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정해
관정 지음 / 알아차림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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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본을 읽고 나니 정본인 <반야심경 정해>를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약본은 그야말로 정본 내용의 아우트라인만 소개한 것이라 진짜 중요한 내용들은 실리지 않았다. 요약본만으로 전체 조망을 파악하려 말고 아예 첨부터 정본을 구입하는 게 유리하다. 이 책은 기존 반야심경해설서들과는 그 스케일이 완전히 다르다.

기존 해설서들은 반야심경이란 산의 어느 한 귀퉁이만 답사하고 나서 그 산에 대한 찬가를 지었다면 이 책은 거대한 산의 전체 모습은 물론 산을 이루는 풀뿌리나 돌멩이 하나까지 섬세하게 조사하여 영묘하고 장엄한 반야심경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괜히 필자처럼 얄팍한 수를 쓰다가 결국 두 권을 다 사게 되는 전철을 밟지 마시기 바란다.

우선 주목할 부분은 '오온'에 대한 용어 해설이다. <반야심경>해설서라면 누구나 몇 권쯤은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오고산 강설 1981년도 제4판을 포함하여 6~7종이나 소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해설자마다 '색수상행식'의 용어 해설이 다르다. A의 주장을 보면 그게 맞는 것 같고 B의 주장을 보면 그게 또 맞는 것 같다. 굉장히 헷갈린다. 특히 '수상행식'은 학자마다 스님마다 자기 주장이 있다. 여섯 명이면 여섯 일곱 명이면 일곱이 각기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런 다양성을 불교의 장점이라 강변할진 몰라도 1600년 통용된 <반야심경> 역사로 볼 때 탄식이 절로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청자나 독자가 알아듣지 못할 모호한 설명이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의 용어 해설은 명쾌하고 설득력이 있다.

물론 관정스님 견해의 완벽성 역시 학계나 교계의 검증과 동의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토록 진지한 반야심경 연구서는 처음 접한다. 오온 해설 뿐만 아니다. 반야심경의 제목에서 본문에 이르기까지 한 단어 한 문장 소홀히 다룬 게 없다. 2종의 산스크리트어본과 8종의 한역본은 물론 이와 관련된 신수대장경, 팔만대장경, 영역본, 한글역본 등까지 일일이 대조해가며 장기간 노심초사한 흔적이 역력하다.

구구절절 학자의 성실성과 구도자의 열정이 진하게 배어있다. 철저히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다. 언어학적 분석의 엄밀성, 문헌학적 증거 자료의 풍부성 등을 바탕으로 한 혁신적인 주장과 논리는 서구식 교육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공감을 충분히 불러 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기존의 번역이나 해설들을 맹종하거나 답습하지 않았다는 점이 올곧다. 그래서 그런지 주장이 당당하고 언사가 거침이 없고 도발적이다. 수백 년간 답습된 모호한 용어나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사변 일변도로 흐르지 않아서 참신하다. 교계나 학계의 기존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직접 거론하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따라서 이 책에 거론된 교계나 학계의 권위자들께선 타당한 반론을 내놓아야 할 것 같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이 책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19세기 스리랑카 파아나두라 대논쟁과 같은 치열한 야단법석이 현대 한국 불교계에서 벌어지는 것도 볼만할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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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 - 나와 세상에 속지 않고 사는 법
원제 지음 / 불광출판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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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볍게 읽고 던질 책이 아니다. 신변잡기를 서술하는 중에도 깊은 울림이 있다. 단어의 선택과 의미,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 구사력, 독자를 향한 의사 전달력 또한 너무 참신하다. 단 한 편의 문장도 허투루 쓴 구석이 없다. 모두가 활구이고 활문이다. 얼마나 피나는 공부와 수행을 거친 것일까. 상황과 대응, 고통은 이해 또는 분석하는 게 아니라 벗어나는 것, 실체 없이 비어 있는 나, 무아로서 전체의 흐름 등은 언어적 표현으로 머무는 게 아니다. 인연따라 생멸하는 전체 흐름 속에서 원제 노릇한다는 건 표현을 넘어 직접 가슴에 와 닿는 체화의 경지이다.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 이 전체란 개념상의 전체가 아니라 중심없는 전체, 중심없는 중심이다. 결국 지금 여기, 있는 이 대로가 답이고 진리이다. 개념적이고 공허한 말장난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세속이라면 한창 미망 속에 허덕일 나이에 어찌 이런 성숙한 안목을 갖출 수가 있을까. 오랜만에 맛보는 시원한 법음이다. 한국 선불교의 맥박이 오롯이 살아 요동치고 있다. 그야말로 진짜 실력을 갖춘 스님이다. 논리와 개념에 쉽게 매몰되는 나 같은 수행자 분들께 강력히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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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미래
양호직.양철곤 지음 / 생각나눔(기획실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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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공부가 깊은 분임은 확실하나 뭔가 좀 성급하신 것 같습니다. 다중우주, 거품우주, 삼라만상은 망상일 뿐인데 그것을 만든 주체를 진여라고 한다든가 진여는 무성, 무상, 무작인데 전능한 작용의 주체라고 한다든가 진여의 작용은 무작지작인데 유작지작으로 본다든지 이런 등등의 내용은 다분히 브라마니즘적 깨달음인 것 같습니다.

 

특히 '우주만상은 진여로부터 나왔으나 어떤 경우에도 진여 그 자체로 돌아 갈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앞쪽의 문맥을 바탕으로 유추해본다면 이는 진여와 우주만상을 분리된 존재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진여와 우주만상을 현상적 실상으로 보는 것이니 일반 과학자들의 견해와 다를 게 무엇입니까? 과학자들의 판단이란 관찰 주체와 대상을 설정한 판단입니다. 이 때문에 '공변양자장'이론을 주장한 카를로 로벨리조차도 플랑크 상수 크기의 알맹이가 있다고 떼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사물이 모두 실재가 아니고 헛것이란 건 현대물리학자라면 거의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뭔가 궁극적 실체가 있을 거라고 우기는 것은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이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수행자의 직관이 과학자의 관찰과 다른 점은 우주만상 그대로가 공이고 진여임을 확실히 인식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우주만상은 본래 헛것이기 때문에 나타난 적도 없고 따라서 돌아갈 곳도, 돌아갈 일도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대로가 그대로인 것입니다. 공,무아, 연기의 의미에 대한 좀 더 진지한 탐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자께서는 이 책에서 전변설과 적취설이 뒤섞인 이론을 진리로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활성정보, 초양자포텐셜, 아뢰야식 등에 대한 설명도 심생멸 부분만 치우쳐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도'를 언급하면서도 설일체유부의 '삼세실유 법체항유' 이론에 묶여 그 프레임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식사상도 제8식까지만 이해하고 '삼성과 삼무성'의 의미는 탐구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해탈을 언급하시려면 적어도 심진여, 그리고 여래장에 대한 더욱 깊은 탐구가 필요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괜히 눈 어두운 사람들을 더 깊은 미망 속으로 바뜨리는 일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을 연결시킨 글이나 책을 처음 쓰셨다는 말씀도 아주 큰 오해입니다. 무수한 불교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앨런 윌리스, 빅 맨스필드, 조안나 매이시, 소광섭 교수, 김성규 교수, 지승도 교수, 법정(대우)거사 등등 아주 많습니다. 그들의 이론이 얼마나 정교한지, 그리고 진리체계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그래서 그 현명한 안목이 얼마나 감동스러운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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