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 한 신학자의 인문 고전 읽기 한 신학자의 고전 읽기 1
김기현 지음 / 죠이북스 / 202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행복한 숙제 덕분에 살겠어요!

 “지민아! 뭐하니?”, “숙제요. 숙제가 너무 많아요. 숙제가 날 괴롭혀요. 숙제만 없으면 살겠어요.” 숙제로 지쳐 있는 딸과의 대화입니다. 딸은 학교 숙제, 학원 숙제, 엄마 숙제가 한 번에 몰려 버려 울상입니다. 숙제는 참 이중적입니다. 숙제는 ‘복습이나 예습 따위를 위하여 방과 후에 학생들에게 내주는 과제’로서 보통 학생들의 학습력 향상과 성장을 위해 선생님들의 내줍니다. 참 좋은 취지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숙제는 학생들에게 전달되기는 하지만 좋은 의도가 학생들의 마음에 도달되지는 않습니다. 학생 입장에서 대개 숙제는 ‘자발적 선택’이 ‘강요된 임무’로서 불편하고 부담되어 늘 ‘두고 생각해보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일 뿐입니다. 숙제 때문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인문학 공부도 숙제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사회에서도, 기업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 아닌 강요합니다. 이로 인해 책장에는 쉽게 다가가기 힘든 책들이 쌓여가고, 할 일 목록에는 여러 인물과 각종 기관에서 제시한 추천도서 리스트가 기록됩니다.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 담아두거나 구입한 책들이 쌓여 가는 양과 지적 성장과 행복감은 반비례합니다. 이 책들을 다 읽지 못하면 나는 성장하지 못하고, 남들보다 뒤쳐질 것이라는 강박과 불안감이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 공부는 ‘자발적 선택’으로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회와 세태가 해야만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 ‘강요된 임무’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다만, 모두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 방법은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도 학생 때처럼 숙제에 대한 불편한 경험을 합니다. 숙제 때문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한 신학자의 인문 고전 읽기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책 표지를 본 후 목차를 살펴보았습니다.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인문 고전 도서에 대한 저자의 서평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순간 지적 허영심이 작동하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으로 또 숙제가 엄청 많아지겠구나 하는 부담감이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이 부담은 괜한 노파심이었습니다. 이 책은 ‘해야만 한다.’는 당위로 지적 우월성을 나타내며 위협하는 교사가 아닌,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왜, 무엇을, 어떻게’ 인문고전 읽기를 할 수 있는지 알려주며 숙제를 도와주는 선생님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모티머 애들러의 ‘생각을 넓혀 주는 독서법’이 이론서라면, 이 책은 독서법의 적용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왜 읽어야 하는가? 

‘아무리 많이 읽고 배워도,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얻는 것도, 남는 것도 없다. 반면 독자적인 사고를 구축하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지기 십상이니 위태롭다.’고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배우고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곤고한 날, 위기의 시간이 가지는 의미와 목적, 그리고 나의 반응을 살필 수 있는 것이 지혜인데, 책은 거울처럼 성찰하게하고, 새로운 길을 배울 수 있게 하는 창의 역할을 하게 합니다. 특별히 인문고전 읽기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표현한 것처럼 인문학 자체가 지닌 고유함을 사랑하는 ‘향유’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인문학을 수단으로 인용하는 ‘사용’이 모두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코로나 상황을 겪으며 기독교인이란 것이 창피하게 여겨진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 라는 생각을 저자는 ‘예루살렘의 아히히만’을 소개하며 정리해줍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집단 수용소에서 과학적이과 체계적으로 학살하는 일을 담당한 최고의 관료 칼 아돌프 아히히만이 패전 후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악마일 것 같은 아히히만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착한 아들, 좋은 남편, 멋진 아빠였고, 이웃에게 친절하고 직장에서는 성실하며 국가에 더 없이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그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타인의 처지에 대해서 살피지 않았고 그런 끔찍한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저자는 이를 ‘무사려’에 기초한 ‘무배려’의 창피함이라고 합니다. 아히히만의 모습 속에서 코로나 상황 속에 이기적으로 비춰지는 교회와 정치판에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참여하며 하나님보다 세속 권력을 더 높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의 모습이 보여 집니다. 인문고전이 거울이 되고, 창이 되기에 읽어야 합니다. 


2.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저자는 자신이 읽은 인문고전을 14가지의 주제로 묶어 소개합니다. 생각, 독서, 인문학, 경건, 종교, 정치, 리더, 복종, 사랑, 안식, 죽음, 믿음, 의심, 희생, 용서 등입니다. 그리고 각 주제와 관련한 핵심 고전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친절하고 열정적인 코치가 됩니다. ‘토라를 열심히 읽었다고 자랑하는 제자에게 토라는 너를 읽었느냐고 질타한 사막 스승’이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자신이 경험하고 생각한 내용을 풀어주는 듯합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희망의 인문학의 스승이자, 로고스서원의 글쓰기 사부로서의 그의 면면이 잘 드러납니다.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각 주제의 책들을 꼭 읽기를, 좀 더 친근하게 여기기를 바라는 듯합니다.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각 주제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되고, 소개된 책이 내 삶의 창과 거울이 된다는 사실을 체감, 체득하게 됩니다. 


3.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이 책의 백미는 각 글 마지막에 있는 ‘함께 읽을 책’ 소개라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각 주제에 관련된 책들을 추천할 뿐만 아니라, 각 책이 가지고 있는 장단점을 비교하게 합니다. 다양한 독서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사고력을 증진시켜,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저자의 독서 비책을 훔쳐보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독서에 대한 많은 물음들이 해결되는 경험을 하고, 깨달음을 얻으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라고 무릎을 칩니다. 저자는 어느 순간 옆에서 원포인트 레슨을 해주는 코치가 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모티머 애들러가 말한 신토피칼 독서법을 알려줍니다. 같은 주제의 책들을 동시에 읽고 연결 지으면서 통합적이고 능동적인 독서를 하는 것입니다. 저자와의 만남은 이 독서법의 의미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해주었고, 독서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목사로서 ‘용서’를 말하며 설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용서라는 당위가 가진 피상성을 극복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는데, 나는 포도주를 자꾸 물로 만든 것 아닌가 하는 반성이 되었습니다. 자크 데리다는 ‘종교란 악으로부터 구원이다. 악이라는 실재가 없다면, 고통이라는 주관적 현실이 없다면, 종교는 없거나 있다손 치더라도 지금과는 현격히 다른 모습일 것이다.’는 명제를 접하면서 용서를 말하는 것보다 앞서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저자가 추천하는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배제와 포용>, <희생양>등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용서의 구체성에 조금씩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굿 라이프>의 저자 최인철 교수는 행복에 대해 말하며 “행복한 감정을 경험하기 위해서 행복이라는 어떤 특수하고 개별적인 감정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경직된 사고가 우리의 행복을 억압했을 수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조건의 문제라기보다 내적 감정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으로 시간을 사야한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유쾌하지도 않고 의미도 느낄 수 없는 일들을 아웃 소싱해야 한다. 한마디로 ‘비서’를 두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행복 안내자, 관리자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강요된 숙제’를 ‘자발적 숙제’로 바꿀 수 있는 비서가 필요합니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인문학을 ‘사용’하기 위한 책 이상으로 인문학을 ‘향유’할 수 있게 해주는 비서와 같은 책입니다. 본인은 이 비서를 ‘행복한 숙제’라고 정의합니다. 행복한 숙제는 나의 성장하게 하고 살게 합니다. “행복한 숙제 덕분에 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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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신학학기’(구미정 저, 서로북스)를 읽고 

‘그-신’ 놀이터에서 놀자!

  1. 잘 놀아야 한다.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도널드 위니컷(Donald Winnicott, 1896~1971)은 어린아이의 발달과정에서 ‘상상놀기’가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나 노래를 통해, 또는 친구들과 소꿉장난, 인형 놀이 등을 하면서 아이들은 미지의 세상에 대해, 그리고 타인의 마음에 대해 지도를 그린다. 너그러움과 이타심을발휘하는 법도 배운다. 놀이는 이의 성장과 건강을 촉진하며, 집단관계 이끌어내고, 사회를 의해하며, 의사소통을 배우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잘 놀아야 한다. 비단 아이들만 그럴까? 아니다 어른도 놀이가 필요하다. 잘 놀 수 있는 놀이기구와 놀이터, 놀아줄 친구가 꼭 필요하다. 저자는 세상을 이해하고 잘 살아가기 위해 잘 놀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신’ 놀이터를 소개한다. ‘그-신’ 놀이터는 성서를 표현한 ‘그림’과 성서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이해하는 ‘신학’이란 놀이기구가 있는 장소이다. 
  2.  저자는 그림과 신학이 있는 ‘그-신’ 놀이터에서 먼저 놀아본 경험(CBS TV 성서학당, 렘브란트 미술순례 강의)을 토대로 ‘어른이 되면서 점점 옅어진 예술적 감성을 일깨우기 위해 기획되었다.’고 저술 목적을 밝힌다. 특히 일반인에게 성서의 문턱을 낮추자니 그림이 ‘신의 한수’였다고 한다. 이는 성화가 그려진 목적과도 부합된다. 성화란 성서를 읽을 수 없는 신자들을 위해 성서의 내용을 쉽게 전달할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한 친구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을 보여주었다. 당시 그림의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그 그림은 수많은 그림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탕자의 아버지의 오른손과 왼손의 모양이 달라. 거친 손은 하나님의 부성을, 부드러운 손은 하나님의 모성을 상징해. 탕자는 화가 자신을 상징해. 형의 눈빛을 봐봐.”라는 친구의 설명을 듣고는 달라졌다. 이후 ‘탕자의 귀환’은 내 삶속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나만의 그림이 되었다. 저자는 바로 그 친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내 안의 예술적 감성을 일깨워 그림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세상을 읽는 신학적 안목을 키워준다. 저자는 ‘그-신’ 놀이터에서 잘 노는 방법을 알려주는 선생님, 안내자이다. 어떻게 잘 놀 수 있을까? 
  3. 첫째, ‘그림’이라는 놀이기구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그림은 성서가 화가의 신학을 통해 표현된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오늘날 성서와 성화는 따로 논다. 성서는 활자화된 두꺼운 책 속에 갇히고, 성화는 교과서에 시험을 위해 암기해야 하는 과제처럼 여겨지며, 신학은 종교적 서사(書史)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한 채 생명력을 잃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관련 정보에 대한 접근성은 높아졌지만, 예술로 승화되어 제대로 놀지는 못하는 현실이다. 고로 유명 화가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라는 놀이기구와 이를 해석하는 신학이란 놀이기구를 분리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책은 카리바조, 루벤스, 렘브란트, 미켈란젤로, 고흐, 고갱이 그린 다양한 성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같은 성서의 내용이 시대의 변화, 화가의 신학 및 경험에 따라 달리 표현되는 점을 비교하여 이해할 수 있는 점은 놀이의 즐거움을 배가시켜준다. 예를 들어 <마태와 천사>의 카리바조와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신학적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 카리바조의 그림에 천사는 마태의 머리 위에 있다. 이는 수직적인 종교적 권위, 교회의 권위를 상징한다. 반면 렘브란트는 천사가 마태의 뒤에서 속삭이듯 위치해 있으며, 마태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는 성서란 하늘의 언어를 기계적으로 받아쓴 산물이라기 보다는 기록자의 고민이 담긴 흔적이란 것을 표현하며. 중세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데카르트의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서해석의 변화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기도 했다. 샤갈과 미켈란젤로의 그림과 조각에서 모세의 머리 위에 뿔이 있다. 그런데 렘브란트의 모세 그림에는 뿔 대신 빛이 있다. 왜 그럴까? 이는 성서 번역의 차이 때문이다. ‘빛이 났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란’이다. 그런데 히에로니무스가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카란’을 ‘케란’으로 잘못 읽어 라틴어‘코르누타’라고 번역했다. 이 ‘코르누타’는 ‘뿔이 났다.’는 뜻이다. 그래서 종교개혁 전의 모세에게는 뿔이 있고, 종교개혁 이후의 모세에게는 빛이 있다. 남성과 여성의 시선에 따라 그림이 다르게 표현이 되기도 한다. ‘롯과 딸들’이란 성서 이야기를 표현한 그림에서 남성들의 그림에서 딸들은 옷을 벗은 채로 음탕함이 표현되지만, 여성화가 젠텔레스키는 등장인물들이 옷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절제미를 보이며 성서의 내용을 표현한다. 이처럼 저자는 그림이라는 놀이기구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4. 둘째, 신학이란 놀이기구를 알아야 한다. 신학은 사전적으로 ‘하나님 그 자체를 정경이나 이성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연구하거나 신과 관련된 교리와 방법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주가 만든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며, 인간은 어떠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고로 ‘신학은 인간학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저자는 신학에서 다루는 ‘성서, 천지창조, 나그네, 도시, 언약, 믿음, 아름다움, 가난, 감정, 헛됨, 공동체, 죽음’이란 주제를 그림과 성서해석을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각 주제가 나와 관련이 없는 먼 이야기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여성의 세 시기’라는 그림은 아이, 소녀, 노파를 소개하며,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고,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으로 저항하는 이는 노파뿐이라는 것을 직시하게 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죽음에 대한 바른 생각의 중요성을 밝히며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해야 ‘아모르 파티’(네 삶을 사랑하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갈릴리 폭풍 가운데 있는 예수와 제자들을 그린 렘브란트 그림과 성서본문을 읽어내며 성공에 딴 눈을 파느라 생명을 잃어버리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더불어 토비트와 안나라는 그림과 외경본문을 해석하며 신에 대한 헌신과 열정이 아무리 크더라도, 이웃에 대한 사랑과 공감이 없으면 맹목적이며 광신이라고 주장하며 오늘날 신앙의 민낯을 드러내기도 한다. 
  5. 셋째, 함께 놀 친구를 만나야 한다. 먼 거리를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한다. 물리적 시간과 정서적 시간의 차이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이다. 마찬가지로 놀이터에서 잘 놀 수 있으려면 좋은 친구가 있어야 한다. 저자를 통해 좋은 두 친구를 만났다. 바로 붓을 든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렘브란트와 고흐이다. 렘브란트는 가톨릭교인이었다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일원이 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고, 고흐는 시골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전도사가 되어 사역하다가 설교를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겨나 화가가 되었다. 이 둘은 성서를 바르고 깊이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렘브란트는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성서를 이해하는 신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특히 같은 주제의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던 그의 특징을 통해 삶의 경험이 신학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게 된다. 자화상을 자주 그리던 렘브란
    트는 명망을 얻던 화가에서 추락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은 후 자신을 탕자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자화상과 [탕자의 귀환]으로 인생을 공부하게 된다. 다음으로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삶의 의미를 관찰하려고 노력했던 고흐와 친해지게 되었다. [감자먹는 사람들]이란 그림에서 가난한 밥상일지라도, 정직한 손노동을 통해 얻은 일용할 양식은 성만찬과 다르지 않다고 해석하고, 자신의 동거녀 시앵을 그린 [슬픔]에서 ‘몸을 파는 여인’이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닌, ‘구호실에서 성장해 몸을 팔아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해야 했던’이면에 숨겨진 슬픔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울림을 준다. 고흐는 그의 믿음을 삶으로 번역하며, 붓을 들어 표현한 신학자이다.  
  6. 잘 놀아야 잘 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신’놀이터는 참 좋은 장소이다. 저자의 안내에 따라 놀이터에서 ‘그림’과 ‘신학’이란 놀이기구와 화가라는 친구들과 놀다보면 서양 종교화를 읽는 안목을 키울 뿐만 아니라, 신학의 주제 언어들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며, ‘그 신’(The God) 즉 하나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알아가게 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말한다. “나는 아몬드나무에게 말했노라. 아몬드나무야, 나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다오. 그러자 아몬드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다.” ‘그-신’놀이터에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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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 -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을 바라보며, 세상의 별이 된 다니엘처럼 청년이 희망이다 3
조영민 지음 / 죠이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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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조영민, 죠이북스)을 읽고(2021/07/12) 


이제는 더 가까이 하고 싶은 다,니,엘 


1. 가깝고도 먼 당신! 그 이름은 다니엘.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다니엘은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질 좋은 고기를 거절하고, 채소를 먹기로 ‘뜻을 정한’ 신앙의 영웅이고, 주일학교 설교의 단골 메뉴인 ‘사자굴 속에서 살아남은’ 인물이며, 낯선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3개 제국의 변화 속에서 총리로 살아간 ‘직장생활’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다니엘을 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막상 다니엘서를 읽으면 ‘익숙함’ 보다는, ‘낯설음’과 ‘난해함’이 가까이 하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 그나마 이야기식으로 전개되는 전반부 1~7장은 괜찮은데, 묵시적 환상과 계시로 쓰여진 후반부 8~14장에서는 길 읽은 사람처럼 헤매고 만다. 그래서 인지 설교자들도 그나마 익숙한 7장까지는 다루지만, 8장 이후의 후반부를 다루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 읽게 된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다니엘서의 ‘익숙함’을 ‘친밀함’으로 발전시켜 주고, ‘낯설음’을 ‘친숙함’으로 바꿔주며, ‘난해함’을 ‘선명함’으로 설명해준다. 


2.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저자 조영민 목사를 처움 알게 된 것은 [읽는 설교 룻기(죠이선교회, 2015)]를 통해서이다. 청년 사역자에서 ‘나눔교회’ 2대 담임목사로 취임하면서 공동체를 말씀으로 어떻게 섬기는지를 보여준 책이다. 언어는 그 삶과 연결될 때 ‘울림’을 준다. 그는 성실한 성경연구와 해석을 통해 받은 메시지를 현장으로 연결해서 ‘울림’과 ‘감동’을 주었다. 이후 그의 책을 가까이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영적성장의 도움을 받았다. 그의 성서강해는 자극적이거나, 화려하지 않다. 음식으로 표현하자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외식’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매끼니 먹지 않으면 안 되고, 늘 생각나게 하고,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 어머니의 ‘집밥’에 가깝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같이 정성을 쏟는 어머니처럼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민하고 전하는 ‘집밥’ 메시지이다. 


3. 이 책은 다니엘서를 강해한 ‘집밥’이다. 코로나 상황을 겪으며, 포스트-크리스텐돔(Post-christendom) 시대를 살아가며, 주류가 아닌 비주류가 되어도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전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먹고 싶은 밥(메시지)'이 아니라, 영양소가 듬뿍 담겨 있기에 반드시 '먹어야 하는 밥(메시지)'을, '먹고 싶게' 만든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배우고 느낀 점은 다, 니, 엘이다.   

 

 첫째, ‘다(多)’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다니엘은 본국에서 포로로 끌려와 이국땅에서 살아야 했다. 즉 낯선 땅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이다. 이때 우리는 고민하게 된다. 특별히 본인이 다수로 이루어진 주류라면 모르겠지만, 소수의 비주류라면 살아남기 위한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이때 사람들은 조언한다. “남들 ‘다’하는데 유별나게 살지 말고, ‘다’수가 사는 대로 둥글둥글 하게 살라고 한다.” 특별히 손해와 이익의 갈림길에서는 더욱 그렇다. 다니엘은 ‘다’의 길을 가지 않는다. 그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분명한 선을 긋고 살아간다. 다니엘도 완벽하게 선을 긋고 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중심과 본질은 지키려고 애를 썼다. 성도의 정체성을 고난보다 강력하게 무너뜨리는 ‘유혹’을 거절한다. 이를 고민하는 몸부림이 ‘저항’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다(多)’를 쫓는 것이 아니라 ‘주(主)’를 쫓기로 하는 결정이 중요하다. 신앙은 선택이며, 특별히 세상을 살되, 선을 긋는 선택의 삶을 도전한다.  

 
둘째, ‘니’(you) 별을 품지 않고 ‘내’(my) 별을 품겠습니다. 한 사람의 선택은 그 사람의 신념과 가치관을 드러낸다. 행동은 그 사람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욕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적 욕구는 무엇일까? 우리가 품고 있는 ‘별’은 무엇일까? 아마도 바벨론 땅에 정착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발달된 문명과 하나님보다 우월해 보이는 우상들을 보며 ‘니 별’을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신앙에 근거하여 그들을 구원하실 ‘내 별’을 품고 살았다. 그래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고백하며 풀무불 가운데도 들어갔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물질만능주의 세태 속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무장된 ‘내 별’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본다. 저자는 8장 후반부를 해석하며 3개 제국의 총리로 지내고, 90세의 노년이 된 다니엘의 처지와 형편을 강조하고, 그가 품은 별에 대해서 강조한다. 저자는 70년이면 끝날 것 같은 포로생활 이후에 지속되는 ‘일흔 이레’의 삶이 성도의 삶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오늘날 성도는 다니엘이 하늘을 보며 ‘내 별’을 보았던 것처럼 ‘내 별’(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야 한다고 도전한다.


셋째, '앨(엘)'범을 열어 추억을 떠올리듯이, 자주 열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을 저축통장에 비유한다. 좋은 추억의 잔고가 충분하면 관계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지만, 좋은 추억의 잔고가 바닥이면 관계가 깨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좋은 추억을 평소에 많이 만들어 놓아야 부부가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이때 좋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앨범이다. 과거의 추억은 상대방의 장점과 긍정적인 감정을 강화시켜 준다. 다니엘서 전반부의 삶의 이야기는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다니엘서 후반부의 묵시는 삶의 방향키를 놓치지 않게 해준다. 전반부보다 후반부를 더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마도 이 책 저자의 덕분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또한 저자는 다니엘이 자신의 삶과 기록을 통해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사람이 손대지 않은 돌, 풀무불 가운데 머물던 분, 사자굴에 먼저 들어가신 분, 구름타고 오시는 ‘인자 같은 이’, 하나님의 계시의 의미를 알려주는 분, 지극히 거룩한 자, 세마포를 입은 사람)를 여행가이드처럼 안내해주며 우리의 앨범을 풍성하게 해준다.


4. 이 책은 가깝고도 먼 당신 다니엘(서)을, 가까이 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오늘 우리 삶은 어떠한가? 코로나 상황 속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집합금지 명령 등의 여파로 교회가 힘들어졌다. 그리고 ‘주일에 교회 다녀왔나?’하며 퉁명스런 물음과, ‘왜 갔어?’ 하는 냉담한 눈초리들은 분명 낯선 땅을 살았던 다니엘이 오늘의 우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있는 이 때야 말로, 우리의 별이 무엇인지 즉, 우리의 가치관과 신념 가치관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저자는 말한다. “다니엘은 예수를 알았기에 ‘지혜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품고 전했기에 ‘하늘에 있는 빛’이 되었습니다. 저는 성도인 우리가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니엘이 삶 전체로 보여주었던 이 예수,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예수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라며 이 책 저술의 목적을 밝힌다. ‘다’가 아니어도 좋다. ‘니’ 별이 아닌 내 별을 품겠다. '다,니,엘' 이제는 더 가까이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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