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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좀 참고 살아봐라, 평범하게 사는게 좋다.
늘 그런 이야기를 들어왔던 주인공 지연은 그렇게 살고 싶었으나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시작부터 그녀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그치기만하는 엄마의 대립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왜 저렇게 딸을 이해하지 못하지 그런 생각들.
이혼 후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 '희령'이라는 도시로 가면서 지연은 어떤 마음으로 갔을까?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이혼에서, 그 상처에서, 그 상처를 벌려 소금을 넣는 것 같은 부모에게서.
거기서 그녀는 할머니를 만났고, 할머니를 통해 증조모를 만났다.
처음엔 그저 일제 강점기 시대, 집안에 남자가 없는 집의 여자애들을 납치하듯 데려가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번 보지도 못한 남자와 도망아닌 도망을 쳤을 때 증조모의 모진 삶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엄마를 버린탓'으로 스스로를 벌했지만, 그건 시대의 상황이었고, 너무 모질었던 다른 사람들로 인함이었다고 생각했다.
사랑받지 못한 삶은 감정 표현을 서투르게 하고, 또 그것이 사랑받지 못하게 만드는 악순환 속에서 지연의 증조모는 지연의 할머니를 낳았다. 증조모가 일제강점기를 겪었다면 지연의 할머니는 한국전쟁 시기를 겪었다. 사상범으로 몰려 주변인들이 운동장에서 총살을 당하고, 그것을 숨죽여 지켜봐야만하는 폭력이 난무하는 시절, 가깝게 지내던 새비 아주머니가 피난을 왔지만 품어주지 못하는 냉혹한 현실에 상처입고, 결국 가족도 피난을 떠나야하는 그 어두운 밤과 같은 시절을 뚫고 살았다.
전쟁이 끝난 후, 새비 아주머니와 그녀의 딸인 희자는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반면, 지연의 할머니는 다시 예전과 다름 없는 생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고, 친했던 그들과 점점 벌어지는 현실이, 그리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삶이 애달퍼 감정을 지우고 살았다.
증조모가 그랬던것 처럼, 할머니도 그랬고, 그런 슬픈 현실 속에서 태어난 딸, 즉 지연의 어머니도 결국은 삶의 굴레에서 감정을 지우고, 평범하게, 누구보다 평범한게 어려웠다는 그녀의 삶을 평범하게 살고파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평범하고 싶었으나 잘 안된 지연의 삶까지.
한 집안에 있었던 네 명의 여자들의 이야기는 모두 다 다른데도 이어져있었다. 슬픈 현실과 삶의 굴레 속에서 칠흙 같은 어둠을 걸어 그녀들에게 남은 것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며, 그저 살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연이 희령에서 할머니를 만나고 그녀와 교류하고 지연의 증조모와 할머니,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은 연대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가혹하게 굴고 상황을 회피하려하는 엄마의 마음도, 그런 엄마를 붙잡지 못한 할머니도, 그리고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지연에게도 그들의 이야기는 동질감을 느끼며 하나로 이어지게 만드는 치유의 힘이 있었다.
서로의 삶을 지워내듯 없는 것으로 치부하려했으나 되지 않았다. 그들은 연결되어 있기에.
오히려 서로 다시 연결되고, 그들이 서로의 상처를 더이상 회피하지 않을 때 그들에게는 아직은 어둡지만 그래도 밝은 밤이 찾아왔다.
함께 나누고, 함께 연대할 때 상처는 치유된다.
단절로 인해 생겨난 외로움에 파묻힌 어두운 밤이,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함으로써, 그래도 여명이 밝아오는 밝은 밤이 되었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 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P14
한 사람의 삶을 한계 없이 담을 수 있는 레코드를 만들면 어떨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릴 때의 옹알이 소리, 유치의 감촉, 처음 느낀 분노,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과 꿈과 악몽, 사랑, 나이듦과 죽기 직전의 순간까지 모든 것을 담은 레코드가 있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삶의 모든 순간을 오감을 다 동원해 기록할 수 있고 무수한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레코드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삶의 크기와 같을까.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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