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판토 해전은 전제 군주제라는 강력한 정치 체제를 통해 국가를 하나로 통일하여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투르크 오스만 제국의 함대와 그들을 문화라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는 야만인 국가라 여기며 무시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힘에 두려워하는 기독교 세력의 함대가 레판토 앞바다에서 펼친 일대 해전을 얘기하는 것이다.
'무패'를 자랑하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있어 그들의 진격은 곧 투르크 제국의 '영토확장'으로 이어지던 시기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든 국가들이 그들과의 혈전을 피했으며, 저 로도스 섬과 크레타를 비롯한 지중해 기독교의 핵심 요충지가 차례대로 투르크 제국의 손에 넘어감에도 불구하고 수수방관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의 강력한 군사력 때문이었다.
술탄 셀림 2세는 그러한 투르크 제국의 강력한 군사를 이용하여 자신의 위명을 떨치고 싶었으며 그것은 또한 대제라 불리며 투르크 제국의 위대한 군주로 남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한 일환이기도 하였다. 베네치아의 조선 국영소에 일어난 화재는 강경파의 입장을 강화하여 결국 출전을 하게 된다.
한편 기독교 함대의 핵심 세력을 이루게 되는 베네치아는 서유럽 국가들의 함대를 모두 합친 만큼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으나 그들만으로 투르크 제국을 막는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연합 함대를 구성하려고 하나 번번이 그들과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스페인의 반대로 인해 이 또한 상당히 어려운 길을 걷게 된다. 그러자 그들은 스페인 국왕이 교황의 오른팔이라 자처하는 점을 교묘히 파고들어 교황을 끌어들임으로써 결국 연합 함대를 결성하게 되고 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함대를 쳐부수기 위해 출정하게 된다.
각 국의 이해 관계와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분열을 면하기 힘든 상황이었던 기독교 연합 군은 젊은 사령관 돈 후앙의 지휘 능력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잔인한 만행으로 인해 일시적이나마 함대가 일치단결하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1571년 10월 6일 두 함대는 레판토 해전에서 맞붙게 된다. 7시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기독교 함대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의 결전에서 처음으로 역사에 승리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완승이었다.
레판토 해전으로 인해 유럽 국가들은 더 이상 투르크군이 무적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대외 인식과 유럽 국가 내부에서 팽배하기 시작한 신대륙 및 신항로 개척, 그리고 상업의 발달과 모험심, 진취 정신과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자 그들은 국가적 진출 방향을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며, 이는 지중해가 더 이상 유럽 문명의 주요 무대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며 본격적으로 지중해 국가들이 번영의 길에서 쇠퇴의 길로 접어듦을 의미한다.
유럽 문명의 전환기적 해전이라 할 수 있는 레판토 해전은 그 해전이 갖는 자체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해전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