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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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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신작


한줄 요약 가능하다. 요약하면


'인류는 x됐다'


이제 왜 인류가 x됐는지 알아보자. 이를 위해선 원시 시대부터 인류의 사상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시 시대의 인간은 온갖 동물을 섬겼다. 단군신화부터 호랑이를 섬기는 부족과 곰을 섬기는 부족이 결합하여 나타난 설화라는 설이 있다. 이 시대에 인류는 인류를 '생태계의 일부'로 인식했다. 인류는 곰이나 호랑이, 심지어 닭이나 돼지보다도 우월하지 않았다.


인류의 지위가 올라간 것은 성경 덕분이다. 성경에 따르면, 인류는 신이 만든 세상에서 신을 닮은 매개이다. 노아는 신을 대신해 방주를 만들고 동물들을 방주에 태울 권리를 가졌다. 우린 신이 만든 거대한 세계에서 신의 뜻에 따라 창조된 '신의 퍼즐조각'이다. 우리는 신과 가장 닮았으며,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하다.


성경이 물러간건 불과 300년쯤 됐다. 그 자리는 인본주의가 대체했다. 원시가 자연을 섬기고, 성경이 신을 섬겼다면, 인본주의는 '인간'을 섬긴다. 그리고 여전히 동물들보다 우월하다.


불과 수백년 전만 해도, 인류는 세계가 고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때는 성경에 있는 진리로 충분했다. 그들의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님과 같은 인생을 살아갈 것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보다 더 많은 걸 누려야 하며,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걸 누려야 한다. 더 이상 성경의 진리는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왜? 실제 인류의 총생산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를 만족시키는건 '발전'이다. 성경은 고정된 세계를 위해 존재했기에 발전하는 세계에서는 힘을 잃었다. 인본주의가 성경을 몰아낸건 더 진리에 가깝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 바탕에 과학기술이 있다. 


과학은 성경을 직접 공격하기도 한다. 과학은 어떠한 도덕관념도 이상도 없지만, 다만 팩트로 성경을 무력화시킨다. 언어학은 성경의 어투를 분석해서, 성경을 한 사람이 쓴게 아니라 수백년간 구전되어온 내용이 종합되었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을 밝혀냈다. 성경이 단지 이야기모음집일지도 모른다는 '과학적' 사실은, 성경의 신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그런데 우리를 성경에서 벗어나게 해준 과학기술이, 이젠 우리를 끌어내릴 위기이다. 


인본주의의 모토는 이렇게 요약된다. '너가 원하는 것을 해라!' 현대 인본주의가 숭상하는건 우리 자신이다. 지도자는 우리가 모여서 뽑는다. 신념도 세계관도 우리가 정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아는 쪼개지지 않는 숭고하고 고유한 존재이니까!... 라고 우리는 믿어왔다. 그런데 자아같은게 없다면?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게 뭔지 모른다면? 뇌과학의 발달은 자아같은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자아는 단지 뇌작용의 결과이다.


간질 환자들의 사례를 보자. 간질 환자는 한쪽 뇌에서 발작이 시작되면 뇌 전체가 발작을 해서 자기 몸도 못 가누게 된다. 의사들은 해결책으로 왼쪽 뇌와 오른쪽 뇌를 연결하는 선을 끊었고, 실제로 이는 효과가 있었다. 한쪽 발작이 다른 쪽으로 넘어가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으로 양쪽의 뇌가 소통을 못 하게 되었다. 


좌뇌는 언어를 담당한다. 우뇌는 비언어적 감정 처리를 한다. 뇌 양쪽간 연결을 끊은 환자에게, 우뇌와 연결된 왼쪽 눈에 포르노 사진을 보여주자, 환자가 키득거렸다. 왜 키득거리냐고 물어봤다. 대답을 하려면 언어능력에 해당하는 우뇌가 작동해야 되지만, 이 환자는 좌뇌의 정보를 우뇌로 넘기지 못한다. 환자는 대답을 못 하고 한참 멍하니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실험 장비중에 웃기게 생긴게 있어서요'


이 실험은 다음을 암시한다. 1. 인간은 뇌라는 알고리즘 기계가 조종하는 유기물이다. 그래서 뇌에 오류가 발생하면 엉뚱한 행동을 한다. 2. 인간은 진실을 바탕으로 말하지 않는다. 자기가 인식하는 영역 내에서 믿고싶은걸 믿고, 그걸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낼 뿐이다 (종교도 그런거다).


우리의 자아는 사실 뇌의 작용이다. 반대로 올라가보면 이런 논리가 만들어진다. 


'뇌를 직접 자극하면 자아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한 여기자가 전쟁 시뮬레이션에 참가했다. 이 여기자는 시뮬레이션에서 주어진 총으로 적을 사살하는 미션을 수행했다. 미션은 VR기계로 실감나게 진행됐다. 너무 실감난 나머지 적이 나타나자 여기자는 얼어붙었다. 미션목표 20명 중 여기자는 겨우 두 명을 사살했을 뿐이다.


이제 여기자에게 특수 헬멧을 씌웠다. 헬멧의 역할은 뇌에서 두려움을 관장하는 부분을 억제하는 전기자극이다. 여기자는 딱히 달라진 것을 못 느끼고, 그냥 혀에 조금 금속맛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미션이 시작됐다. 여기자는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아무런 잡념 없이, 2분안에 20명을 모두 사살했다. 미션이 끝나고 몇달이 지났지만 여기자는 그때의 몰입감에서 비롯된 황홀함을 잊지 못한다. 조작당했다는 불쾌감은 없었다. 이건 자아의 업그레이드인가? 아님 그냥 자아라는게 실체없는 허상인건가?


실제로 우리의 자아는 과학에 많은 부분을 내주었고, 우리도 이미 (알게모르게) 인정한다. 우울감을 느낀다면, 우리는 명상의 달인 대신 정신과를 찾아가 항우울제를 복용한다. 전쟁의 트라우마로 괴로워한다면, 우리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대신 트라우마처방제를 복용한다. 이것들은 실제로 효과가 있다. 최근 연구는 실연의 아픔을 느끼는 사람에게 아스피린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신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보다 딱히 대단할것도 숭고할것도 없다. 그냥 통증이고, 호르몬의 장난이니, 화학약품으로 처리가 가능하다. 


이미 우리의 욕망은 페이스북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 페이스북은 좋아요로 우리를 분석한다. 어느 정도냐면, 평균적으로 어떤 사람의 좋아요를 30개 이상 알면 그 사람의 직장 동료보다, 70개 이상 알면 형제자매보다, 150개 이상 알면 그 사람의 배우자보다 그 사람을 잘 맞춘다. 300개 이상 알면 어떨것 같은가? 누구보다도 그 사람을 잘 맞춘다. 그 사람 자신보다도. 물론 너가 어느 정당에 투표를 원하는지도 알고 있다. 사실 이미 투표는 필요 없을지 모른다. 뭐하러 그 귀찮은걸? 페이스북이 이미 알고있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진로탐색 상담 신청같은 어리석은 짓 대신 페이스북 좋아요를 누르며 유전자 염기 서열을 분석센터에 보내라. 분석센터는 너가 행복하기 위해선 누굴 배우자로 만날지, 아님 혼자 살지, 직업은 뭘로 하고 취미는 뭘로 할지, 어떤 병에 취약하고 어떤 생활습관을 유지할지, 너가 모르는 너에 대해 너보다 자세히 알려줄 것이다. 


생명공학의 발달은 초인류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인본주의의 시대에 가난한 노동자가 사업가에게 가졌던 위안은 '우린 똑같은 인간이고, 너도 결국 죽는다'이다. 하지만 여기자가 썼던 헬멧을 쓸 수 있다면, 돈 많은 사람들은 자녀의 공부에 저 헬멧을 이용하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우수한 난자와 정자만 뽑아서 똑똑한 애들만 낳지 않을까? 더이상 모두는 똑같은 인간이 아니다. 생명공학이 발달하면, 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개조하지 않을까? 30년이 젊어지는 기술이 나온다면 어떤가? 어쩌면 미래에는 안 죽을지도 모른다. 어떤 계급들은.


성경의 시대가 원시시대를 이긴 것은, 그게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동물을 숭상하기보다 동물을 가축으로 기르는게 더 이득이었기 때문에. 인본주의가 성경을 이긴 것도, 그게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신이 정한 세계가 아닌 부정확한 세계에선, 모든 인간이 각자의 자유로 노동하는게 더 이득이었으니. 이제 초인류가 도래하면, 인류와 원숭이의 차이가 초인류와 인류의 차이보다 작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초인류만 남기고 과거의 인류는 그냥 멸종하게 두는 것도, 그런 일이 안 벌어질 이유는 없다. 그게 더 이득이라면. 


인간의 뇌는 패턴화된 알고리즘 기계이다. 과학은 점점 이 불쾌한 가설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해내고 있다. 더 발달한 알고리즘 기계(알파고 같은)가 나오면 인간이 할 일은 없어진다. 사실 컴퓨터는 이미 소설을 쓰고 작곡도 한다. 일은 기계가 하고 우린 좋아하는것만 하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것도 컴퓨터가 더 잘 아는것 같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1. 인간은 단지 잘 작동하는 알고리즘 기계인가?

2. 지능이 의식보다 가치가 있을까?

3. 컴퓨터가 인간을 인간보다 잘 파악하게 되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이 질문이 독자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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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원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서은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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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방심하지 않았다.

치열하게 공부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좋은 대학을 갔지만, 난 방심하지 않았다. 학점을 관리하고 스펙을 쌓았다. 이름만 대면 아는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난 방심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지금은 임원이다. 현명한 재테크로 강남에 아파트도 마련해놓았다. 부럽지? 근데 궁금한게 있다.

나 왜 행복하지 않은거냐?'


가상 사연이다. 한국에 이런 사람 많을거다. 열심히 살면 행복할 줄 알았고,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억지로 외면하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나 행복하지 않다는 거.


왤까? 책의 저자, 서은국의 답은 명쾌하다.


'그렇게 살았으니까'


저자는 세계에서 꼽히는 행복 전문가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정교수 직위를 획득했으나, 모교인 연세대 교수로 돌아와 지금은 한국에 있다. 이력부터 범상치 않다. 연세대 좋은 대학인건 맞지만, 솔직히, 하버드랑 서울대에 같이 채용되면 하버드 가지 않을까? 어떻게 이런 선택을 했을까. 이 책이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


먼저 행복이 왜 필요한지부터 확인해보자. 왜 아메바는 행복같은걸 안 느끼는데, 인간은 행복이란 감정이 생겼을까? 책에 따르면, 행복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생긴 명령어, 즉 그냥 살기 위한 수단이다. 


설명해보자. 고기를 먹으면 행복하다. 근데 어떤 우리 조상은 행복이란 감정이 없었다. 그래서 고기를 먹어도 종이맛이 났다. 종이맛 나던 사람은 먹는게 행복하지 않으니, 결국 굶어서 죽었을 것이다. 행복을 느끼던 사람은 살아남고 배우자를 만나 유전자를 남겼을 것이다. 즉 우리는 고기를 먹고 행복해하던 사람의 후손이다 (우리가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이유). 다시 말하지만, 행복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설계된 '도구'에 불과하다. 


다른 모든 행위들, 예를 들면 창작활동도 마찬가지다. 피카소가 작품활동을 왕성히 했을 때는 새로운 여자를 만날 때와 일치했다. 멋진 예술품을 남기는 것도,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것도, 다 '이성에게 잘 보이고, 번식을 하기 위한' 욕구가 변형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뉴턴은 실패했다. 뉴턴은 동정으로 죽었다. 우주의 원리는 알았지만 유전자가 진짜 원하는건 몰랐나보다)

그럼 어떤 사람이 제일 행복한가? 수많은 연구는 가장 행복할 때가 '타인과 관계 맺기'를 할 때라고 암시한다. 그 이유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으니까. 혼자 살다 사냥에 실패하면 굶지만, 무리지어 살면 한명만 사냥에 성공해도 먹을 수 있다. 배우자 만나기도 더 편하다. 이래저래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 '타인과 관계맺기'는 필수적이다. 그래서 가장 행복할 때도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이다. 


이제 왜 인류가 그렇게 이성에게 목매는지 알겠다. 관계를 맺으면 행복한데, 심지어 그게 이성이다? 번식도 해결된다. 일타쌍피. 하지만 유전자는 우리에게 그렇게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 대신, 서로 살 닿는 그 느낌, 그걸 행복하게 만들었다. (여담이지만, 우리가 게이나 레즈를 혐오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 아닐까? 중립적으로 바라보기엔 너무 번식에 치명적이지 않은가)


근데 돈이란 녀석이 생겼다. 돈은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고도 생존을 가능하게 해준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돈을 생각하게만 해도 '타인에 대한 관심과 시간'을 줄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돈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제로(0)에 가깝다. 돈은 불행하지 않게는 해준다. 하지만 행복을 만들지는 못한다. 마치 목마를 때 물처럼, 적당히 먹으면 만족스럽지만 많이 먹는다고 행복해지진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불행하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요? 라는 질문에 '그렇다' 라는 대답을 한 우리나라 사람의 비율은 삼시세끼를 걱정하는 아프리카보다도 높다. 그렇게 종일 돈을 생각하고, 타인에 대한 관심을 줄이며, 우리는 불행해지고 있다. 자발적으로.


이쯤되면 나오는 질문. 맨날 회식하고 주말이면 부장님과 등산하는 우리나라가 관계를 안 맺는다고? 중요한 통찰 하나. 관계맺기는 '중요한 활동'이지 '행복한 활동'아 아니다. 중요한 활동이라, 관계맺기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그 어떤 활동보다도 '더' 심하다. 관계맺기는 자발적으로, 사회적 압력이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행복하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불행. 본전도 못 찾는다. 행복할 리가 있나? 관계를 안 맺으면 김부장이 내 생존에 즉각적인 타격을 입히는데.


어떤 나라의 행복도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변수가 뭘까. 북유럽 국가들이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는, 그들이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집단에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각 나라의 국민소득이 아닌 '얼마나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사회적 압력 없이 관계를 맺느냐'와 비례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나라에서 타인의 눈치를 안 보고 살기는 힘들다. 우리나라는 '문화적으로 불행'한 나라이다. 그래도 행복해지고 싶다면, 별 수 있나. 알아서 노력해야지.


요약하자. 행복해지고 싶나? 행복의 비밀은 '생존과 번식'이다. 그럼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

'좋아하는 사람과 즐거운 식사를 하는 것'

행복은 어떤 한 순간 (승진, 좋은대학 입학, 시험 합격)이 아니다. 현재를 포기하고 노력해서 미래에 투자하는 건, 성공하는 방법일진 몰라도, 불행해지는 방법이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정 반대이다. 다른 사람의 눈치 안 보고 자기의 개성과 욕구를 인정하며, 다양한 사람과 자발적으로 즐겁게 관계맺으며 살아가는 것. 물론 우리나라에서 쉽진 않다. 그러니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다. 행복은 빈도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행복한 시간을 '자주' 가져라. 그게 이 책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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