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의 폭력 - 고대 그리스부터 n번방까지 타락한 감각의 역사
유서연 지음 / 동녘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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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연 작가의 시각의 폭력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폭력이 만연한 시대에 시각적 쾌락의 무한한 추구가 낳은 심각한 문제들을 꼬집고, 분노함에 멈추지 않으며 근원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 담긴 책이다.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2016강남역 살인 사건’, 2020n번방 사건 등 여성혐오 범죄와 여성살해 범죄가 대상화되고 객체화된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시각의 폭력에 물든 이 사회에 근본적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고 가장 흔하게 벌어지는 성범죄는 역시 디지털 성폭력이다. 가해자는 무수하게 양상되지만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여러 인터넷 사이트와 다크웹, SNS에서 공유되는 피해자들의 사진, 영상물은 피해자의 인격과 존엄성 따위는 짓밟힌 채 영원히 그 속에서 불멸하게 된다. 저자는 이때 가해자들의 시선을 관음증적 시선이라고 정의한다. 관음증적 시선이란 응시의 대상이 남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전제 하에, 타인의 생식기나 성관계를 몰래 훔쳐보는 경우에 그것이 일반적인 성행위를 통해서 얻는 쾌락을 대치하거나 그 이상의 쾌감을 느끼게끔 하는 시선을 말한다. 이는 상대를 관조함으로써 대상을 통제하고 소유하며 권력상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근대인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관음증적 시선을 증폭시킨 계기가 바로 카메라의 발명이다. 사진은 부동적이고 과거의 시간을 동결시켜 무사심하고 관조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을 수월하도록 했다. 마무리하며 이러한 시각의 폭력 속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기르고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여 성욕의 해소제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맹목적 시각의 추구에서 벗어나 촉각적 시각이라는 새로운 시각의 형태를 제시한다.

 

성폭력 범죄의 원인을 젠더 간 불평등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시각이라는 감각의 남용으로 주시한다는 점이 아주 인상 깊었다.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중 가장 고결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각의 근원이 태양신론에서 비롯한 고대 서양의 백색 우월주의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하는 등 저자는 시각의 우월성과 위험성의 원인을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의 주장을 토대로 이야기한다. 성폭력 가해자들에 대한 막연한 혐오감만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범죄의 뿌리를 톺아보며 근본적인 원인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철학적으로 무지했던 터라, 또한 감각에 대한 구체적 이해도가 많이 부족했던지라 촉각적 시각 부분에서 저자의 주장을 고스란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색할 정도로 고대 철학에서 시각이 우월성을 갖게 된 흐름, 근대적 시각 사상이 관음증으로 귀결된 까닭, 카메라의 등장과 관음증적 시선, 남성들의 연대 방식 등이 설득력 있게 짜여져 있어 너무나도 유익했다. 이 한 권을 위해 저자가 얼마나 많은 문헌과 자료를 참고하여 노력했는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디지털 성폭력의 근절을 원하는 현대인이라면, 최소한의 책임감을 가지고 연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이라면 이 책을 꼭 추천하고 싶다.

 

사실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p.101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또는 사물)의 죽음연약함무상함에 동참하는 것이다그런 순간을 정확히 베어내 꽁꽁 얼려놓는 식으로모든 사진은 속절없이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증언해준다. p.123

 

이제는 그 거울을 산산조각 내고 여성의 몸을 제대로 비출 수 있는 다른 유형의 거울을 창출해낼 때이다. p.208

 

피사체와 거리를 두며 대상화·통제·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서 공존하고 공감하려는 태도 속에서 여성적 시각, 촉각적 시각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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