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am Peckinpah, 1925. 2. 21~1984. 12.28
본명은 데이비드 새뮤얼 페킨파. 별명은 ‘피흘리는 샘’ ‘폭력의 피카소’. 페킨파는 오우삼, 월터 힐,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스승이며 현대영화에 처음으로 폭력을 주요 화두로 끌어들였다. 49년 돈 시겔 감독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페킨파 영화 중 가장 높은 매표수익을 올린 <와일드 번치>는 당시까지 나온 수정주의 서부영화 중 최고 수준이었다. 배경은 1914년 멕시코 혁명기, 파이크 비숍이 이끄는 무법자 집단은 서부지역에서 은행강도로 악명을 떨치다가 반혁명군 일당과 엮이게 된다. 페킨파는 이 영화 한편으로 서부영화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자동차와 기관총이 있는 시대에 총잡이들은 충성심, 명예, 단결, 영웅주의와 같은 낡고 닳아빠진 윤리를 위해 장렬하게 싸운다. ‘변화된 시대에 변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벌이는 최후의 항거처럼 보였다. 장면마다 여섯대의 카메라를 설치하고 정상 속도, 느린 속도, 빠른 속도로 다양하게 촬영한 이 영화는 총잡이들의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질 때마다 총잡이들이 죽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느린 동작으로 화면을 잡아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영화의 최종 프린트는 2시간31분이다. 화면수는 3642개였는데 이는 보통 영화의 6배가 넘는다. 마음 내부의 갈등을 견디는 페킨파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 고독을 폭력이라는 과격한 수단으로 풀어내고 페킨파는 도덕이 무너지는 장엄한 광경을 느긋하게 시적으로 관조한다. 페킨파는 평생 그 단순하지 않은 삶의 도덕을 폭력미학으로 살펴보는 데 다 바쳤다. / 영화감독사전, 1999
기자- 당신 영화는 시종일관 사람들이 피를 흘립니다.
페킨파- 인간은 총을 맞으면 피를 흘리는 법이죠.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
멕시코 갱의 보스(대지주)는 자신의 딸을 임신시킨 알프레도 가르시아란 사내의 목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거금을 주겠다고 공표한다. 부하들과 현상금 사냥꾼들이 가르시아를 찾기 위해 나선다. 술집의 바텐더이자 삼류 연주자인 베니는 애인인 엘리타에게서 가르시아가 이미 죽은 뒤라는 사실을 전해듣는다. 살인할 필요없이 이미 죽은 자의 목을 베는 것으로 목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에 눈딱감고 일을 해치운 뒤 새삶을 살기로 작정한 베니는 엘리타와 가르시아의 무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랑을 확인해 결혼을 약속하고 '잊지못할 행복한 밤'을 위해 야영을 하기로 한다.하지만 우연적인 사건으로 시작된 살인과 폭력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베니는 강간범 두 명을 죽이고, 현상금 사냥꾼들은 엘리타를 죽이고, 베니는 다시 그들을 찾아 복수한다. 갱의 부하들은 가르시아의 시신을 찾으러 온 가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베니의 손에 죽는다. 베니에겐 이미 가르시아의 목을 갖다주고 돈을 받아올 이유가 사라졌다. 연인도 없고 손은 피범벅이다. 시체에선 지독한 악취가 풍겨 벗어날 수가 없다. 베니는 자신이 살인을 하게된 이유를 찾아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면서 더 많은 살인을 할 수 밖에 없다. 살기 위해서일까? 돈 때문일까?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삶을 망쳐버린 이 폭력의 고리의 진정하고 근본적인 이유를 알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것을 안 순간 역시 거대한 폭력 조직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다.
폭력미학의 대명사라는 페킨파의 영화를 처음 보았는데, 영화의 반이 지날 때까지 피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그 폭력미학이 이미지의 강렬함이 아닌 폭력에 대한 성찰의 강력함임을 깨달을 수 있었따. 후반부에서는 질리도록 사람이 죽어나지만 <킬빌>처럼 피가 흥건한 잔인한 영상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죽이고 죽을 뿐이다. 총은 가장 간단하게, 쉽게, 덜 잔인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식이다. 이야기의 진짜 당사자라 할 수 있는 가르시아는 해명도 변명도 할 수 없는 상태이고, 심지어 죽은 얼굴 조차 시원하게 보여지지 않는다. 언뜻 가르시아의 사진(가상)이 몇 번 보일 뿐이다. 당연하게도 가르시아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과 같다.
원앙이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호숫가. 고요하게 흐르는 물결과 따뜻한 햇살이 아름다운 여인의 부푼 배와 발을 적시고 흐른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 동안의 행복이고 그 평화로움은 오히려 잔혹한 죽음들의 전조가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베니가 탄 차를 벌집으로 만들며 사건의 원인을 다시 은폐시켜버리는 총구는 카메라를 향한다. 금방이라도 총알이 다시 발사될 것 같은 김이 나는 총구를 정면으로 보면서 이유없는 폭력의 순환, 작가증식성에 숨이 막힌다.
영화의 시작부터 폭력의 근본적인 이유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다. 정당성 또는 이유란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복수를 위한 폭력이라는 처음의 이유 또한 정당한 사유가 되지 못했지만 (당사자인 딸이 원하지 않았고, 복수라는 이름 또한 권력자의 논리였으므로) 대상자가 이미 죽은 상황에서 복수란 애초에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한 일이었다. 폭력을 행하는 방법 또한 당사자들 간의 해결이 아니라 '사주' 또는 '명령'의 방식으로 하달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돈'이라는 권력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돈-권력-폭력은 현대 인간의 욕망과 삶을 지배하는 강력한 조건이다. 그들은 자가증식하고 진짜 모습은 숨긴 채 자족한다.
박찬욱 감독은 저서 <박찬욱의 오마주>에서 <가르시아>에 대해 “이 영화야말로 샘 페킨파의 진정한 걸작이고 미국 B무비 전통의 개가이며, 가장 독창적인 로드무비이자, 컬트 중의 컬트, 보기 드물게 순수한 형태의 아트필름”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주연인 베니역을 맡은 워렌 오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