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나고 말았다 -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보내온 두 편의 시각 기록물
노라 크루크 지음, 장한라 옮김 / 엘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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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나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이 나고 말았다.

D와 K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전쟁의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쳐졌다.


책의 원제는 Diaries of War.

부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보내온 두 편의 시각 기록물이다.


나의 의지나 계획과 무관하게 나와 내 소중한 이들의 인생이 좌지우지되는 것은 정말 엿같은 (험한 표현 죄송합니다) 기분일테지만.. 그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고 헤쳐 갈지는 개인의 선택이 남았고, 어떻게든 자기 삶의 주도권을 찾고자 D와 K는 애쓰고 있었다.


둘다 복잡하고 상반된 정체성을 지녔지만

우크라이나 기자로 활동하는 K가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면, 러시아인 예술가인 D는 보다 내밀하고 심적인 전쟁을 겪고 있었다.



양쪽 상황 모두, 삶이 전쟁 같이 느껴진 내 특수한 경험이나 보편적인 인간 감정을 이입해서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고

(하지만 글을 읽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현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약간의 어스름한 느낌이라도 함께할 수 있기를... )

한편으로는 이건 예측하거나 막을 수 없는 천재지변이 아닌,

실은 인간(들)의 결정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사건이기에

내 감정을 이입하기보다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 그 자체에 집중해서 읽으려 노력했다.

***

냉혹하게 교차되는 이 기록물을 읽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겠다고, 또는 안 하겠다고 결단을 내리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작가의 말이 뇌리에 맴돈다.


세상의 모든 불의와 부조리, 불행에 개인이 맞설 수는 없겠지만 내 마음이 가는 곳을 잘 살펴보면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 조금만 불편을 감수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전쟁에서도, 학급내 따돌림이나 다른 여러 사회적 이슈들도 방관자로 있을지, 좀더 적극적인 행위자로 있을지는 선택의 영역이 된다.

물리적으로는 훨씬 심각한 고난을 겪고 있는 K가 심적으로는 D보다 단단하고 행복해보였다.

(D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D 나름의 노력을 하지만 이상적 방향과 현실의 틈새에서 더 무기력한 느낌..)





아래는 특히 와닿았던 문구들.

28. K.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36. K. 예전에는 가족끼리 모이는 게 따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게 너무나 그립다.

59. D. 내가 결국 어디에서 살게 되건, 계속 이런 기분이 들 거라는 사실을 잘 안다. 내가 있는 곳은 바꿀 수 있지만, 이런 기분은 바꿀 수가 없다.

69. D. 빅토르 최(중략)가 부른 노래 <나는 변화를 원한다>는 2020년 벨라루스 시위 때를 포함해, 변화의 상징이 되었다.

미래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74. K. 그저 죽지 않는 것이 내 계획이다.

81. D. 우크라이나가 파괴되고 있는 와중에, 이 가게 안에는 고장난 걸 수리해줄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이 많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96. K. 더이상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전쟁을 멈추고 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97. D. 예술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멀어질 수 있게 해준다. 적어도 잠시 동안은 말이다.

99. D. 사람들은 그 시기를 떠나보내지 못한 것 같았고, 그때의 경험을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에 곧바로 적용했다.

102. K.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끔찍한 일을 들려줄 때는 잘 울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가족들에게 정서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얘기할 때면,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110. K. 나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 가족을 아끼고 있다. 그들의 유별난 면을 받아들이는 게 수월해졌다.

120. K. 고작 제자리에 머물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달려야 하는 것이다.

122. K. 냉소는 뇌가 정서적으로 손상을 입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준다.

126. K. 이런 외출은 전쟁과 우리의 미래에 관한 암울한 생각에 갇혀 있지 않도록 해준다. 작년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최악의 순간은 바로 행복한 순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때다. 마음속에서 이미 죽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다.

127. D. 전쟁은 설령 내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주위 사람들을 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내게 가르쳐주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얘기를 더 자주 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나기 전에는 그런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D와 K 모두가 목격자다. 이 전쟁에서 인간이 치르고 있는 희생을 이해하려면
바로 이런 개인적인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이 중요했다.
정치적 사건이 펼쳐지는 순간 추출되고 만 그들의 시간들 말이다. (중략)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이 전쟁으로 인해 국경 양쪽에 생겨난 두 서사의 냉혹한 대비를 기록하고,
둘을 양 페이지에 맞붙여둠으로써 D와 K의 다면적 정체성과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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