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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슬프다거나 서운하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건 상대가 무슨 행동을 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자기 혼자 마음이 저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사람의 아득함이었다.(162쪽)
소설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경애와 상수는 자신 몫의 아득한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경애는 슬픔에 잠겨 조용히 혼자 추락하기를 선택했던 사람이고, 상수는 세상의 불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내면에 간직하고 적당히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둘이 '반도미싱'에서 팀장과 팀원으로 만나기 전에 그랬고, 그 이후로도 얼마간 그랬다. 둘 다 회사 내 아웃사이더로, 적당히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있었다. (회사 내에선 둘을 처리할 방도로 팀으로 엮어놓았지만, 나름 어벤저스가 되었다.)
사실 둘의 이어짐이 시작된 건, 반도미싱에서 만나기 한참 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친구로,그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사건에 대한 상처를 서로 만나기 전부터 지니고 있었다. 경애는 E로 부르고, 상수는 은총이라고 부르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을 좋아하는 친구.
소설의 화재 사건은 1999년 인현동 화재 사건을 그대로 옮겨 왔다. 당시 발간된 경향신문을 보니, 그 사건은 중고등학생 포함 55명이 사망하고, 78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참사였다. 당시 나도 고등학생이었으므로 뉴스를 접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씨랜드에서 유치원생들이 화재로 죽은지 4개월도 안 된 시점이었다. 이때 뉴스 보도의 뉘앙스가 '왜 호프집에 미성년자가 있었는가, 혹시 불량 청소년 아니었나'하는 것이었다. 그 뉴스를 접한 부모들의 상당수는 자녀에게 "그러니깐 넌 저런 위험한 데 가지 말거라."라고 했을 것이다. 화재를 예방할 수 있었던 장치들을 모두 제거해버리고 자기 혼자 비상구로 도망 간 호프집 사장과 경찰의 초동 대처 실패에 엄청난 목숨이 희생된 것에 대해 더 안타까워하고 분노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 곳에 갔다는 이유로, 죽어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 경애는 물론이고 많은 애들이 교복을 입고 있었다. 너네 교복 입고 창피하지도 않냐, 하고 경찰이 말했다. 경애는 자신이 무엇을 그렇게 부끄러워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렇게 말하는 누구도 용서할 수 없었다. 경애가 자다가 발딱 일어나 소리를 지르거나 신음소리를 내면서 악몽에 시달리고 있으면 엄마는 경애를 붙들어 안으면서 기도하자, 기도해, 경애야, 자, 기도해, 라고 했지만 경애는 기도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죽게 하는 것이 창조주라면, 그런 비극을 기꺼이 만들어내는 창조주라면 기도하고 싶지 않았다. (69쪽)
나는 1999년~2001년을 내 인생 암흑의 시간으로 기억하고, 오로지 기억나는 건 내가 고통스러워했다는 것 뿐이었다. 경애와 비슷했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가는 나를 안고 엄마는, 경애의 엄마처럼 기도하자고 했다. 그러면 그게 비명을 지르게 한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다가와서, 점차 괴로워도 엄마에게 가지 않았다. 혼자 어두운 비명의 시간을 견뎌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무겁게, 내 몸과 마음이 침잠했다. 소설 속 경애도 구로에 살았고, 나도 25년 넘게 그 구로에 살아봤고, 1999년에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경애가 실존 인물처럼 다가가 서로 부둥켜 안고 싶었다. "우리 그 때 참 힘들었었네." 하면서.
경애는 자기 동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경애가 사는 동네는 벽면에 쓰인 일련번호로 각각의 거주지가 구분되는 '벌집'들이 있는 곳이니까. 가게 딸린 방에서 살고 있는 자기도 그렇지만 동네에는 방 한칸에 네다섯명이 함께 지내야 하는 집들도 많았다. 그런 친구들은 한번 밖에 나오면 집 안으로 잘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주로 거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얼음땡을 수십번 하면서, 그렇게 얼었다가 다시 풀리는 순간의 스릴에 몰두하다가 고무줄을 하면서 팽글팽글 돌다가 어지러우면 꼬마애들이 타고 놀아야 할 미끄럼틀을 차지한 채 시간을 보냈다. 이런 여름이면 그런 시간은 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처럼 녹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깐 그런 날들을 보내고 나면 삶이 한살 한살 들어차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닳고 없어지기만 할 것 같았다.(236쪽)
물론 구로에 살았다고 해서 모두 다 힘들게 살았던 건 아니다. 현재보다 과거에는 구로라는 지역구가 워낙 규모가 컸고, 그렇기 때문에 지역구민의 생활 편차도 컸다.나 또한 묘사되었던 환경처럼 척박한 집에서 살진 않았지만, 어린 시절 내 친구들과 내가 놀았던 동네의 풍경과 너무나 흡사하다.
친구들 집을 돌아다니며, 친구들을 규합해서 고무줄 놀이나 제기를 차면서 어두워질 때까지 놀기도 했다. 그러다가 놀이터 한 켠에 있는 철창을 헤치고 들어가 지하에 있는 민방위 관련 시설에 있는 미끄럼틀보다 경사가 급한 시멘트 구조물에서 신발이 상하든 말든 놀았던 기억이 난다. 놀다가 나도, 친구들도 다치기도 많이 했는데, 그 시절 아이들은 참 잘 다쳤고, 부모님들은 그런 데에 지금보다 훨씬 쿨했다.
가장 뚜렷한 건 배웅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상수와 일행이 자기 시야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그 엄마가 식당 앞 모도까지 나와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 엄마가 신고 나온 붉은 가죽끈의 샌들 위로 떨어지던 나뭇잎의 어른거리던 그림자들. 그 검정의 그림자들은 발을 덮는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어둡게 물들이는 것 같기도 했는데 동시에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면서 마치 파도처럼 발을 여러번 쓸어주는 것 같기도 했다는 것.
그런 장면을 연상하다가 상수는 마침내 괄호 안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이 되고 만다."라고 문장을 완성했다. (118~119쪽)
고등학교 시절, 형 상규의 잔인한 폭행 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한 피해자 가족을 만난 뒤로, 상수는 달라지기로 했다. 김금희의 단편 「조중균의 세계」의 조종균처럼 부당한 것에 대해 가만 있지 않기로 한 듯 하다. 반도미싱에서 상수는 영업 사원이 하는 그 흔한 접대도 하지 않았고, 미싱의 전문성과 인간애로만 영업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이 회사 내에서 아웃사이더로, 코너에 몰리긴 했지만, 그런 태도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상수는 '리틀 조중균'과 같은 면이 있지만, 조중균에 비해서는 더 부드럽고 섬세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예상컨대, 항상 깔끔하게 입고 다니는 걸로 묘사된 부분으로 보아, 외모도 더 괜찮을 듯 하다. 조중균을 아는 독자라면, 상수는 조중균에 매력을 살짝 첨가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경애의 모습에서도 조중균의 대쪽 같은 성격이 보이기도 한다. 아마 그것은 내가 김금희 소설 중에서 「조중균의 세계」가 가장 인상 깊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왜 「경애의 마음」일까, 소설을 다 읽고나서도 고민해봤다. 경애가 나와서 경애의 마음이라고 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럴 거면, 「경애와 상수의 마음」이라고 했어야 했다. 경애와 상수가 여러 우여곡절 끝에 서로를 경애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우리가 상처 입고 괴로워하는 다른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일도, 바로 경애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을 경애합니다."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기록하였습니다. (클릭)
가장 뚜렷한 건 배웅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상수와 일행이 자기 시야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그 엄마가 식당 앞 모도까지 나와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 엄마가 신고 나온 붉은 가죽끈의 샌들 위로 떨어지던 나뭇잎의 어른거리던 그림자들. 그 검정의 그림자들은 발을 덮는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어둡게 물들이는 것 같기도 했는데 동시에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면서 마치 파도처럼 발을 여러번 쓸어주는 것 같기도 했다는 것.
그런 장면을 연상하다가 상수는 마침내 괄호 안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이 되고 만다."라고 문장을 완성했다
경애는 자기 동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경애가 사는 동네는 벽면에 쓰인 일련번호로 각각의 거주지가 구분되는 ‘벌집‘들이 있는 곳이니까. 가게 딸린 방에서 살고 있는 자기도 그렇지만 동네에는 방 한칸에 네다섯명이 함께 지내야 하는 집들도 많았다. 그런 친구들은 한번 밖에 나오면 집 안으로 잘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주로 거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얼음땡을 수십번 하면서, 그렇게 얼었다가 다시 풀리는 순간의 스릴에 몰두하다가 고무줄을 하면서 팽글팽글 돌다가 어지러우면 꼬마애들이 타고 놀아야 할 미끄럼틀을 차지한 채 시간을 보냈다. 이런 여름이면 그런 시간은 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처럼 녹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깐 그런 날들을 보내고 나면 삶이 한살 한살 들어차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닳고 없어지기만 할 것 같았다.(236쪽)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 경애는 물론이고 많은 애들이 교복을 입고 있었다. 너네 교복 입고 창피하지도 않냐, 하고 경찰이 말했다. 경애는 자신이 무엇을 그렇게 부끄러워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렇게 말하는 누구도 용서할 수 없었다. 경애가 자다가 발딱 일어나 소리를 지르거나 신음소리를 내면서 악몽에 시달리고 있으면 엄마는 경애를 붙들어 안으면서 기도하자, 기도해, 경애야, 자, 기도해, 라고 했지만 경애는 기도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죽게 하는 것이 창조주라면, 그런 비극을 기꺼이 만들어내는 창조주라면 기도하고 싶지 않았다. (69쪽)
슬프다거나 서운하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건 상대가 무슨 행동을 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자기 혼자 마음이 저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사람의 아득함이었다.(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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