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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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의 SF 소설이 담겨있는 단편집이다. 장르가 SF이니만큼 이 책에 실린 작품들 중에는 지구를 벗어나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가 많다. 이렇게 배경이 우주로 확장되자 지구인들은 이방인이라는 또 다른 공통분모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구에서 온 이방인들은 하나같이 현재에 대한 불안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사실 각자의 우주를 품고 지구에서 탄생한, 말하자면 태생적으로 이방인의 신분으로 살다가 죽게 되는 운명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 책의 주인공들이 안고 있는 불안과 혼란은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우리 인류 역시도 죽을 때까지 본능처럼 껴안고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단어가 내려온다>는 SF라는 낯선 상황을 던져 놓은 뒤 내 안의 질문들을 마주토록해서 지금의 나를 비춰주는 책이었다.

<마지막 로그>
‘나’는 존엄사를 일주일 앞두고 시설에 입소했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을 도와주기 위해 안드로이드 로봇 ‘조이’가 배정되었다. 나는 짜여진 일정대로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다가 존엄사를 하루 앞둔 날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잘 훈련된 조이는 나의 생각을 바로 알아챘다. 조이는 프로그래밍 된 명령대로라면 나에게 더 살아볼 것을 권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조이의 ‘자유의지’였다. 자유의지는 로봇에겐 있을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우리는 살아있음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조이에게 생과 소멸은 심장의 뜀과 멈춤으로 결정 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졌느냐 가지지 못했느냐의 문제였다. 내가 죽음을 택한 것이 맑은 마음으로 쌓아올린 자유의지로의 선택이었음을 조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끝내 조이는 나의 마음을 모른 척 했을까? 그리고 나는 충동적인 삶의 욕구를 받아들였을까? (결말은 과연?) 숨이 붙어있음이 곧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기에 존엄이 자동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이야기였다.

<단어가 내려온다>
15살이 되면 말 그대로 ‘단어가 내려온다’. 갑자기 턱 하고 내리는데, ‘턱’보다는 ‘짠’이나 심지어 ‘쾅’에 가깝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내려온 단어를 인생의 지향점으로 삼거나 이 단어로 정체성을 깨닫기도 했다. 우주왕복선을 타고 화성으로 향하고 있는 주인공은 아직 단어를 받지 못했다. 16살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도통 단어가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초조한 주인공은 단어가 내리기를 간절하게 기다렸다. 그러다 화성 입성을 코앞에 두고 주인공에게도 드디어 단어가 내렸다. 이야기의 초반부터 수많은 단어들의 향연을 넘치게 구경했지만 (작가의 언어학적인 전문성이 돋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에게 내린 단어는 의외였다. 그렇지만 그 단어를 천천히 곱씹다보니 참 멋진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할수록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단어였다. 앞으로 화성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할 그 아이에게 이보다 더 안성맞춤의 단어가 있을지 통쾌함마저 느낀 결말이었다.

<행성사파리>
13살 소녀 미아는 부모님 몰래 3박4일간의 쌍둥이지구 사파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쌍둥이지구는 크기, 지질, 대기, 기후 등 모든 조건이 현재의 지구와 꼭 닮은 행성이었다. 이를 두고 가이드 타니는 “요즘엔 연구자들도 두 행성 사이의 공통점보다는 유의미한 차이점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라고 했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가이드로서 으레 할 수 있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미아의 비밀이 밝혀지고 나서 보니, 가이드의 이 말이 어쩌면 미아에겐 한 줄기 숨을 불어넣어주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미아에게는 쌍둥이지구의 진짜 모습을 자기 눈으로 꼭 확인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타니의 말대로 미아가 관찰한 쌍둥이지구는 우리가 사는 지구의 복제판이 아니었다. 쌍둥이지구만의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만의 질서와 아름다움이 있었다. 쌍둥이지구에서 직접 바라본 이 광경들이 미아의 고독함을 깊이 잠재웠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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