 마음을 부여잡으며 배회한다. 이렇게 상처받은 남자의 잔상을 소묘화처럼 섬세하게 그려내다니 나는 정말 내가 가서라도 위로해주고 싶은(응?) 마음이 들었다. <낯선 여인의 키스>를 연상하게 하는 저 표지는 정말 그 남자가 애타게 그리며 보고 싶어하던 그녀의 모습이 보일랑 말랑 하면서 호기심을 극대로 자극시키게 하는, 굉장히 감각적인 표지이자 체호프 소설 전체를 관통하여 인간이 갖는 떨림과 기대, 황홀함, 그 모든 것의 정체를 구현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작품은 <6호실>이라는 작품이었다. 번역가님 번역도 너무 훌륭하시고 문체도 너무 유려해서 행복해하면서 읽었던 글이다. 이 작품은 내 생각에 체호프 자신이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이기도 했기 때문에 본인이 소설가라는 직업과 병행하며 느낀 그 간극을 담은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만은 스포일하고 싶지 않아 큰 관점에서 말하자면, 결국 의학이 말하는 생명과 철학이 말하는 생명이란 다르다는 것이다. 의학에서 '고통'이란 소멸시켜야 하는 대상이다. 그 원인을 물리적 관점에서 탐구해서 마치 부품을 분리시켜내듯이 제거해야 하는 속성으로 읽힌다. 그렇기에 의학의 눈으로 본 '고통'은 철저히 부정적이고 존재 자체란 사실상 무의미한 그것이다. 하지만 철학의 입장에서 말하는 '고통'이란 삶의 심연을 뜻한다. 그 '고통'과 함께 거주함으로 인해 상실과 부재를 통한 실존의 가치를 되찾을 수 있다. '고통'을 온몸으로 겪고 쓰러지면서 몸부림쳐온 사람이기 때문에 단순히 번듯하고 안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알 수 없는, 삶 저 깊은 곳에 존재하는 존엄을 깨우치고 다가올 죽음 앞에서 생명의 가치에 더 집중할 수 있는것이다. 그런 점에서 두 가치가 충돌하며 '고통'과 '죽음'이 단순히 '소멸'이라는 평면적인 의미로 읽히는 의학과 과학의 세계에서 더 깊숙히 들어간 실존의 탐구를 온몸으로 겪어내는 이야기가 이 <6호실>이라는 소설이다. 평면에서 더 복합적인 인간의 고통에 대해 깨우쳐서 나아가게 된 주인공의 끝에 찾아오는 것은 그 고통이 가진 복잡다단함에 대한 통찰과 더불어 더 이상 그 가치를 실천할 삶의 기회가 없다는 잔혹한 현실이다. (체호프 이 나쁜 자식 같으니라구....) 이처럼 체호프는 인간의 상황을 극단으로 밀어붙여서 저 깊은 곳으로 추락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해 삶의 진실을 앎과 모름의 차이가 얼마나 크고 아프게 다가오는지 충격요법을 통해 전달해준다. 다 읽고 나니 정신이 아득하다. 도수가 높은 싸구려 와인 한 잔을 마셨고 머리가 어지럽다. 하지만 그래도 이기적인 성취라고나 할까. 그의 소설을 읽으니 나의 초라했던 삶이 새롭게 다시 보이면서 역설적으로 희망을 꿈꾸게 되어 더없이 기쁘다.
최애니의 책장, Annieway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말년에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을 겪지 않는 사람은 드뭅니다. 신장이 안 좋다거나 심장이 부었다면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사람들로부터 정신병자나 범죄자라는 말을 들을 때는 그러니까 갑자기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면 마법에 걸린 출구 없는 덫에 걸렸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곳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 수록 더 깊숙이 길을 잃게 됩니다. 그 어떤 노력도 소용이 없을 테니 포기하는 편이 좋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p.2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