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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가 궁금해 - 당신의 강아지를 이해하는 101가지 열쇠
마티 베커.지나 스패더포리 지음, 이신정 옮김 / 펜타그램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모처럼 책을 읽으면서 자지러지게 웃어 본 것 같다. 사실 요즘 소설편애모드인지라, 책을 받고 처음엔 별로 손이 안갔더랬다. '뭐 별 내용이야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한동안 읽을 생각을 안했었다. 우연히 산책나가는 길에 집어들기 전까진.

나는 아침 저녁으로 우리집 강아지 "짱구" 산책을 시키는데, 산책 나갈 때 그냥 나가면 심심해서 늘 책을 한권씩 들고 가는 버릇이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산책 나가는 길에 잡힌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별 기대없이 읽기 시작한 『강아지가 궁금해』는 시작부터 내게 큰 웃음을 주기 시작했다. 나는 길에서 체면도 수치심도 잊은 채 낄낄거리면서 책을 읽었다.

'강아지는 왜 변기물을 마시는 걸까?', '왜 '응가'하는데 그렇게 시간이 걸리나?', '소변 볼 땐 한쪽 다리를 있는 대로 벌리는 이유는?', '왜 사람들을 만나면 찔끔찔끔 오줌을 누는 걸까?', '동성애견도 있나?', 개는 나중에 어미나 형제 개를 알아볼 수 있을까?' 등등...몇가지 제목만 들어도 이 책의 기발함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강아지에 대해 고리타분하게 원론적인 사실만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람들이 궁금해해왔고,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콕 찝어서 마치 옆에서 직접 대화를 나누듯이 그렇게 친근한 어투로 이야기해주고 있다.

강아지에 대한 궁금증을 101개의 문답식으로 풀어 쓴 『강아지가 궁금해』는 반 정도는 내가 그동안 강아지를 키우면서 보고 겪어 알고 있던 사실들이어서 더 반가웠고, 반 정도는 전혀 몰랐던 이야기라 더 신기하고 재미있게 읽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짱구 얼굴을 한번씩 쳐다보면서 읽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낄낄거리니까 짱구녀석이 날 "미친x" 보듯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짱구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내가 왜 그러는 지 얘기해줬을 텐데.

한 번 잡기가 어려웠지, 책을 읽은 후부터는 워낙 내용이 쉽고 재미있어 술술 넘어갔다. 2시간만에 다 읽었지 싶다. 책을 읽으며 책에 나온 이야기와 실제 내가 짱구를 키우면서 쌓아온 노하우를 하나 하나 비교해보면서 몰랐던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고, 강아지에 대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오해하고 있던 부분들도 바로 잡을 수 있어서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세상의 모든 애완견을 사랑하는 주인님들이여. 그동안 강아지와 말이 안통해 답답한 상황이 있었는가? 도저히 인간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강아지의 행동때문에 짜증났던 경험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 책을 자신있게 권해드리겠다. 이 책은 마치 강아지가 직접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동안 쌓였던 궁금증을 단번에 풀어준다. 나는 이제 짱구녀석의 다소 인간답지 못한, 너무나 개다운 - 개스러운 행동들도 짜증이나 불쾌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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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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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을 덮은 지 2주가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작품에 대한 감동과 작가에 대한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책에 대한 정보는 물론 작가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지라 아무런 기대나 배경지식없이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제목만 보고는 소설이 아니라 '기다림'에 대한 에세이나 자기계발서인 줄 알았으니.

『기다림』 이 내게 준 첫인상은 이랬다. 근래 보기 드물게 우아한 표지와 전미 도서상, 펜 포크너 문학상 수상에 퓰리처상 최종후보라는 각종 수상경력을 내세운 카피, 그리고 혹시나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표지 정면에 떡 하니 붙여놓은 전미도서상 수상 금딱지. 한 마디로 첫인상은 좀 오만해보였다. 특히 금딱지에 대한 반감은 이 책을 읽기도 전에 내게 약간의 편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가 한 번 보자.' 는, 마치 싸움이라도 거는 듯한 심정으로 집어든 『기다림』 은 그만큼 불리한 핸디캡을 안은 채 전투를 시작한 셈이다. 적어도 나한테서만큼은.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첫 장부터 작가에게 패하고 말았다. 흔히 일반적인 소설의 레퍼토리가 그렇듯, 이 책도 초반에 구구절절한 상황설명으로 시작할거라 생각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첫 장부터 대뜸 아무 설명없이 가장 극적인 부분을 뱉어낸다.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럴리가 없는데...'라는 고정관념과 실제와의 괴리에. 그저 작가의 의도대로 멍청하게 작품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부모의 뜻으로 원치않은 여자와 결혼한 남자 린. 린은 아내 수위가 싫어 고향도 버리고 도시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도시에서 새로운 여자를 만난다. 아내가 싫어도 잘못이 없기에, 잘못은 커녕 병든 부모님 수발 다 하고, 혼자 딸까지 키우는 조강지처를 버릴 마땅한 이유가 없기에 평생을 그냥 그렇게 떨어져서 살리라 다짐했던 린은 새로 만난 우만나 때문에 결국 이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바보같은 이 남자. 이혼하기가 다이하드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죽는 것보다 더 어렵다. 부인의 거부로 해마다 이혼의 문턱에서 좌절을 맛보는 린. 그런 린을 무턱대고 기다리는 만나. 둘은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17년 동안이나. 둘의 아름다웠던 젊음이 모조리 시들어 썩어갈 때쯤 드디어 린과 수위는 이혼했다. 린과 만나는 기다렸다는 듯, 아니 이 순간만을 기다렸기에 바로 결혼을 한다. 결혼만 하면 그동안의 고통이 모두 보상받을 줄 알았다. 그저 행복해질 줄만 알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몰랐던 것이다. 17년의 세월은 자각하지 못하는 동안에 아주 서서히 서서히 '사랑'이라 이름붙였던 알량한 감정을 퇴색시켜왔음을. 아마 알았더라 해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무려 17년 동안을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또 견뎌왔는데, 그 순간 그들이 어찌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결국 둘은 파국을 향해 치닫고 만다. 결혼은 이들이 생각한 이상향이 아니었다. 두 사람 다 평생토록 '결혼생활' 이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더욱 더 서로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책을 덮고 나서 『기다림』 이란 제목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기다림'이란 어떤 것일까? 이 책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주인공 남녀 쿵린과 우만나의 17년간의 기다림? 그렇다. 일견 보기에는 작품 전면에서 다루고 있는 이들의 기다림이, 제목에서 말하고자 한 바로 그 기다림이라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린의 아내, 수위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17년 동안 자신을 버리기 위해 노력한 남편에게 티끌만큼의 원망도 없는 아내. 원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그녀. 새출발한 남편이 회한에 쩔어 찾아왔을 때에도 복수는 커녕 미소지으며 언제까지고 그저 기다리겠다고만 하는 그녀. 린이 딸에게 "엄마한테 가서 나 같은 인간 기다릴 필요 없다고 말해라.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니, 기다릴 가치조차 없다." 고 하자, 딸이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아빠.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아빠를 기다릴거예요." 라고 대답한 마지막 대화가 자꾸만 떠오른다.

쿵린과 만나의 17년간의 기다림. 그들은 기다리는 동안 무척이나 힘들어했고, 또 본인들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감추려하지도 않았다. 기다리는 게 힘들다고 늘 투정부렸다. 그들에게 기다림은 고통일 뿐이었다. 그러나 또 한 여자. 수위의 기다림은 이들의 기다림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수위는 남편을 평생 말없이 기다렸지만, 기다린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녀에겐 그저 숨쉬고 밥먹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니 힘들지도 않았다. 기다리는 것이 행복했다. 숨쉬고 밥먹는 것처럼. 이런 수위의 기다림 앞에 그들의 이기적인 기다림은 차게 식어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다이아몬드의 원석을 발견한 기분이다. 하진이라는 작가. 심상치가 않다. 처음부터 한껏 씹어줄 만반의 태세를 갖춘 내 마음을 단번에 무장해제 시켜버리다니. 아니, 무장해제로도 모자라 일주일 밤낮을 찬탄하게 만들다니, 분하다. 어쩐지 낚여버린 느낌이다. 분명히 분한데, 어느새 하진의 두번째 책 『광인』 을 주문하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저게 나인가? 설마, 아닐거야. 시치미 떼려고 해도 문득 정신차려보면 시공사에 전화해 세번째 책은 언제 출간되냐고 묻고 있는 내 모습이 처량하다. 오호통제라. 된통 걸려버렸구나.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한마디만 하겠다. "낚아줘서 고마워요. 하진씨. 나는 이제부터 당신의 작품을 기다릴거예요. 언제까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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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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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씨름 - 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 쌍검대무 - 신윤복 (간송미술관)

너무 감명깊이 읽은 책은 도저히 감상도 써지지 않는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바람의 화원』에 대해 뭐라고 평이라도 해보고 싶은데, 그러면 그럴수록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 그저 재미있다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표현에 대한 분노일까?

『바람의 화원』은 정말 바람같이 내게 와서 바위처럼 내 안에 눌러앉았다. 이제는 들어옮기려고 해도 옮길 수가 없다. 이 책은 감히 내가 최고의 책이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책임에 분명하다.

처음 이 책의 소개글을 읽었을 때만 해도, 난 이 책 역시 역사와 추리를 적절히 접목시킨 그저그런 팩션추리소설일 줄로만 생각했었다. 총 2권으로 되어 있는 책은, 1권이 끝나갈 때까지도 추리적인 부분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어라??? 이거 추리소설이 아닌가??’ 추리소설이라는 걸 거의 잊어버릴 즈음에서야 겨우 한번씩, 그러나 강렬하게 툭툭 던지는 의문들. 물론 추리적인 부분 또한 다른 여타의 책들보다 훨씬 훌륭하지만, 나는 이 책이 추리소설이라고 생각지 않으련다. 내게 있어 이 책은 추리소설도 아니고, 역사소설도 아니고 그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휴먼소설일 뿐이다.

모든 것은 그림에서 시작되어 그림으로 끝이 났다. 이 한마디로 이 책을 80%이상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은 그들에게 그리움이요, 사랑이요, 치열한 전쟁터이자, 추억의 샘터이다. 그림은 곧 그들의 모든 것이다.

김홍도와 신윤복. 조선 후기 풍속도의 대가들. 우리나라에서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들이 같은 시대를 살다갔다. 그러나 지금껏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역시도. 그저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만 어쩌다 교과서에라도 나올라치면, "오~ 꽤 잘그렸네? 조선시대에??" 그냥 그러고 넘어갔을 뿐. 그래놓고 어디가서는 김홍도와 신윤복을 잘 아는 것처럼 씨부렁거렸던 나의 오만. 이제야 내려놓는다. 나의 오만을.

이 책을 읽고 나는 김홍도가 되었다. 아니 나는 그냥 홍도였다.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 해도 나는 기꺼이 열번, 스무번이라도 그 낚시떡밥에 낚여줄테다. 나는 김홍도가 되어, 신윤복을 사랑하고, 질투하고, 미칠 듯이 갖고 싶었고, 또 미칠 듯이 그리워했다. 나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김홍도와 혼연일체가 되는 데 조금의 문제도 없었을 만큼, 작가의 문체는 섬세하고 감정의 떨림은 미세했다. 그리고 그가 있었다. 또 한 명의 천재.

조선의 왕 중에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임금. 정조대왕. 그를 다룬 그 어떤 역사책보다 더 생생하고 생명력있게 살아있었다. 이 책에. 그저 일관되게 똑똑한 군주, 개혁의 임금으로만 표현되어 온 정조였으나, 이 책에서만큼은 그의 아픔이 오롯이 녹아있었다. 그의 깊은 아픔에 나도 울고 홍도도 울고, 윤복이도 울었다.

마지막으로 천둥벼락과도 같이 내 세계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신윤복. 그의 그림은 내게 불멸이 되었다. 나는 이제 미칠듯한 심장박동의 빨라짐 없이는 그의 그림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노년에는 그의 그림을 보는 것을 자제해야 할 지도. 너무나 두근거리는 심장은 내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처럼 낯설다. 이 책을 보기 전에는 그의 그림이 이다지도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지 몰랐다. 이 책을 보기 전에는 그의 그림이 이다지도 파격인지 몰랐다. 이 책을 보기 전에는 그의 그림이 이렇게 영혼을 울리는 지 나는 몰랐다. 나는 소설의 내용보다도 그의 그림에 더 몸을 떨었고, 그의 그림에 노예가 되었다. 이제 신윤복을 모르던 때의 나를 기억할 수 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한편으로는 작가가 원망스럽고, 한편으로는 작가가 너무나 존경스럽다.

3명의 천재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빛의 향연. 그 영광된 자리에 초대받아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나 놀랍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단 한권의 책으로 역사 속에 소리없이 잠들어 있던 인물에게 이렇듯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니. 작가의 능력에 소름이 끼친다. 전율이 느껴진다. 너무나 질투가 난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이정도의 역량을 가진 작가가 나오다니...그동안 남의 나라 작가들을 격하게도 부러워했던 나였는데, 이제 그런 나의 마음에도 한가닥 위안이 생겼다.

『바람의 화원』. 그 이름 그대로 바람같이 와서 바람같이 떠난 그대여. 그대는 바람처럼 날아갔지만, 한줄기 바람은 없어지지 않고 내 가슴에 남아 불멸의 혼이 되어 세상 곳곳으로 소리없는 아우성이 되어 유랑하리라. 영원히 함께 하자스라.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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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김처선
이수광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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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처선과의 준비된 만남

『왕과 나, 김처선』은 SBS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사극 "왕과 나"의 원작소설이라고 해서 출간전부터 나의 기대를 한몸에 모은 책이다. 기존의 역사소설이라고 하면 그저 왕이나, 왕족, 또는 명망있는 신하들, 학자들, 예술가들 등등 이미 역사속에서 찬란하게 빛나왔던 인물들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 『왕과 나, 김처선』은 특이하게도 이름조차 낯설은 조선시대 내시였던 김처선을 주인공으로 하여 작가가 팩션을 가미해 쓴 역사소설이다.

김처선은 세종때부터 연산군때까지 7분의 임금을 모신 내시이다. 보통 이 정도의 이력을 가진 내시라면 말년엔 웬만한 정승판서 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리며 인생을 화려하게 마감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그가 살던 시대가 조선 전기에서도 가장 격동의 시기였으니 그의 인생도 참 불운하다 아니할 수 없다.

- 자기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가 높이는 것

소설은 이런 파란만장하고도 비극적인 김처선의 삶을 성종 때 사사된 폐비윤씨의 사건과 결부시켜 그리고 있다. 일단 재미는 있다. 꽤 두꺼운 두께의 책인데도 불구하고 앉은 자리에서 두어시간이면 다 읽을 정도로 빠르고 쉽게 읽힌다. 내용 또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두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꽤 흥미있는 소재인 폐비윤씨사건과 폭군 연산군의 얘기인지라 더욱 그러한지도.

폐비윤씨에 대한 연민으로 연산군을 목숨걸고 보살펴 보위에 올린 김처선. 그리고 마지막까지 연산군에 대한 걱정으로 목숨 건 충언을 했던 김처선. 다른 인간들은 그를 무시하고 비웃었으나, 김처선 스스로는 자신을 결코 비웃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중한, 신념있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히 임금에게 호통칠 수 있었으리라. 자기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가 높인다 했던가. 김처선이야말로 세상이 보는 것처럼 자신을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역사속에 찬연히 흩뿌린 훌륭한 한 인간이었음을 나는 이제 알겠다.

- 2% 부족했던, 2% 더 알고 싶었던 내시들이여

다만 못내 아쉬웠던건 좀 더 내시들의 소소한 일들을 알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디테일한 면이 조금 부족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수랏간 나인들의 그 처절한 경쟁, 또 몰랐던 의녀들의 삶을 자세하게 엿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책에서도 내시들의 일상을 많이 알 수 있기를 바랬었다. 아마도 7명의 임금을 모시는 동안 굵직한 사건들만 해도 셀 수가 없는 질곡의 시대인지라,그 부분만 해도 솔직히 1권짜리 소설로는 턱없이 부족한 분량이었기에 그런 세세한 이야기까지 다루지 못했을거라 짐작해본다.

-역사 속의 엑스트라를 돌아보자

하지만 이 책 『왕과 나, 김처선』은 경멸로만 일관해왔던 내게 내시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갖게 해주었고, 또한 기존에 뼛속 깊이 박혀있던 못된 인식을 바꾸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역할을 한 책이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역사의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 역사 속의 엑스트라들에 대한 책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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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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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고 싶은 치욕의 역사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걸어나온 조선의 제 16대 임금 인조는 청 황제 태종에게 무릎을 끓고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며 목숨을 구걸하였다. 사실상 이 순간이 가뜩이나 정통성 약한 인조의 임금 노릇의 실낱같던 명분이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임진왜란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허나, 임진왜란보다 백배, 천배는 더 치욕스러운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니, 알아도 그냥 그런 역사속의 스쳐가는 한줄의 사건이려니 하고 아무생각없이 넘길 뿐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임진왜란은 승리의 역사이고, 병자호란은 치욕의 역사라서???

같은 외세의 침입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 속에서 병자호란의 위치는 찬밥신세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이 사건에는 침략에도 불구하고 노력한 흔적이라던가, 자주성을 지키려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영웅들이나 민초들의 피흘림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변명 한 마디 못 할 정도로 그저 엎드려 "목숨만 살려줍쇼...그저 시키는 대로 다 하겠나이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한 일이 또 있었던가.

드라마를 봐도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은 많았고, 또한 시대적으로 근소하게 앞서 있는 광해군과 인조반정을 소재로 한 드라마 역시 많았다. 하지만,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는 기억에 없다. (내가 모르는 것일수도 있지만.;;)

그 겨울 남한산성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나 역시도 이 책 '남한산성'을 읽기 전까지 병자호란에 대해서 단순히 '인조 때 청태종이 쳐들어와서 남한산성으로 쫓겨갔다가 항복하고 황제한테 절하고 왕자들 볼모로 끌려가고 끝" 이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남한산성에서의 47일동안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보통이런 전쟁이 배경인 소설의 경우 전쟁과 주화파-주전파의 싸움에 포인트를 맞출 텐데, 작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남한산성 안에서의 일들을 그리고 있다.

남한산성에서의 47일간의  농성(? 농성이라고 부르기도 멋쩍다.) 과 삼전도에서의 삼배구고두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남한산성은, 얼핏 이런 흥미진진한 소재 때문에 쉽게 읽힐 거라는 생각으로 집어들었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읽기 힘겨운 책이었다. 외견상 차라리 로맨스 소설을 연상시키는 듯한 화사한 핑크빛의 표지만 보고 그냥 하루 시간때우기용으로 가볍게 읽으려고 했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 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지루할 정도로 이어지는 언어의 유희

역사적 사건이라는 소재때문에 소설이라는 장르적 압박을 생각지 못하고, 그저 역사책 같을 거라고 지레 짐작했던 게 잘못이었다.  거의 400여쪽에 달하는 분량 중 정작 스토리는 100쪽도 되지 않는다. 청이 침입해오자 인조와 신료들이 도망가다가 길이 막혀서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틀어박혀 47일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황제가 직접 와서 나오라고 하니까 바로 나와서 절하고 끝이다.

나머지 4분의 3은 전부 말놀음이다. 이 분은 시인이 됐어야 하는 분인데..잠시 착각했을 정도로 뜬구름 잡는 말의 유희들... 그 지루할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비유들. 솔직히 최근 속도감있고 직설적인 일본 소설들만 계속 읽다가 이 책을 읽으려니 더 답답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중반부까지 솔직히 책 덮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장면묘사

소설 특유의 생동감은 느껴지지 않았고 마치 정지된 화면을 묘사하듯 온갖 미사여구들로만 가득하다. 사실 내용의 답답함이 문체의 답답함으로 이어져 아주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말 답답 그 자체인 남한산성에서의 농성(?)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전해 줄 수 없는 문체이다. (의도한 것이라면 작가가 정녕 천재인 것이다)

전개 속도가 느리다 보니 장점 역시 많다. 많은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초반에 느꼈던 고여있는 물과도 같은 참을 수 없는 답답함 덕분에 오히려 당시의 상황이 더 간절하게 와 닿았다. 뭐라도 하고 싶은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남한산성 안의 그들의 심정이 전해져왔다.

길고 느린 호흡으로 인하여 한 장면 한 장면이 눈 앞에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다가온다. 실제로 지금도 남한산성 행궁 내행전 안에서 인조와 조정신료들이 마주앉아 이야기 하고 있는 장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이다.

'남한산성'은 삼전도의 치욕을 변명하거나 옹호하려고 쓴 책이 아니다.

 이 책을 통해 인조의 새로운 모습, 우리가 몰랐던 모습을 조금이라도 찾으려 했다면 포기하시길...
이 책은 그저 느리고 담담하게 남한산성에서의 47일동안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얘기해 주고자 하는 책이다. 얘기해주고자 하는 내용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나, 정작 얘기하는 내용은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이다.

조선의 임금 중에 가장 무능하고 임금 자격 또한 없었던 인조. 그는 혈통으로서나 능력으로서나 전혀 임금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당쟁만 일삼던 건방진 신하들이 자기의 당색과 다르다고 하여 인목대비와 짜고 감히 멀쩡한 임금을 내쫓고 자기 입맛에 맞는, 한마디로 조종하기 편한 꼭두각시로 앉힌 것이 바로 인조이다. 물론 인조 역시 왕위에 대한 욕심이 컸다. 그 삼박자가 맞물려서 인조반정이 일어났지만.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명분도 정통성도 없는 반정을 일으켜 왕위는 손에 넣었지만, 인조는 당시의 멍청한 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를 읽을 능력이 없었다. 광해군이 간신히 다져놓은 청과의 관계를 한순간에 쓰레기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으니...

나라의 죽음, 자식의 죽음을 부른 과한 욕심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답답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자신있게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명을 택했으면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었을 게 아닌가. 아니면 믿을 구석을 만들기라도 했어야 하는게 아닌가 말이다.그저 말로만 오랑캐 따위와 손 잡을 수 없다고 큰소리 떵떵 치고, 정작 병자호란까지의 몇년 동안 인조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싸울 각오를 했으면 군사력을 키우던가, 이도 저도 자신없으면 청이 쳐들어왔을 때 제대로 피할 성이라도 마련해놓던가 했어야지. 이건 뭐...쳐들어오니까 우왕좌왕 하다가 코 앞까지 왔을 때 도망가..그 마저도 길 막혔다는 소리에 눈 앞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대책없이 들어간다. 산성 안에 식량이나 물자의 준비는 물론 하나도 되어 있지 않고 말이다. 이런 사람이 한 나라의 임금이다. 이런 사람들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조정대신들이다. 어찌 개탄스럽지 않을 수 있으랴...

인조는 죽음으로써 진정한 삶을 얻었어야 했다. 명분도 실리도 다 잃고 살아봤자 죽느니만 못하다. 삼전도의 치욕 이후로 인조는 가뜩이나 없는 정통성과 명분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죽을 때까지 정당하게 자신의 것이 아닌 왕위에 대한 불안으로 백부인 광해군에 이어 친아들인 소현세자까지 죽여버리고 만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의 경우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신하들에게 속았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인조는 그것도 아니다. 오직 그 자신의 망상으로 아들을 죽이고, 며느리도 죽이고, 손자들도 모두 몰살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때는 이미 인조의 정신은 온전하다고 볼 수 없다. 삼전도의 그 날 이후로 인조는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욕해봤자 내 얼굴에 침뱉기!

'남한산성'에는 임금과 신하들 이야기 뿐만 아니라, 민초들의 이야기도 조금..아주 조금 나온다. 하지만 주체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그저 불특정 다수의 이미지로만 그려지기 때문에 별 인상을 주지 못한다.소설의 처음과 끝까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 하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의 공허한 대화이다. 서로 다른 곳만 바라보며, 상황을 해결할 책임을 서로에게 떠 넘기느라 바쁘다. 주화파 최명길과 주전파 김상헌의 대립(?)도 이 작품에서만큼은 힘이 없다. 둘의 관계를 너무 미화시키려고만 해서 오히려 설득력을 잃었다. 오히려 치열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그려줬다면 더 좋았을 거라 본다.

반면 침략자 청의 모습은 조선 사람들과는 정 반대로 대인배(?)적인 모습으로 그려 남한산성 안에서의 찌질한 인간군상과 대비되어 너무도 가슴아프게 다가왔다. 읽으면서 계속 인조와 그 똘마니들을 욕하긴 했지만, 어차피 그래봤자 내 얼굴에 침 뱉기인 것을... 인조가 청 황제에게 무릎꿇고 절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울컥해 참기 힘들었다. 인조가 안됐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는 순간이었다. 죽지도 못하고, 그것이 죽음의 길인줄 알면서도 본인은 살 길이라 애써 자위하며 남한산성을 걸어 나가는 순간 인조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인조와의 힘겨운 화해

소현세자와 광해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인조를 많이 미워해왔던 나였는데,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인조가 불쌍해졌다. 사람이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것을 욕심내어 빼앗아 갖는다 해도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갖고 싶은 것을 가졌음에도 평생을 불행하게 보내야 했던 인조의 모습에서 위안을 얻었다고 해야 하나...

'남한산성'을 읽으면서는 많이도 고통스러웠지만, 읽고 난 후에는 잘 읽었다는 생각 뿐이다. 읽지 않았다면 난 평생 인조를 오롯이 미워하며 조금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나 역시 불완전한 인간으로 수많은 결점을 안고 살아가는데, 내가 무엇이관대 감히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경멸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으로 인해 난 인조와 어느 정도는 화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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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16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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