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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 ‘인류 3부작’ 밀리언 스페셜 에디션 - 전3권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김명주.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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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 우리는 무엇인가? ,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 우리(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만일 누군가, 나에게 인간(호모 사피엔스)이란 어떻게 이 세상에 살게 되었으며 왜 우리 지구 상에는 이렇게나 많은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라면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아주 옛날 언젠가 침팬지를 사촌으로 둔 여러 인류의 조상 가운데 지능과 살아가는 능력이 가장 뛰어난 한 종이 군집을 이루어 살게 되면서 현재 우리 인류가 세상에 살게 되었다. 그들은 신체적으로는 동물에 떨어졌으나 도구를 사용하고 서로 언어와 문자로 연합하여 그들의 특별한 능력으로 지구의 주인이 되었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다.”라고.

 

적어놓고 보니 참으로 두루뭉술하고 하나마나 한 말이다. 시간을 더 들여 뭐 이런저런 책을 참고해서 이것보다 더 많은 단어를 넣어 말할 수 있겠지만 그다지 특별하지도 어떤 통찰이 있는 답변도 내놓지 못하고 말 것이라 스스로 확신할 수 있다.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해 보았지만 나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다지 덧붙일 말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저자가 풀어내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기원과 발전의 역사, 그 작고 보잘것없는 종이 이 세계를 어떻게 정복해 나갔는지에 대한 설명에 대해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에 불과한 자신을 본다.

 

그렇다면 과연 당신의 답은 어떠한가? 인간은 어떻게 이 지구 상에 나타났으며 현재 어떻게 이 지구의 주인이 되었으며 인간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과연 나는 어떤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조금 많이 궁금하다. 대학에서 인류를 연구하는 학자들이야 당연히 상세한 예를 들어 길고도 유창하게 자신만의 관점에서 답을 할 수 있겠지만 아마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리 길지 않을 것 같다. 아침에 눈 떠서 일터에 나가고 휴대폰에 나오는 뉴스를 보고 퇴근하고 저녁을 먹는 평범한 일상에서 그런 질문에 답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질지도.

 

이상하게도 한 해 살아가는 날이 늘어가면서 우리는 어떻게 이 지구라는 행성에 살게 되었으며 어떻게 이렇게 모여서 살게 되었는지, 우리 주위의 많은 사물과 여러 사회적인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점점 이런 생각들이 늘어나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더 많이 자각하게 되었거나 행복이나 어떤 삶의 의미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우리 인류가 현재 이렇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유발 노아 하라리(Yuval Noah Harari)라는 이스라엘 역사학자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그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인류 역사를 거시적 관점에서 조망하며 서술한다. 인지 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이라는 큰 틀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무엇을 했고, 어떤 관점을 지녔으며,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지 서술하면서 그 큰 세 축을 움직이는 톱니들이 무엇인지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고 그 축과 톱니들이 어떤 작용을 했는지, 그 작용에 따라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을 구체화하여 들려주고 있다.

 

인지 혁명(허구를 만들어내고 집단적으로 상상하며 이로 인해 얻어진 유연한 협력) 농업혁명(수렵에서 농경으로 전화하여 보다 대규모적으로 군집을 이루고 이를 보다 체계화할 상상의 질서를 만들고 문자 체계를 고안한 것) 과학혁명(무지의 인정과 우리 도처에서 무수히 발견할 수 있는 과학적 발견을 통해 우리가 끊임없이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이라는 큰 주제 안에서 흐르는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그 의미를, 역사학(중세 전쟁사)을 전공한 학자답게 그에 맞는 사례 제시와 그 사건들이 가져온 의미와 영향들에 대해 설득력 있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기에 덧붙여진 그의 글을 매끄럽게 쓰는 능력(비교, 대조, 당연하게 여길 만한 사고에 대한 보기 좋은 반박)은 이 책이 꽤나 많은 페이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 아마도 이렇게 마무리하면 내가 이 책에 대해 느낀 첫인상은 "매우 좋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사피엔스>의 마지막 문단을 읽은 후 꽤 오랜 후에 다시 이 책을 떠올리면서 문득 내가 어떻게 읽게 되었으며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떠올려보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책을 읽고 난 후에도 그리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냥 술술 읽히는 책에서 어떤 특별함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고작 사피엔스라는 종이 다른 동물과의 생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신뢰와 상호협력에 의한 유연성, 어떤 물질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에 의한 상상이라는 것 정도. 그리고 조금 더 보태면 조금 의아하고 빈약한 결론처럼 느껴지는 미래에 대한 대비의 필요성.

 

그렇다면 과연 내가 처음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의 장점과 통한다. 이 책의 장점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데 있어 사용한 다양한 사례의 제시와 그 설명의 다각적 균형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가 어떻게 그 나약함을 벗었으며 그 이후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문명을 이루었고 그 문명 간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으며 그 차이점으로 인해 어떤 결과를 가져왔고 현재 어떤 흐름으로 이어져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검토할 수 있는 많은 면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정치, 경제, 전쟁과 같은 역사적 관점에서, 사피엔스라는 종의 유전자적 관점에서, 과학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다양한 시점에서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해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분명 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지금 나의 책상에는 다시 구입한 똑같은 책이 놓여 있는데 다시 구입하게 된 책 얘기를 더 하기 전, 잠시 내가 그간 인류의 역사 혹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이해라는 점에서 읽었던 책을 몇 개 꺼내봐야겠다.

 

 





  



우선 이 책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인류의 문명이 시작과 현재에서 어떻게 차이를 이루는지그 원인이 어디에서 시작하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다인류의 역사와 그 발전에 대해 서술하는데 광범위한 인류 문명의 충돌 혹은 접촉에서 어떤 문명이 우위에 서게 되었는지 매우 설득력 있게 풀어놓은 역작으로 그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과 그 흐름에 대한 통찰로 이루어져 있다어딘가의 설명에 의하면 유발 하라리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다양하고보편적이며 특이한 상황의 예들에서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원칙을 도출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과정과 그 모습이 특히 그렇게 보인다.  









내가 앞으로 살면서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받은 충격을 능가하는 책을 다시 만날까 싶은데 서구의 역사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역사로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이성주의에서 숨죽일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개별적 존재에 대한 배척과 억압의 역사로 보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에 대한 생각을 따져보게 하는 책이다특이하게도 이 책은 푸코의 시각에서 서양의 역사를 재해석하며 돌아보는매우 주관적인 의견을 담고 있는 책이지만 그 확고한 시각이 오히려 너무나 보편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또한 과거의 예시에서 미래의 해야 할 것을 반영하는 책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살육과 문명>이라는 책은 서구의 우월적인 측면에서 사례를 뽑고 그 인과관계를 서술하여 비판을 받는 책이다. 그간 동양과 서양의 무력 충돌에서 왜 동양이 패배하게 되었는지 저자가 뽑은 결정적 전투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매트 리들리의 <붉은 여왕>은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혹은 이성적이라고 믿었던 수많은 선택과 현재의 결과물들이 과연 그러한가에 대한 반론에서 시작한 책이다. 남녀라는 서로 다른 성에서 과연 그들은 무엇을 하게 되었는지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꽤나 많은 사례들을 제시하며 우리를 설득하고 있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다양한 신화들을 분석하고 그것들이 어떤 유사와 차이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그 기저에 어떤 속성이 있는지 분석하면서 다양한 문화권에서 등장하는 종교들이 어떻게 신화와 관련을 갖게 되는지 끝도 없이 서술하고 있다.







 

출간 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책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 이는 지금도 아마 "과학"이라는 학문의 이름과는 걸맞지 않을 것 같은 주장을 담은 책. 그가 말하는 어떤 과학적 혁명은 여러 사례들의 누적이 아닌, 어떤 한 사람의 놀라운, 비정상적인 발견 혹은 통찰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며 이런 당시의 시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법칙이 먼저 등장하고 이 비정상적인 법칙에 대해 예시를 수집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을 누적시켜 법칙으로 정립하는 가는 그 시대에 통용되는 어떤 공통된 의식의 흐름, 패러다임에 의한 것이지 결코 그 자체가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 *




내가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왜 이런 책들을 떠올렸을까? 왜 굳이 이런 책들을 소개해야 할까? 내가 제시한 이 책들의 공통점은 어떤 하나의 뚜렷한 주제가 있었고 그 주제가 매우 도발적이었으며 주제를 서술하는 관점이 매우 흥미로웠다는 데 있다. 아직도 나는 이 책들을 읽을 때 느껴지던 흥분을 잊을 수 없으며 비록 이 책들의 세부적인 내용은 모두 잊었을지라도 이 책의 저자가 보았던 관점의 눈으로 어느 정도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고 이 책들이 주는 어떤 인상에 의해 역사를 바라보거나 인류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언젠가 수정하고 보다 세밀하게 따져보아야 할 일이기도 하지만, 나는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이 책들의 잔상이 조금씩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

 


아무튼 아마도 나는 이 책에서 보다 극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드라마와 꽤 사실적인 서사의 흐름의 연속인 다큐 사이에서, 나는 호모 사피엔스가 과거 그 춥고 어두운 동굴에서 극적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어떤 영화 같은 스토리를 은연중에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그 아주 짧은 순간의 명암처럼 말이다. <사피엔스>는 뛰어난 책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다시는 볼 것 같지 않은 책. 그렇게 해서 이 책은 중고 책으로 팔려나갔다.

 

. 그러면 나는 왜 다시 <사피엔스>를 구입하였을까? 어떤 모임에 참여하기 위한 표면적 이유가 있지만 그를 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 책은 위에 간략히 서술한, 내가 떠올린 책들보다 지적 통찰에서, 문장의 수준에서 탁월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이 책이 지니고 있는 큰 장점인 정치, 경제, 전쟁과 같은 역사적 관점에서, 사피엔스라는 종의 유전자적 관점에서, 과학혁명이라는 관점에서 현재 우리(호모 사피엔스)가 도착한 지점에 대해 잘 알려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둘째, 이 이유가 더 중요한데 우리가 도착한 지점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서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과 앞으로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잘 알려줄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책을 읽으면서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500페이지 넘게 호모 사피엔스의 여정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서둘러 마무리하는 느낌을 받았다. 왜인지 그가 말하는 어떤 긴 설명의 일부분 같다는 생각을 했고, 그 때문에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이 점은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잔뜩 풍선을 불기 위해 바람을 불다 갑자기 멈춘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책을 구입한 지금,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사피엔스><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출발점이며 과거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계단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기에 그 이후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더 들어봐야 한다. 따라서 그가 <사피엔스> 이후에 쓴 책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아마도 이 책을, 이 책의 성격을 보다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 * *



 


앙리 마티스 <춤>

<La dance>

 

 








 

* 우리(호모 사피엔스)는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될까?

 

 

 

 

 


 

 

 

 

유발 하라리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피엔스>에서 나는 인간이 가진 신, 인권, 국가 또는 돈에 대한 집단신화를 믿는 독특한 능력 덕분에 이 행성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호모 데우스>에서는. 우리의 오래된 신화들이 혁명적인 신기술과 짝을 이루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검토할 것이다. (서문, p.6)

 

책을 읽기 전, 그의 전작 <사피엔스>를 읽고 어렴풋하게나마 결론 내린, 그가 말하는 의도와 핵심주제를 떠올려보아야겠다. 간략히 하자면 두 가지다. 첫째는 인류의 역사는 보다 나아질 가능성을 탐색하며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데(경제적, 사회시스템적으로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앞으로 이것을 유지하면서 더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이런 발전이 개인과 타인 그리고 우리 사회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소 모호한 개념인 행복에 다가선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첨언과 함께.

 

그가 <사피엔스>에서 진단하는 미래는 분명 인류(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위기 상황이다. 이 상황을 함께 해결하지 못하면 인류는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멸종하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먼 훗날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간. 생물학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개체로서 영원불멸을 꿈꾸고 결국 그것을 해내고 말겠지만 그 결론에 인류는 무엇이 되어 도착할 것이며 그 곳에 도달할 인류가 소수가 되어 우리가 끊임없이 걱정했던 디스토피아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한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난 후 20년도 더 지난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를 떠올렸고, 더 정확하게는 그 이후에 나온, innocence(2004)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앞날의 걱정을 하면서 인류의 미래를 예측해보기 위해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던 종교와 과학, 죽음과 행복에 대한 주제로 미래를 조심스레 살펴보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지혁명-농업혁명-과학혁명이라는 큰 축으로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걸어온 여정을 크게 조망하여 살펴보았는데 <호모 데우스>에서 다시 한 번 인류가 살아온 길을 세밀히 살펴 그들의 특질과 그들이 살아가면서 어떤 것을 추구하였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앞으로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이며 그런 결과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를 그려보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유발 하라리는 이야기를 총 3부로 나누었다.

 

 

1부에서는 인류와 다른 종의 비교와 인류가 이 지구 내에서 다른 동물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2부에서는 인류가 만든 세계는 무엇이며 현재 우리의 세계관을 지탱하고 있는 종교의 정체를 파헤치고 인본주의가 가져온 변화와 특징에 대해 얘기한다. 마지막 3부에서는 인류는 앞으로 어떻게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 수 있을지, 우리가 지구의 주인이 된 세계에서 다시 밀려나게 될 위협이 될 수 있는 생명공학이라는 거대한 흐름은 무엇이며 어떤 방향을 갖게 될지, 계속 성장하는 경제라는 전제를 토대로 한 자유주의의 위기는 어떻게 올 것인지 진단하며 얘기한다.

 


그는 <호모 데우스>를 쓰면서 다음과 같은 기준과 기본 뼈대를 세웠다.

 

21세기 인류가 불멸, 행복, 신성을 추구할 거라는 예측에 많은 사람이 분노, 소외감,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 몇 가지 사항을 명확히 해두는 게 좋겠다.

 

첫째, 이런 일들은 21세기에 개인들이 실제로 할 일이 아니라, 인류가 집단적으로 할 일이다.

 

둘째, 이것은 역사에 대한 예측이지 정치적 선언이 아니다.

 

셋째, 추구하는 것과 획득하는 것은 다르다.

 

넷째, 이 책의 예측은 예언이라기보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선택들에 대해 논의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는 것이다. - p. 86

 

 

역사 공부의 목표는 과거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돌려, 조상들이 상상할 수 없었거나 우리가 상상하기를 원치 않았던 가능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 p. 92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되짚어 호모 사피엔스가 누구이고, 인본주의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 종교가 되었으며, 왜 인본주의의 꿈을 이루려는 시도가 그 꿈을 해체할 수 있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기본 얼개이다. - p. 101

 

 

얼핏 보면 지난날 인류는 많은 과오를 저지르면서 살아남았고 이제 영원히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영원불멸의 신의 권능을 갖게 되는 문 앞에 서 있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의 결말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조금만 깊게 살펴보면 살아남기 위해 인류 이외의 다른 생명체를 철저히 배제해왔고 앞으로 멈출 수 없는 경제적 성장의 가속화와 부의 집중화로 인해 인류의 계급이 또 다시 나뉠 것이며 비유기체와의 합성을 통해 불멸이 되려는 인류의 욕심에 의한 멸망이라는 결론이라는 점에서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엔지니어>라 부르는 오래 전 조상처럼 살아갈지도 모른다.

 

 



* * * *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유발 하라리가 하는 얘기에 고개를 계속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의문이 하나 들었다. 그가 과연 유토피아를 향하여 말하고 있는지, 디스토피아를 향하여 말하고 있는지. 이상하게도 분명 그가 예를 든 사례들이나 방향은 디스토피아에 가까운데 텍스트에는 왠지 모를 희망적인 느낌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읽으면서 하나 확신한 것은 그는 어쨌든 인류가 더 나은 방법을 찾을 것이며 또 그럴 능력을 지니고 있고, 앞으로 우리가 진지하게 논의하고 노력하면 충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드라마를 나쁜 방향으로만 쓰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가 높은 곳에서 바라본 인류의 여정에서 개별적 존재들은 매우 이기적이고, 변덕스럽고, 탐욕스러움을 지닌 것으로 보였을 것 같다. 이런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움 때문에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과학혁명과 생명공학으로 인해 불행한 최후를 맞이할 운명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호모 사피엔스)를 깊게 탐구하면서 그들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어떤 희망의 지점을 찾게 되었고 그는 우리에게 더 늦기 전, 함께 그 희망의 지점에 다다를 수 있는 지점에 대해 논의해보자고 말한다.

 

분명 그는 이 책에서 인류가 만든 생명공학으로 인해 우리의 근본적 믿음과 사회의 결속 장치인 종교가 해체할 것이고 그간 자유주의를 지탱해온 인본주의의 세계관을 파괴할 것이며 데이터의 흐름과 알고리즘이 그것을 만든 인류를 결국 하등동물로, 그리고 멸종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이런 절망적인 전망에 우리를 동참하게 하고 그저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모두 불확실하고 위기의 앞날을 고민해 보자는 강한 어조의 제안으로 책을 마무리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인류 3부작>을 읽으며 유난히 생각나는 그림이 둘 있다. 고갱의 그림과 마티스의 그림. 고갱의 그림이 과거-현재-미래를 조망하는 그림이라면 마티스의 그림은 현재에 집중하는 만드는 그림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고갱의 그림은 <사피엔스><호모 데우스>를 연상하게 하고, 마티스의 그림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를 연상하게 한다.

 


 


 

 

지구의 주인공이 된 호모 사피엔스를 주인공으로 한 책 <사피엔스>2011년에 나왔고 <호모 데우스>2015년에 나왔다. 제목이 말해주듯 생명공학으로 불멸의 존재가 되어가려는 인류에 대한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본 시점이 문장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책. 어쩌면 <호모 데우스>만을 읽은 사람이라면 유발 하라리가 이 책을 쓴 까닭에 대한 의도에 대한 나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는 2018년에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이라는 책을 내놓았고 나는 그 책을 읽고 이런 관점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유발 하라리가 앞으로 또 어떤 전망을 담은 책을 내 놓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책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매우 다양한 논의를 가져올 것이고 또 그에 따른 무수한 의미가 만들어질 것이며 세상은 조금씩 수정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 * * * *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은 모두 합하면 1500페이지가 넘는다이 책이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인류의 여정을 살펴보는 과정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이야기 같이 느껴지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설명하는 모습은 촘촘한 그물로 짜여진 시나리오를 품고 있는 SF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재미를 준다.

 








<사피엔스> 안쪽에 써있는 문장. "From one Sapiens to another."


나는 여기에 단어를 새로 덧붙여 문장을 다시 만들어보고자 한다. "한 사피엔스가 또 다른 사피엔스에게" 전하는 이야기. 나의 다음 세대, 그리고 그 다음 세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인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지 궁금하게 하는 문장.


유발 하라리는 긴 이야기를 썼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궁금했고, 읽고 상상하고 함께 얘기를 나눈다. 인류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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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9-11 0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라는 개념 역시 인간이 만들어놓은 개념이고 보면 그 구분이 과연 있기나 한가, 저는 그런 생각도 해보았답니다.
<황금가지>는 오래전부터 저희 집 책꽂이에 꽂혀서 읽어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책이랍니다 ㅠㅠ 감히 엄두를 못내고 있어요.

Nussbaum 2019-09-11 09:11   좋아요 0 | URL
방금 제가 hnine님 페이퍼에 남긴 댓글에 답해주신 내용을 보고 왔습니다.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모두를 읽으셔서 아마도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생각의 공통된 띠가 있을 듯 싶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앞으로 펼쳐질 세계는 우리가 그동안 인본주의 패러다임에서 만들어 놓은 다양한 가치와 개념들 모두를 바꾸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또한 모두 너무나도 인류 중심으로 만들어놓은 개념이기에 또 다른 용어로 바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3부작을 읽고 <사피엔스>에서 느낀 부족함을 많이 채울 수 있었는데 유발 하라리가 펼쳐놓은 그간의 인류의 여정과, 앞으로의 계획은 매우 많은 분야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참고할만한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황금가지> 참 흥미로운 책인데, 두께가 만만치 않은 ㅎ 저는 저 책을 떠올리면서 어릴 때 한참 신화에 빠져살던 때를 그리워했지요.

아직 날이 덥고 습합니다. 그래도 곧 올 가을 준비 잘 하셔요 ^^

2019-09-11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1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1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트] 미술 철학사 1~3 세트 - 전3권 미술 철학사
이광래 지음 / 미메시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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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국내에 나온 많은 미술관련 도서를 읽어야 했고, 또 그것을 정리해서 머리에 넣어야 할 때가 있었다. 미술사와 미학관련 책이 참 어려웠다. 미술사는 책을 쓴 사람에 따라 시대 구별 및 작가의 평가가 조금씩 달랐기 때문이고 미학은 그 아래에 깔린 철학적 흐름을 알아야 했고, 설명하는 개념들의 이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흔히 서양미술사 라고 하는 책들은 대부분 선사시대부터 시작해서 포스트모던까지 이어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양식과 그 양식을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 그리고 그것들이 나오게 된 간단한 사회적 배경을 서술하는 것이 보통이다. 독자는 때론 익숙한 작품, 가끔 그렇지 않은 작품들을 권위 있는, 혹은 권위 있다고 믿는 저자의 친절한 설명대로 그대로 수용한다. 그러나 이런 서술을 읽을 때면, 나는 어떤 유명한 미술관에 들어가 저자의 설명을 듣는 수동적 관람자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반문을 하게 된다.




          




아마도 이 책들은 서양미술사 책 가운데 가장 많이 선택 받는 책일 것이다. 


과연 이 책들이 포스트모던의 경향을 얼마나 잘 설명해 주고 있는지 의문이긴 하지만

각각 나름의 장점을 지닌 서양미술사 책들. 


단순히 서양미술사의 개괄과 흐름을 명료하게 나열해주는 점에서 보면 

잰슨, 이은기, 곰브리치 순으로 추천하고 싶다. 


짧지만 잰슨과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의 비교.

https://blog.aladin.co.kr/728246198/6414821




언젠가 뒤샹이 그러했듯 현대에 이르러 아서 단토나 조지 딕키가 제기한 무엇이 예술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강한 물음이 그간 우리가 당연하게 믿어왔던 예술작품과 예술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고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것이고, 그 아름다운 작품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정의도 그만큼의 다양하기에 이 문제는 영원히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미의 개별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을 지니고 예술품을 본다면 그것에 대한 서술 또한 의구심을 갖게 할 것이다.

 

다양한 매체의 혼합과 다양한 사랑의 혼합으로 인해 뚜렷한 양식의 구별이 어려워진 현대미술은 어쩌면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이런 다양한 미적 개념을 대변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최근의 미술사를 설명하고 또 그것에 관련된 책들은 이 예술품(편의상 회화, 건축, 조각의 범주에 한정하도록 하자)에 대한 형식적 설명보다는 이 작품을 둘러싼 사회적 배경, 작가가 제작하고자 했던 근원적 물음, 작품의 철학적 가치 등에 대해 더 많이 설명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제 예술품을 바라보는 독자는 작품을 보고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그 자신만의 예술적 기준을 보다 날카롭게 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얘기했듯 날카롭게 다듬는다는 것은 시대와 양식의 보다 명료한 구별, 그 예술품을 둘러싼 시대의 영향관계, 타 문화와의 교류, 사람들의 미적 인식의 변화, 그 시대를 흔든 중요한 사회적 사건 등을 다각적으로 알아본다는 것 등이 되겠는데 미학과 철학, 미술품에 대한 책들은 이런 것이 있겠다. 




           




  


            



처음에 제시한 미학강의는 조금 오래된(2003) 책이고, 다양한 개념들을 정립하는 데는 좋지만 챕터별로 분리된 느낌.

예술과 사상은 보다 쉽고 개괄적이다. 미학산책은 미학자들의 주요 주장에 대해 명료한 설명이 좋다.


움베르트 에코의 책은 미와 추라는 대립적 개념에 대해서 엄청난 도판을 통해  다양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며


설리반의 책은 다양한 동, 서의 교류를 통해 미술품과 그 양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을 수 있다. 

마지막 책은 미술비평의 흐름과 다양한 미술비평론에 대한 명쾌한 개괄을 얻을 수 있다.



제롬 스톨니츠는 예술 작품을 맥락적인상적의도주의적규칙적작품내재적으로 다양하게 비평할 수 있다고 하였다자신이 그 어떤 방법으로 예술품을 보고자 하는지또는 보아 왔는지 점검을 통해 그 예술품에 훨씬 더 깊게 따져보고 싶다면 단순히 미술사적 흐름에 치중한 책보다는 그것의 다양한 분석이 들어 있는 미학 또는 비평이 담긴 책을 접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만일 위의 책을 모두 읽을 시간이 없다면 이 책 하나를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예술이란 무엇이며?", "예술이란 아름다워야 하는가?", "다른 가치는 없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다양한 미학적 개념을 차분하면서도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이 서문만 읽어도 서양미술사의 흐름에 대해 간략히 파악이 될만큼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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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 주인공이 먼저 등장해야 하지만 상황상 늦게 등장하였다.





이 거대한 책을 지금 리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난 6개월에 걸쳐 간 두 번 읽고 있는데 애꿎은 포스트잍만 늘어가고,

다시 읽어도 또 다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어쩌면 계속 미루기만 하다 영원히 마음 속에만 묻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여기 꺼냈다.


  


이 책은 미술의 역사는 철학의 역사로 설명해야 한다. (<철학을 지참한 미술> 만이 양식의 무의미한 표류와 표현의 자기기만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2007년에 출간한 "미술을 철학한다" 에서부터 잉태하였다. 고 저자는 말한다.) 미술을 철학의 흐름으로 다시 풀어보자는 선언으로 무수한 미술품과 미술가들을 분해하여 재정립하는 책이다. 


각 미술가들이 서로 주고 받는 영향관계와 그 시대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흐름과 철학적 의미를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미술품과 미술가들의 허상을 벗겨내고 진정한 모습을 찾아준다. 미술작품의 내재적 형식의 분석 뿐만 아니라 사회 맥락적, 작가의 개인주의적 측면까지도 면밀히 분석하여 매우 입체적인 작품 분석을 시도한다. 


이런 심도 있는 분석과 끈질긴 관찰을 통해 어쩌면 그 작품을 제작한 미술가들도 당시에는 몰랐을 다양한 철학적 개념의 틀로 작가와 작품을 구별지음에 있어 무리가 없고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오며 길고 복잡한 글이지만 그 다양한 의미연합체들이 보다 쉽게 다가온다. 


언젠가 서양미술사 공부를 하면서 내 나름대로 만든 도표가 있다. 하나는 미술가들에 대한 것이며, 또 하나는 양식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이 도표를 꺼내 보았는데 조금 불투명 하던 것들이 매우 명료해지는 느낌이었다. 











위의 사진들은 시대별 작가의 영향관계/    아래는 양식들의 영향관계









나는 어찌어찌하여 대학이후 서양미술사 수업을 세 번이나 듣게 되었다. 셋 다 모두 시대 순으로 작가와 작품을 나열하고, 그 특징들을 설명하는 수업이었는데 재미없고 지루하기만 했고, 기억에 남는 것도 없었다. 이후 어떤 시험을 위해 다시 서양미술사 책들을 끼고 공부를 했는데 그간 얼마나 내가 단편적인 방식으로 서양미술사를 접했는지 알게 되었고 위의 도표에서 정리한 것처럼 수직적 수평적으로 연결해 봐야 함을 느끼게 되었다. 


기획부터 출판까지 10년이라는 시간. 그 긴 시간을 짐작하게 하는 글의 수준과 양이다. 사적 흐름과 미학적, 철학적, 사회학적 개념을 모두 연결해 그 거대한 시간을 수직적 수평적으로 종횡무진 한다는 엄청나고 무모한 시도였지만 부족한 독자가 보기에는 꽤나 성공적이다. 


다만 이 높은 완성도와 깊이 있는 텍스트와는 별개로, 읽으며 내 스스로 끊임없이 명심하며 읽은 것이지만 반드시 이 책의 리뷰에 덧붙여 얘기하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예술가의 내적 충동에 의한 결과물은 꼭, 반드시 필연적으로 그렇게 나와야만 하는 성질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예술은 때로는 사회를 한참이나 앞서며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그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개인의 선호도 혹은 다른 미술사 책과 다른, 미술가에 대한 필자의 평가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인데 읽는 내내 나의 선호 혹은 평가와 다른 작가들이 나온다.  

매우 많은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겠지만 미술사적 흐름을 미학적, 철학적으로 심도 있게 살펴보고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기에 이 거대한 책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지점에서 지금까지 이어져온 서양미술사를 다채롭게 조망하기에 이만한 책이 또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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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8-12 0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대박 알차다..... 이 글을 말뚝으로 삼아 미술책 읽어나가면 뭐가 되도 될 것 같은 이 든든함..... 미술책이 막 그냥 막 막 읽고 싶어지네요^ㅁ^

Nussbaum 2019-08-12 13:22   좋아요 0 | URL
syo님 안녕하세요. 댓글로는 처음 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는 리뷰를 써야지 하다가 어제 밤에 썼네요. 부족하지만 숙제를 결국 하고 제출한 느낌이어서 마음이 좀 상쾌합니니다.

늘 열정적으로 올려주시는 페이퍼 잘 보고 있습니다 :) 들러주셔서 감사해요 !

무식쟁이 2019-08-12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학과 미술이랑 움베르토에코의 미의 역사, 추의 역사까지 보관함에 넣게되네요. 당장 사보지는 못하겠지만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보이면 모르고 지나치지는 않을것같아요. 누스바움님덕에 인연의 책이 좀더 늘어납니다. ^^

Nussbaum 2019-08-12 14:38   좋아요 0 | URL

무식쟁이님 안녕하세요.

보관함에 넣어놓으셨다니 제가 여기에 장점만 주르륵주르륵 늘어 놓은 것 같네요. 보시면 또 제가 얘기한 다른 인상을 받으실지 모르겠어요. 말씀하신대로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보이면 한 번 살펴보심 좋을 것 같습니다.

인연의 책이 늘어난다니 참 이거 좋은 말인 것 같아요. 알라딘에 오래 둥지를 틀고 계신 분들은 이런 느낌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희선 2019-08-13 0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늘 보는 책만 봅니다 가끔 다른 것도 봐야 할 텐데 하지만 바로 보고 싶은 걸 보는군요 미술사 미학 잘 모릅니다 전에 한번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봤지만 끝까지 못 봤습니다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끝까지 한번은 봤다면 좋았을걸... 미술사와 미학이 미술 철학사와도 이어질 듯하네요 제가 이 책을 읽었다면 한번 죽 훑어보기만 했을 듯합니다 두번이나 보다니...


희선

Nussbaum 2019-08-13 02:52   좋아요 1 | URL
이 시간에 서재에 나타나시다니, 아직 잠에 들지 않으셨군요.

음, 위에 본문에 쓰다 만 느낌이 있는데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다른 서양미술사 책에 비해 그렇게나 많이 팔려야 하는지 좀 의문스럽긴 합니다. 시대와 화가, 작품에 대해 확실하고 명쾌하게 들리긴 하나, 여전히 제게는 작가의 주장이 너무 강하게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발 <예경> 출판사는 책 좀 다시 만들면 안되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찍어내려고 하는지. 평을 보면 번역이 좋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음. 말씀하신대로 아마 이 페이퍼는 미술사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미학, 철학, 사회학 등 많은 분야를 함께 공부해야 한다고 제 나름대로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

가을을 준비하고 있을 희선님, 푹 주무시길 바랍니다.
 
[수입] 바흐 :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180g 3LP] Nathan Milstein -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1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나탄 밀스타인 (Nathan Mil / DG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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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는 바이올린을 단선율적인 악기로 보지 않고 화성적대위법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악기로 보았다화성적인 시각으로 얘기하자면 샤콘느 등과 같이 쌓여 있는 화음으로 진행하는 것도 있지만 펼침화음으로 진행되는 것도 있다

 

..

 

바흐의 자필악보에서는 소나타와 파르티타가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 어떤 의미로는 비슷한 형태로이면서 아주 음악적으로 엄격한 모습을 하고 있는 소나타에 이어 가장 자유롭고 개방적인 파르티타를 놓음으로써 대비성을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

 

소나타는 앞서 서술한 것처럼 3곡 모두 이탈리아 교회소나타와 동일한 전형적인 4악장의 악장배치를 하고 있지만완전하게 이탈리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가장 특징적인 것은 제2악장을 독일적 분위기인 푸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리고 이 악장에 선생하는 제1악장은 독일의 건반음악에서 푸가 앞에 존재하는 이른바 전주곡과 비슷하다그리고 그 뒤에 오는 제3악장과 제4악장은 제2악장이 폴리포닉적인 것에 비해서 호모포닉적인 서법을 사용하고 있다

 

파르티타는 제3번 작품이 류트를 위한 모음곡으로 편곡된 것처럼 원래 모음곡이다모음곡은 주로 춤곡을 나열한 것이지만 바흐가 살고 있던 시대에는 거의 기본적인 모습이 갖추어졌다그것은 '아르망드-쿠랑트-사라방드-지그'와 같은 악장배열이다그러나바흐는 3곡에서 이 패턴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지 않았다

 

 

- 음악세계 <바흐>, 155페이지 발췌

 

 

 

수많은 클래식 바이올린 연주자의 이름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야사 하이패츠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일 것이다. 더 선호하는 연주자가 있을지는 몰라도 이 둘을 빼 놓기는 쉽지 않겠다. 이 두 사람이 표현하는 성향은 일견 반대적이기도 해서 오랜 동안 누가 더 우위에 있느냐 하는 논쟁도 많았다.

 

 

만일 세 명으로 범위로 넓혀야 한다면 나는 나탄 밀스타인(Nathan Milstein, 러시아, 1904-1992)을 넣고 싶다처음 밀스타인의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 파르티타 앨범(DG, 1973, ADD)  CD로 들었을 때 프레이즈의 유연성과 소리의 균형성곡마다 보이는 뚜렷한 흐름이 눈앞에 마치 생생하게 펼쳐졌다거의 70세의 녹음이니 수많은 생각과 연주의 깊이가 담긴 음반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주로 EMI DG에서 녹음을 남겼는데 확실한 것은 그가 엄청난 기교의 소유자였지만브람스나 베토벤 등의 협주곡에서 레오니드 코간의 연주를 듣다가 밀스타인의 연주를 들으면 꽤나 심심하게 들리듯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에 비해 뭔가 폭발하는 패시지를 보인다거나 넘치는 잔향을 들려주는 모습은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연주를 듣고 확 끌리는 점을 찾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밀스타인의 정갈하고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을 느껴보기에는 이 바흐의 음반이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며많은 클래식 음반 감상자들도 인정하는 분위기인 것 같다이 거대한 산과도 같은 곡에서 당당하면서도 거침없다그렇게 당당하게 나가면서도 높고 낮은 소리에서 하나를 버리는 일이 없는 연주로, 바이올린 한 대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힘차다.

 

 

내가 온갖 찬사를 다 갖다 붙인 것 같아잠시 펭귄가이드(2008)의 소개를 살펴보자. 참고로 그라모폰가이드(2011) 에서는 왜인지 이 연주를 꼽지 않았는데 (그라모폰에는 레이첼 포저, 기돈 크래머, 빅토리아 뮬로바,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이작 펄만, 알리나 이브라기모바, 이사벨 파우스트 를 선정) 만일 추천 연주 분석을 위해 밀스타인이 본문에 들어 있다 하더라도 매우 괘씸한 생각마저 든다.

 

 

Milstein's set from the mid-1970's remains among the most satisfying of all versions. Every phrase is beautifully shaped, there is highly developed feeling for line, and these performances have an aristocratic poise and a classical finesse which are very satisfying.

 

 

펭귄가이드에서는 품위 있는 표현과 안정된 연주를 장점으로 내세웠다이와 함께 또 추천한 연주자로는 펄만그뤼미오메뉴힌이다 헨델헨릭 셰링율리아 피셔 등이 있다밀스타인의 연주와 유사한 쪽은 아무래도 그뤼미오헨릭 셰링 일텐데 개인적으로는 그뤼미오는 보다 섬세하고 셰링쪽은 보다 유연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선이 굵은 연주이기에 다른 연주자와도 겹치는 부분도 있겟다. 어쨌든 위에 언급한 연주자의 음반들에서는 누구의 연주가 더 뛰어난가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으며 그들의 연주의 미묘한 차이점과 특징을 구별하는 것이 훨씬 갚진 일이다.

 

 

각각 곡의 자세한 설명 - 가령 소나타 1번이 모두 4악장으로 되어 있고 3악장은 시칠리아풍이며, 2악장은 푸가의 구성을 엿볼 수 있다 등등.. 의 설명과 그것의 따른 해석은 바흐의 음악그것을 연주하는 연주자의 깊이 있는 해석을 먼저 살펴본 후의 일이다물론 알고 있다면 더 좋겠지만 음악이 주는 다양한 감정을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다.

 

 

 

잠시 LP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보자.

 

나는 이 음반을 대략 15년 전에 CD로 들었다참 많이 들었던 음반으로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파르티타 연주를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생각이 난다이번에 LP박스가 고맙게 나와서 조심스레 듣고 있는데 문득 CD LP의 특성에 대해그리고 어떻게 들리는가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보게 되었다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물리적인 차이로 디지털과 아날로그 재생 방식의 차이일 것이다.

 

 

수많은 논쟁을 뒤로하고 내가 확실히 느낀 것은 LP 소리가 조금 더 자연스럽다는 점이다만일 CD LP 소리의 특성에 대해 내게 묻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악기를 가지고 연주를 해본 적이 있는지 반문하겠다악보에는 음표가 있고 쉼표가 있다듣는 사람에게 편안함과 감동을 주려면 음표는 하나하나 모두 각자의 개성을 살리되꽉찬 소리로 들려줘야 하고쉼표는 음표의 여운을 잘 숨겨주면서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잘 해줘야 한다.

 

 

그런데 제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라도 모든 음표의 소리를 동일하게 낼 수는 없으며모든 쉼표를 동일하게 쉴 수는 없다같은 악보를 연주하더라도 각각 그 음표를 미묘하게 다르게 인식하고 다른 개성을 부여한다그날의 분위기연주자의 컨디션곡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 등을 통해 악보에는 적혀 있지 않은 그 무엇을 함께 전해준다음표와 쉼표로 이루어진 곡을 연주했을 때 발생하는 수많은 의미의 연합체들이런 것이 음악의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인적인 견해로 같은 장비로 재생했을 때 LP CD의 음질에 못미친다는 생각을 한다음질이란 것은 균등하게 뭔가를 재생한다는 뜻이다판에 소리골을 내어서 재생시키는 LP는 비록 CD에 비해 균등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약간의 불균형으로 인해 음표와 쉼표로 만드는 의미의 연합체를 조금 더 많이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CD를 들었을 때보다 LP를 들었을 때 덜 피곤함을 느낀다는 어느 실험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 생각도 든다.

 


 


 





 

 

턴테이블의 플라스틱 덮개를 열고 조심스럽게 LP박스를 열어 음반을 꺼낸다음반을 회전판위에 올려놓고 턴테이블 전원을 켠 후톤암을 조심스럽게 놓는다완전 수동인 턴테이블이어서 음악을 듣고 나면 다시 톤암을 원래 위치에 놓아야 한다. LP를 뒤집거나 바꾸려면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한다유투브에 검색만해도 음악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번거롭게 이렇게 음악을 듣고 있다니.  때론 한심스럽다. 


그렇지만 그 동작이 끝나고 턴테이블 위에 올려진 음반이 돌아가고 잠시 후 스피커가 울리면 15년 전에 들었던 밀스타인의 바흐와는 같지만 조금은 다른 음표와 쉼표가 나온다. 음표와 쉼표를 더 풍부하게인간적으로 듣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바흐를 듣고 있으면서밀스타인과 더 가까이 만나고, 풍부한 감정과 감각을 지닌 인간이라는 자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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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쟁이 2019-08-03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축 바늘이 LP에 닿는 순간의 그 먼지 부서지는 소리가 이렇게 그리워질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지요..

Nussbaum 2019-08-04 00:28   좋아요 0 | URL
오늘 라디오를 듣는데, 오프닝 멘트에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늘 우리가 가진 것에 비해 놀랄만한 것들이 등장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을 지켜내고 더 좋은 것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대략 이랬는데, 제게 이말은 과거가 좋았다는 어떤 향수의 의미라 아니라 우리가 생각을 하고 감각이 있는 인간이라는 걸 잊을 때마다 다시 그 인간다운 것으로 돌아간다는 말로 들리더군요.

이 음반 리뷰를 하다가 문득, 음악을 듣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나는 무엇을 얻는가 하는 것도. 그러다보니 이 음반 리뷰가 이렇게 흐르게 된 것 같아요.

어릴 때 회전판위에 뭔가 물건을 올려 놓고 동글동글 돌아가는 걸 마냥 재밌어 하던,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는 어느새 이렇게 나이를 훌쩍 먹었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무식쟁이님.

 
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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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열정, 동기, 핍진성

 

 

 

소설은 두 번째 삶입니다. 프랑스 시인 제라르 드 네르발이 말한 꿈처럼, 소설도 우리네 삶의 다채로움과 복잡함을 보여 주고, 우리가 아는 것 같은 사람, 얼굴, 물건 들로 가즉 차 있으니까요. 마치 꿈에서 그러하듯이, 우리는 때로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접한 것들의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우리가 어디 있는지도 잊고, 우리가 보고 있는 상상의 사건이나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소설에서 보고 희열을 느꼈던 허구 세계가 현실 세계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느낍니다.

_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소설을 대할 때면 언제나 미안함이 든다. 다른 종류의 책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어서일까? 언제부터인지 소설에는 도통 손이 가질 않는다. 이러저러한 까닭으로, 지금 내 작은 책장에는 소설책이 거의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소설을 멀리하게 된 것은.. 책장 뒤의 초라한 구색을 하고 있는 소설을 보면서 다시 소설에 대한 애정의 눈길이 생겼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스무살이 되던 해, 지극히 정신없으면서도 무료하기 짝이 없던 나는 나만의 재미있는 놀이를 하며 지냈다. 보통 책을 대출하면 나오는 대출증을, 책 맨 뒤페이지에 살짝 붙여 놓고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가끔 책을 반납 한 후 다시 그 책을 찾아보면 누군가가 거기에 낙서를 해 놓은 경우도 있었다. 그땐 그 놀이가 꽤 재미있었기 때문에 공강시간이면 총류 000부터 끝까지 훑어보고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책을 대출하고 내가 읽었다는 표시를 은밀히 하곤 했다.

 

  대출증을 붙여 놓는 놀이의 대상은 주로 아무도 안볼 것 같은 책이었는데, 이를테면 모기의 습성에 관한 책이나 좋은 이름 짓는 법 혹은 유전자의 역할, 종교전쟁을 다룬 것들이었다. 물론 소설도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소설은 많은 사람들이 책을 대여해 봤기 때문에 새책을 처음 펴는 희열을 느끼는 일이 적었다. 하지만 소설가의 삶의 때가 묻은 문장들을 몸으로 접할 수 있었다. 그 때가 아니었으면 나는 마르셀 프루스트, 살만 루시디, 오르한 파묵, 움베르트 에코, 미셀 우엘벡, 폴 오스터와 같은 작가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과 만나 20대를 거쳐 30대를 때론 진지하게, 때론 헛웃음도 짓고, 때론 가벼이 털어버리고, 때론 상상 너머의 세계를 살고 시간을 지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여전히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책 가운데 가장 아끼는 책을 최명희의 <혼불> 로 여기면서 왜였을까? 도스토옙스키의 그 인간의 내면을 날카롭게 도려내는 모습에 진이 빠지고, 레이먼드 카버의 작은 일상을 사랑하며, 김소진의 안경알 사이의 거리에서 멈칫하기를 좋아하는데. 돌이켜보건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어느 추운 날, 술을 마시다 문득 든 생각이 그 시발점이었던 것 같다. 소설은 어쩔 수 없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

 

 김연수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므로 지금 초고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은 소설가에게 필요한 말은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하자는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는 내가 왜 소설에 편견을 갖게 되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소설에 흥미를 잃게 된 시점은 언젠가부터 등장한 바람 불면 날아갈것 같은 텍스트의 나열 뿐인 소설을 읽고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거기엔 아무 의미도, 시사하는 바도, 고민도 없었다. 그런 경험이 되풀이되자 소설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훌륭한 소설가들이 경험한 것들, 내적인 것에서 끓어오르기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며 표면화된 결과물, 고민하는 텍스트들이 포함하는 여러 함의에 대한 의미를 더 이상 찾지 않게 된 것이다. 소설가와 소설이 하는 일에 대한 애정의 시선, 나는 그것을 잃고 있었다.

 

 

 

 

 

 

 

 

 

 

2부. 플롯과 캐릭터

 

 

 

독자들은 왜 어떤 소설에 그토록 열광할까? 서평 때문일까? 서평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상을 받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 잊어버린다. 책표지 때문일까? 좋은 표지를 보면 소비자는 진열대에서 한번 들어보지만, 표지는 어디까지나 포장일 뿐이다. 우아한 인쇄 때문일까? 책등에 찍힌 로고 때문에 책을 구입한 적이 있는가? 엄청난 광고 때문에? 대중들이 책 광고가 있다는 것일 알기나 할까? 영향력 있는 에이전트 때문에? 아쉽게도 이것도 독자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아니다. 실상 독자들이 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훌륭한 이야기다.

_제임스 스콧 벨 <소설 쓰기의 모든 것> 플롯과 구조. p.22

 

 

  최명희 작가의 <혼불>은 내게 특별한 책이다. 실력있는 요리사에게 죽기 전에 제일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라 하면 자기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음식이라고 말하거나 높은 명성의 화가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말하라 하면 자신이 천진난만했을 때의 첫 작품이라고 말하는 경우에서 보듯 "처음" 이 주는 강렬함은 매우 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들어가기의 그 기간동안 그리 용돈이 많지 않았던 나는 동네 서점에서 책을 보곤 했다. 그 때 꽤나 거금을 들여 책을 몇 권 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책들만큼은 버리지 않고 책장에 잘 꽂아 두고 있다.

 

  <혼불>. 10권으로 만들어진, 그러면서도 미완이라 부르는 그 긴 소설을 그렇게 열심히 읽었는지 지금도 의아스럽다. 작가 최명희는 교직에 있다가 나와 소설을 쓰기 위해 자신의 병과 싸우며 고독하게 그 책을 썼고 그 책은 꾹꾹 눌러담은 문장과 행간의 쉼표가 가득하다. 그 텍스트에는 우리의 근대사를 관통하는 삶이 녹아 있으며, 잊고 지내왔던 문화의 조각들이 숨어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읽는 나를 다른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색다른 경험, 색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수학공식같은 증명이나, 논술의 글쓰기, 아마 가보지도 못할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다른 새로운 삶. 그 삶이 책 안에서 일어난다는, 환상을 담은 이야기가 그 책을 그렇게 열심히 마르고 닳도록 읽게 만든 힘이었다.

 

  주인공 강모와 강실이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 무수한 삶의 발자국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지내는 사람을 한순간에 잡아다 머나먼 환상으로 이끄는 힘을 지닌 이야기. 그 이야기를 이루는 토대가 바로 플롯과 구조, 캐릭터일 것이다. 이런 소설에 애정을 듬뿍 가진 어떤 사람을, 조금 어색하지만 김연수가 얘기한 식대로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소설가-> 독자)

 

내가 읽는 소설의 주인공이 '행동한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행동한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면, 소설을 읽는 나 역시 '읽는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읽는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소설 읽기의 절정으로 올라가야만 하리라. 독자라면 플롯의 시작점이 행동이라는 걸 알아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삶이 '읽기' 에서 시작한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_김연수 <소설가의 일> p.104

 

 

소설을 읽겠다면, <크리스마스 캐럴>의 마지막 장면을 항상 기억하기를, 어떤 인간이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변함이 없다는 것. 달라진 사람은 말, 표정 및 몸짓, 행동으로 자신이 바뀌었음을 만천하에 보여준다는 것. 그러므로 소설을 읽겠다면 마땅히 조삼모사하기를. 아침저녁으로 말을 바꾸고 표정을 달리하고 안 하던 짓을 하기를.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간은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_김연수 <소설가의 일> p.140

 

 

 

 

 

 

 

3부. 문장과 시점

 

 

소설을 가늠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가령 우정의 기준이라든가 우리가 정의할 수 없는 무엇의 기준처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될 것이다. 감상 뒤에 쳐져서 [아, 나는 그것이 좋은걸], [그래도 그것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걸] 하고 말을 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감상이 너무 크게 또는 성급하게 말을 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소설이 갖는 강렬하면서도 벅찬 인간적인 면을 피해서는 안된다. 소설에는 인간성이 스며들어 있다. 인간성의 고양이나 침체를 피할 수도 없는 것이며, 비평을 받지 않도록 제쳐 놓을 수도 없다. 우리는 인간성을 미워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없어지든지 심지어는 순하게 되어도, 소설은 시들어 한줌의 언어 이외엔 남을 것이 거의 없다.

_ E. M. 포스터 <소설의 이해>

 

 

  아주 오랜만에 <혼불>을 꺼냈다. 책 윗등이 누렇게 바랬다. 내 마음이 저리 물러난 것인지 그 누런 종이는 나의 낯빛보다 더 빛을 잃어 조금 더 처량해 보였다. 무심코 펼친 페이지. 그 페이지의 구절은 강모와 강실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여전히 이 책은 어디를 펴도 늘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같은 표정도.

 

그 소꿉놀이 밥상을 받은 사람은 강모였다. 어린 도련님 강모는, 오류골댁 살구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차린 꽃밥에 칠첩 반상 백옥 같은 사금파리 접시 위의 색색 반찬을, 강실이가 집어 주는 대로 받아 맛나게 먹었다. 그 아홉 살 열 살의 동그란 머리 위로, 봄은 이울인 살구나무의 구름 같은 연분홍 비칠 듯 말 듯한 꽃잎들이 하염없이 흰 눈처럼 날아 내려,  강실이의 작은 어깨와 저고리 깃, 옷고름 사이로 스미어 지고, 강모의 앞자락 무릎에 졌다. 그리고 밥상 위의 밥그릇과 국그릇, 반찬그릇 색색 위에 하얗게 졌다. 나풀나풀 날아 내리는 꽃잎들은 여리고 곱다 못하여 애달프기 그지없는데, 강모는 내리는 꽃잎의 너울 저쪽에서 나뭇가지 젓가락으로 꽃밥을 먹으며 웃고, 강실이는 내리며 스러지는 봄눈같이 안타까운 꽃잎들의 이쪽에서 웃으며 새 그릇에 꽃밥을 담았다. 꽃잎은 녹는 것이 아니어서 봄눈보다 고와, 돗자리와 밥상과 마당 위에 비늘같이 작은 몸을 누이었다.

_최명희 <혼불> 6권. p.99-100

 

  마침표를 읽어내면서 나는 예전보다 꽤 납작한 삶을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김연수는 "문장" 을 다루는 부분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흔한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흔치 않은 사람이 되자. 미문을 쓰겠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이 말은 평범한 일상에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는 말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미문의 인생이다. 소설 속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추잡한 문장을 주인공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인생을 뻔한 것으로 묘사할 때 나온다. 사랑하지 않으면 뻔해지고, 뻔해지면 추잡해진다." 소설 한 권 읽지 않는다고, 소설가가 쓴 미문 하나 못 읽어낸다고 다 흔한 인생과 흔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닐테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읽고,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마음상태를 만드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이며, 또 그 문장을 읽고 다시 그 아름다움을 텍스트 더 나아가 소설가가 쓰려고 했던 마음상태까지를 느끼는 흔치 않은 사람이 되려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오랜만에 꺼낸, 눈이 자연스럽게 애처로워지면서 애틋해지는 저 단어와 문장을 오랜만에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어떤 작가가 17년간 쓴 소설을 대하며 그 문장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문장과 시점을 다루는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어쩌면 김연수가 이 책 첫머리에 마르셀 프루스트를 등장시킨 것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매일 소설을 쓰게 되면 가장 느리게 쓸 때, 가장 많은 글을, 그것도 가장 문학적으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하다. 느리게 쓴다는 것은 문장을 공들여 쓰고 플롯을 좀더 흥미진진하게 구성한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거기에는 소설이란 인간이 겪는 고통의 의미와 구원의 본질에 대해서 오랫동안 숙고하는 서사예술이라는 인식이 숨어 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의미와 구원의 본질에 대한 숙고" 그것이 소설을 예술의 한 장르로 끌어 올리는 척도가 될 것이며 독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오래 머물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문득 책장에서 꺼낸 어떤 책의 한 구절처럼.

 

<만일 정말로 네가 이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바보스럽게 어쩌다가 그냥 저지른 게 아니라, 만일 진정으로 어떤 일정하고 확고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라면, 너는 왜 지금까지도 지갑을 들여다보지 않았고, 네가 무엇을 훔쳤는지 알아보지도 않았느냐? 그러면서도 왜 넌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이런 비열하고 추악하고 저급한 짓을 의도적으로 저질렀느냐? 그런데 너는 조금전에 그 지갑을 물에 던지려고 했다. 네가 아직까지 열어 보지도 않은 물건들과 함게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인가?>

  그랬다. 그건 그랬다. 그건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는 이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이건 그에게 전혀 새로운 질문이 아니었다. 지난밤에 물에 버리기로 작정했을 때도 그 어떤 흔들림이나 갈등도 없이,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다른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것처럼 그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p.162-163

 

 

 

 

 

 

마치는 글.

 

 

소설은 처음과 끝 사리에 자신의 총체성의 본질적인 것을 포함한다. 소설은 그럼으로써 한 개인을, 그의 체험을 통해 하나의 전체적 세계를 창조해야 하고 또 그렇게 창조된 세계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 인간을 무한한 높이고 고양시킨다. 이 높이는 서시시적 개인은 물론이고 단테의 개인, 즉 이 같은 의의를 자신의 순수한 개인성 덕택이 아니라 그에게 베풀어진 은총 덕택에 얻는 단테의 개인조차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높이다.

_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김연수는 이 책에서 그런 농담을 한다. 오르한 파묵이 자신의 책 <소설과 소설가>에서 자신이 소설에 대한 비밀을 너무 많이 하여 작가협회에서 제명당하게 될 지 모른다고 하였는데, 오히려 자신이 그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분명 이 책은 소설가의 작업 대한 많은 얘기를 한다. 그가 어떻게 착상을 하며, 어떤 자세로 텍스트를 다루는지, 어떻게 그럴싸한 사건을 만드는지, 사람들이 푹 빠져 읽을 수 있는 플롯과 개성적이며 전형적인 캐릭터는 어떻게 만드는지, 독자의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름다운 문장은 무엇인지, 소설가가 어떻게 그 자신의 일에 매진해야 하는지.. 분명 김연수는 인간을 사랑하고, 서사를 만들고 탐구하기를 좋아하며, 깊은 인식을 가진 미래의 훌륭한 소설가를 염두하고 글을 썼을 것이다그러나 나는 약간은 다른 시각을 덧붙여 글을 읽는다. 그의 글은 언젠가부터 소설 읽기를 멀리한, 그러나 아직은 애정이 남아 있는 독자를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책의 끝부분에 적은 말은 얼마나 나를 다시 소설로 이끌게 하는가. 눈물겹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하려고, 가 닿으려고 노력할 때, 그때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한 일이다. 하지만 이해하느냐 못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의 영혼에 어떤 문장이 쓰여지느냐는 것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나는 평생을 쓸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_김연수 <소설가의 일> p.262

 

  책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책장에서 꺼내어 읽은 소설은 살아있었다. 아직 그 문장은 거기서 숨쉬고 있었다. "허구" 라는 장르의 특성에 지나치게 마음을 뺏긴 나머지 본질을 잊고 있었던 내게 김연수의 책 <소설가의 일>은 곧 독자의 일이었다. 애정을 잃고 꽤나 멀리 걸어왔지만 돌아가려고 하는, 돌아가고 싶었던 어느 독자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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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5-01-24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젊을 땐 정말 `책은 곧 소설`인 줄 알았던 듯해요. 책을 붙잡는다는 건 언제나 `어떤 이야기` 속으로 풍덩 빠져들어간다는 걸 항상 기대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소설은 허구`라는 걸 자꾸만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느낄 때가 생기기도 하더군요.

최명희의『혼불』을 자신이 만난 생애 최고의 작품으로 주저없이 내세우는 제 친구가 있는데, 저도 언젠가는 그 소설을 꼭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인용해 주신 저 짧은 대목만 읽어 봐도 금세 그 책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한 느낌이 드니 말이지요.

Nussbaum 2015-01-25 00:00   좋아요 0 | URL
oren님 안녕하세요.

김연수의 산문집을 읽으며, 페이퍼를 작성하면서 지나간 나의 20대를 돌이켜보기도 하고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요근래 꽤 많은 책을 팔아치워 책장이 조금이나마 한산해졌는데 그 팔려나간 책들 가운데 소설의 비중이 꽤나 큽니다. oren님 말씀을 듣고 나니 최근까지는 `어떤 이야기` 속에 풍덩 빠져들어간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 천일야화 세트를 구매하여 다시 읽게 되니 `어떤 이야기` 에 다시 빠져드는 제가 좀 신기하기도 했지요.

이 글을 작성하면서 다시 오래된 소설을 펼쳐보았습니다. 언젠가 고민 없이 그저 그 세대만을 가벼이 반영하는 소설과, 그뒷표지에 그 소설을 극찬하는 평이 잔뜩 실려 있는 것을 본 후 멀어졌던 그 발걸음을 다시 되돌려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진짜 이야기` 는 그곳에도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그것을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제가 너무 <혼불>에 대한 기대를 많이 심어드린 것은 아닐까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불완전하게 갑자기 뚝 끊어진 스토리, 중간중간 작가가 삽입한 많은 묘사에 의한 빠르지 못한 전개, 약간은 물을 먹어 늘 하강곡선을 그리는 듯한 어조와 풍경의 시선들. 현실 반영의 측면에서 부족한 감이 있다 하더라도 늘 제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작가의 문장과 같이 걸었던 제 푸른 날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대학 4년 내내 좁은 기숙사에서도 그 10권은 꼭 지니고 다녔던 그 시절의 추억은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네요.

blanca 2015-01-2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혼불을 너무 좋아해요. 이 책은 살아 있는 것 같아서 언젠가 또 한번 제대로 다시 만나얄 것 같아요.

Nussbaum 2015-01-31 18:34   좋아요 0 | URL
blanca님 안녕하세요.

예전에 <혼불> 관련해서 페이퍼였는지 남기신 글 본 기억이 납니다. 다시 제가 남긴 리뷰를 읽어 보니 그 책에 대한 내용을 많이 쓴 것 같네요. 늘 생각나는 책인데, 다시 생각해보면 소설의 힘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살아있다는 말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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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유명한 영화 <러브 레터> 의 한 장면.


이 영화에는 후지이 이츠키가 읽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 나온다. 

영화의 얼개와 잘 맞아떨어진 느낌. 두툼한 양장본으로 되어 있던, 하얀 표지의 책. 

아픈 추억, 좋은 느낌을 담은 기억의 단편의 향기를 다시 꺼내 놓으라 한다. 


잊은 줄 알았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별과 재회 또는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이다. (...) 작품 세계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은, 우리가 부단히 죽어 가고 있다는 세네카식의 인식이다. 특히 망각현상이 그 극명한 예이다. 까마득히 먼 유년시절에 겪었던 일들은 물론, 불과 며칠 전의 일들도 쉽게 잊거나 잊혀진다. 그것이 프루스트가 인식한 우리의 정서적 모습이다.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의 뚜렷한 징표인 우리의 정서적 퇴직물은 덧없이 지워진다. 


그러나 영영 지워지는 것일까? 그렇게 죽어 소멸되는 것일까?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 의 중심적인 의문이다. (...) 잃어버린 시간은 그토록 하찮은 사물에 의해 촉발된 황홀감이나 격정의 비밀을 깨달아 가는 역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터득한 '진정한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은 '잃어버린 줄로 믿었던 시간'을 가리키는 반어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적 체험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조선일보 2005년 4월 9일 "책 읽는 대한민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편 발췌 (이형식 교수)



이 방대하고 읽기 까다로운 소설을 따라 읽어 나가기도 벅찬데, 이 소설을 과연 내가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온갖 외피같은 부연 설명을 제거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이 소설에 대한 인상뿐일지 모른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명료함과는 거리가 있다. 이 소설은 한 번에 손에 잡히지 않는다. 소설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면 손에 잡히기는커녕 손가락 사이로 그 텍스트들이 줄줄 새어 흩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왜 이 소설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런 텍스트가 흩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일까? 지독한 만연체, 하나의 기억을 회상하는 문장의 길이와 두께,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화가와 음악들이 파편처럼 마르셀의 기억 저편에 두툼한 먼지구름을 일으켜 그것을 감싸고 있다. 하여 나는 이 텍스트들을 읽을 때마다 하르트만이 제시한 '전경'과 '후경' 을 넘나들며 마르셀과 프루스트의 기억을 함께 더듬게 된다. 

 

 

마르셀 프루스트 (1871년 7월 10일 - 1922년 11월 8일) 의 삶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니체와 프로이트가 매우 큰 영향력을 떨치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태어나 살았으며 러스킨과 모리스가 들고 나온 미술공예운동의 수공예와 과감한 재료의 사용과 유기적 곡선을 그 특징으로 하는 아르누보적 예술의 중심에서 살았다. 미술사적으로는 후기인상의 화가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발휘하던 시기로, 어쩌면 그의 작품은 프로이트가 예술에 가져다준 초현실적인 의식 흐름과 당시 예술적 분위기를 함께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 소설은 모두 일곱 권 (7부)로 되어 있다. 그 간단한 줄거리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 - 책, 2010.3.26, 들녘)

 

「스왕네 집 쪽으로(Du côté chez Swann)」라고 이름 붙여진 첫 권은 마르셀의 유년기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그가 해마다 부모와 함께 콩브레에서 보냈던 여름 휴가의 기억들이 그려진다. 마르셀이 이 초창기 시절에서 떠올리는 유일한 기억은 잠자리에 들기 전의 인사를 거부했던 연극이다. 그 집안의 친구인 스왕이 저녁마다 찾아오면 당시 열 살배기인 마르셀은 어머니에게 받고 싶어했던 잘 자라는 뽀뽀도 받지 못한 채 어김없이 잠자리로 가야 했다. 어머니의 관심을 계속해서 잃게 되자 이것이 평생의 상처로 남게 되고, 그 내면적 상처는 이후 마르셀에게 여성에 대한 상실의 불안과 공격적 질투심이라는 형태로 남게 된다. 잠자리 인사의 에피소드가 유년기의 유일한 기억인 반면에, 저 유명한 마들렌 과자 맛의 느낌은 돌연히 유년기 당시에 있었던 인물들, 장소들과 더불어 그의 기억을 다시 살아나게 만든다. 사랑받는 할머니, 고집 센 집안 하녀 프랑수아즈, 우울증을 보이는 레오니 고모, 서양산사나무 울타리, 콩브레의 교회 등까지 말이다.


제1권의 2부는 「스왕의 사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는 예술 애호가 스왕과 아주 수상한 소문이 떠도는 부인인 아름다운 오데트 드 크레시 사이의 연애담을 서술한다. 그 둘은 베르뒤랭 부인의 살롱에서 만난다. 그 살롱은 상류 시민층이 모이는 곳으로 귀족들이 모이는 게르망트 살롱과 함께 소설에서 사회적 배경의 초점을 이루는 곳이다. 스왕은 오데트가 자신을 속였다고 의심하고 엄청난 질투심에 시달린다. 그의 사랑이 식었을 때 그는 오데트와 결혼한다. 「스왕의 사랑」은 아마도 프루스트의 소설을 처음 읽으려는 사람이 먼저 떼어 읽어볼 수 있는 부분으로 가장 적합할 것이다. 이 부분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를 형성한다. 화자의 탄생 시기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부분은 소설의 모든 부분들 중에서 통념적인 독자의 기대에 가장 상응하는 곳이다.

제2권의 제목은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다. 사춘기로 들어선 마르셀은 난생 처음으로 성적인 경험을 하게 되고, 스왕의 딸인 새침떼기 질베르트를 샹젤리제에서 재미 삼아 만나 잊지 못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천식에 시달리던 마르셀은(프루스트도 그랬다) 열일곱 살 때 그의 할머니와 함께 노르망디 해변의 발베크로 해수욕을 하러 간다. 그곳에서 그는 로베르 드 생 루를 사귀게 된다. 생 루는 대단히 매력적인 젊은이인데, 훗날 동성애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질베르트와 결혼한다. 마르셀은 생 루의 삼촌 샤를뤼 남작도 만나는데, 그는 이후 동성애를 통해 치명적인 결과를 맞이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르셀은 발베크에서 자신의 본격적인 사랑의 주인공 알베르틴을 만나게 된다. 마르셀이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그녀가 여자 친구들과 함께 있던 해변 거리에서였다. 그는 아름답고 활동적이고 현대적인 젊은 여성을 발견하고는 아주 놀란다.

제3권 「게르망트가의 사람들(Le côté de Guermantes)」에서는 마르셀이 그의 부모와 함께 파리로 이주한다. 그들은 이제 게르망트 저택에 속하는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마르셀은 (늘 그랬던 것처럼) 먼발치에서 게르망트 공작 부인을 사랑한다. 마침내 그 부인을 만났을 때 그는 (역시 늘 그랬던 것처럼) 실망한다. 당시 사회생활의 중심인 살롱의 끊임없는 대화 소재는 유대인 대위 드레퓌스 사건(드레퓌스라는 유대인 대위가 군 당국이 조작한 증거를 근거로 국가반역죄 판결을 받았다가 혐의를 벗고 석방되자 사회에서 반유대인 물결이 일어났던 사건­옮긴이)이다. 드레퓌스는 1894년 이른바 모반죄라는 혐의를 쓰고 유형지인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프랑스 내정에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제4권 「소돔과 고모라(Sodome et Gomorrhe)」의 주요 테마는 동성애다. 처음에 마르셀은 우연히 샤를뤼 남작의 동성애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다. 남작은 이 동성애 사건으로 점차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그 사이 알베르틴을 다시 만나게 된 마르셀은 그녀 역시 동성애적 성향이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제5권 「갇힌 여인(La Prisonniére)」에서 마르셀은 알베르틴을 자기가 있는 파리로 불러들인다. 그녀는 그의 집에서 기거한다. 알베르틴이 외출하면 그는 질투심에 불타 그녀를 감시한다. 소유욕에 사로잡힌 마르셀의 태도 때문에 알베르틴은 어느 날 아침 그 집을 떠나고 만다.

그 다음 제6권 「사라진 알베르틴(Albertine disparue)」에서 마르셀은 친구 생 루에게 알베르틴을 수소문하여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결국 마르셀은 알베르틴이 승마를 하다 사고가 나서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7권이자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Le Temps retrouvé)」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 마르셀은 게르망트 공작 저택으로 마티네를 방문한다. 그 집의 서재에서 마르셀은 문득 시간이 흐르는 것을 기억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르셀은 이런 깨달음을 오래 간직하기 위하여 소설을 쓰고자 결심한다. 그래서 프루스트의 소설은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처음으로 회귀하게 된다. 마르셀은 이 소설을 쓰게 되고,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는 비로소 독서를 마치게 되는 셈이다.


 


 

1부 <스완씨 댁 쪽으로>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을 잠시 옮겨보자.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 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그러다 삼십여분이 지나면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에 잠이 깨곤 했다. 그러면 나는 여전히 손에 들고 있다고 생각한 책을 내려 놓으려 하고 촛불을 끄려고 했다. 나는 잠을 자면서도 방금 읽은 책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는데, 그 새악은 약간 특이한 형태로 나타났다. 마치 나 자신이 책에 나오는 성당, 사중주곡, 프랑수와 1세와 카를 5세와 경쟁관계라도 되는 것 같았다. 이 믿음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몇 초 더 지속하여 내 이성에 거슬리지는 않았지만, 내 눈을 비늘처럼 무겁게 짓눌러 촛불이 꺼졌다는 사실조차도 알아치리지 못하게 했다. (...)


나는 어린 시절 뺨처럼 팽팽하고 싱그러운 베게에다 뺨을 갖다 대었다. 시계를 보려고 성냥을 켰다. 곧 자정이다.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환자가 낯선 호텔 방에서 잠이 들었다가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깨어나 문 아래로 스며든 한 줄기 햇살을 기뻐하는 순간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벌써 아침이라니 ! 곧 종업원들이 일어날 테고 종을 울릴 수 있고, 그러면 누군가 와서 보살펴 주겠지 ! 고통을 덜 수 있다는 희망이 아픔을 견뎌 낼 용기를 준다. (...)


다시 잠이 들었다. 이따금 나는 아주 짧은 순간, 나무 벽판이 규칙적으로 삐걱대는 소리를 듣거나, 어둠의 만화경을 응시하려고 눈을 뜨거나, 아니면 의식의 일시적인 빛 덕분에 수면을 음미하는 그런 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때 가구며 방이며 모든 것은 잠 속에 잠겨 있었고, 그 작은 부분에 불과한 나 역시 무감각한 잠의 세계와 하나가 되려고 이내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또는 잠을 자면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내 원초적인 삶의 시기로 금세 되돌아가, 작은 할아버지가 내 곱슬머리를 잡아당기던 어린 시절 공포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잠을 깨는 과정에서의 의식을 적어 내려가는 장면을 굳이 분류하자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10페이지 가까이 되는 그 길이 속에서 사물과 나와의 관계, 그 오랜 관계에서 빚어진 심리적 거리, 언젠가 있었던 사건과 그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다채로운 프리즘의 환영들, 그리고 사라져 없어진 것 같았던 기억을 인간의 오감각으로 재생해내고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소설 속에서 그것을 이렇게 얘기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p.85)

 

 


한편 이 소설은 끊임없이 화가와 작곡가를 등장시킨다. 너무나 유명한 인물들과 작품이 나오는데 나의 견해로는 대부분 이야기의 흐름, 또는 인물의 유형을 드러내는데 보조적인 장치로 배치한 것이 아닌가 싶다. 휙휙 스케치하듯 그림을 그린 티치아노와 바르비종파 화가 코로, 베토벤의 교향곡, 프란츠 리스트의 작품, 모차르트의 우울한 클라리넷 오중주 등 프루스트는 그의 유복한 가정환경에 걸맞은 다양한 교양적 지식을 뽐낸다. 살짝, 조금씩 겹쳐 나오는 이런 부분들은 누군가에겐 명료함을 누군가에겐 쓸데 없는 사족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예시를 나열해보자. 스완이 등장하고 나서는 이런 부분을 만날 수 있다. 


할머니는 내 방에 가장 아름다운 유적들이나 풍경 사진을 걸어 주고 싶어 하셨지만, 막상 그런 사신들을 구입하려고 하는 순간에는, 비록 상당한 미학적 가치가 있다 할지라도, 사진술이라는 기술 복제 방식에서 저속함과 유용성을 발견하셨다. 그리하여 궁여지책으로 상업적인 저속함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다소나마 저속함을 줄이면서 그 상당 부분을 예술적인 것으로 대체하고, 예술의 여러 '두께' 를 입하려고 하셨다. 그래서 샤르트르 대성당이나 생클루 분수, 베수비어 화산을 찍은 사신 대신, 혹시 어떤 위대한 화가가 그린 것이 없는지 스완 씨에게 알아본 다음, 차라리 코로가 그린 [샤르트르 대성당] 이나 위베르 로베르가 그린 [생클루 분수], 터너가 그린 [베수비오 화산] 을 찍은 사진을 내게 주는 편을 더 좋아하셨다. (...)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예술을 이해하고 선물하는 방식이 반드시 성공적인 결과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석호를 배경으로 그렸다는 티치아노의 데생을 보고 내가 베네체아에 대해 가지게 된 관념은, 분명히 단순한 사진이 주는 관념보다 훨씬 부정확했으니까 (p. 78-79)

 

 


그리고 <스완씨 댁 쪽으로> 2권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렇다면 알겠소, 그럼 안단테만 연주하라고 하겠소." 하고 베르뒤랭 씨가 말했다. "안단테만이라고요?" 당신은 참, 바로 그 안단테가 내 팔과 다리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걸요. 참으로 대단하신 주인양반이군요. <제 9교향곡> 에서 마지막 장만 듣자고 하거나 <마이스터징어> 에서 서곡만 듣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군요." 베르뒤랭 부인이 말했다. (p.41)


"스완은 울적하고 냉소적인 기분으로, 플루트의 아리아에 이어 연주된 리스트의 피아노를 위한 인터메조 <새와 이야기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를 들으며 피아니스트의 현란한 연주를 듣고 있는 두 부인을 바라보았다. (p.242)


"오리안, 내일 저녁 잠시 우리 집에 와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오중주곡을 들어 주었으면 좋겠어. 네 의견을 알고 싶으니까." (p.250)



이렇게, 긴 호흡으로 제시하는 수 많은 생각과 인상들이, 당시 상류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들, 많은 화가와 문필가, 음악가들과 함께 우리에게 한꺼번에 밀려옴으로써 우리는 텍스트 속에 숨겨진 감정의 홍수를 만난다. 바로 그 부분이 이 소설을 그리 손에 쥐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날씨, 계절, 사물, 사람, 사회, 예술작품, 사랑... 우리가 살아가며 겪고 느끼며, 감정과 마음의 얇은 판에 새기는 무수한 감정들. 각각 저마다의 무수한 경험속 장면들에 새겨진 감정을 일깨우고, 또 그것을 느끼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소설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싶다.

 


나는 어떤 소설이든 "반드시 읽어야 할 목록"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누구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봄날의 빛이 사그라진 건물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시간과 먼지의 켜가 겹겹이 쌓인 어느 조용한 방 안에서, 잊어버린 줄만 알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한줄기 기억의 흐름을 따라가 보는 것은 꽤 근사한 일이 될 것 같다. 아주 미묘한 자국을 남기며 기록했던 누군가의 향기와 말이, 날씨와 계절에 따른 나의 시절에 추억이 진정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프랑스의 벨에어(BelAir) 에서 프루스트의 소설을 바탕으로 발레를 제작한 DVD 가 나와 있다. 롤랑 쁘띠가 안무를 맡고, 베토벤, 드뷔시, 포레, 프랑크 등의 작곡가의 음악을 소설의 부분을 재구성하여 챕터별로 제시하고 있다. 소설을 바탕으로 그 분위기를 묘사하는 장면은 함축적이면서도 프루스트의 소설의 분위기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 오른편 박스셑에는 왼편의 DVD가 함께 들어 있다.

 


 







 


 

마르셀의 눈으로 본 세계.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을 돌아보며, 사람을 만나고, 사물을 만지고, 세심한 눈으로 그것을 관찰하고 또 마음으로 보여주는 글과 소리, 감각들.

 

비록 프루스트가 남긴 문학적 성취를, 얕고 모자란 내 눈과 마음으로 마나 받아들일 뿐이지만 지금은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 언젠가부터 더 빨라지고, 지루해진 일상 속에서 부서지기 쉬운 저마다의 마음속 얇고 부드러운 기억의 판에 나 있는 그 홈을 따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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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7-15 0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으며 누린 즐거움을 떠올리며
살짝 옮겨적을 수 있으면
넉넉하리라 생각해요.

Nussbaum 2013-07-21 15:02   좋아요 0 | URL
네. 가끔 책에 적힌 낱말, 문장을 옮겨 적을 때가 있는데 그럴때마다 글자들을 어루만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여름이 가져다 준 넉넉한 마음을 품고 찬찬히 글을 보듬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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