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에 대하여
아리요시 사와코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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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를 쥐고 호화판의 삶을 살았던 여자 사업가 도미노코지 기미코가 본인의 빌딩에서 추락사하였다. 그녀의 죽음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그녀의 죽음이 타살이라 말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그녀는 악녀라고. 누군가는 그녀가 숨겨둔 자식이 있다고 하며, 남편은 여럿에 자신이 양어머니 아래서 자랐다고는 하지만 양어머니는 자세한 증거를 내밀며 친어머니라 이야기한다. 그녀의 죽음을 자살이라 말하는 자들은 그녀는 우아한 귀족이었으며 나긋한 성격에 심약한 사람이었다고, 고용주로서 애인으로서 친구로서 최고의 여성이었고 다음날도 약속을 잡았던 그녀가 자살을 했을 리 없다고 말한다.


자기애성 인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자기애성 인격장애 환자는 무한한 성공욕으로 가득 차 있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관심을 끌려고 애쓴다. 지위나 성공을 위하여 대인관계에서의 착취, 공감 결여, 사기성 같은 행동 양식을 보인다. 특히 형제 없이 자란 사람에게 많이 생기며, 연극 등 예술분야, 운동, 학문연구를 하는 전문인들에게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평생 유병률은 1% 정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기애성 인격장애 [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서울대학교병원)

가끔, 나는 내가 인격에 문제가 있지 않은지 고민하곤 한다. 때로는 내 모서리를 넘어 넘치는 허영심 때문에, 혹은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억지로 누군가에게 끼워 맞추는 모습에서, 더러는 절대 굽히려 들지 않는 모습에서. 그리고 아주 가끔은 내가 소스라칠 정도로 눈 하나 움직이지 않고 거짓말을 해내는 능력? 앞에서 내가 무서워질 때가 있다.

나는 사소한 거짓말을 했을 때 들킨 적이 없다. 살면서 거짓말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어서일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나는 나까지도 속이는 거짓말을 하곤 한다. 갑자기 인격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왠지 모르게 이번 책을 읽으면서 미묘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이 극단적이라 이런 사족을 붙였다가는 이상한 사람이 돼 버릴지도 모르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한 가지 사실을 책 속에서 확인했다. 결국 모든 타자는 나의 한 쪽 모서리 만을 볼 뿐이며 눈곱만큼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그녀에 대해 증언하는 증언자들은 모두 다른 소리를 하고, 모두 다른 평을 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은 섬이며,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다만 바라보고 아, 저런 면이 있구나 할 뿐.


"사모님이라면 이해해주실 것 같았어요. 배 속의 아이가 꿈틀거릴 때, 저는 정말 기뻤답니다. 한 생명이 깃들었다는 실감이 있었어요. 사모님도 똑같은 경험을 하셨잖아요? 자식을 둔 부모라면 당연하겠지요. 함께 기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P.116>


기미코는 완전히 백장미의 요정이었으니까요. 아들이 둘이나 된다는 게 거짓말 같았어요. 누가 보더라도 처녀 신부였지요. 허리는 잘록하고 눈매가 꿈꾸는 것처럼 순진했습니다. <P.147>

자신이 남편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외도하는 여자의 입에서 전해 들은 여자에게 분명 그 여자는 악녀였을 것이다.

본인의 부티크에서 본인의 가치를 알아봐 준 여성이 완벽하게 자신의 창작욕구까지 채워줄 수 있다면. 그 뒤로 본인의 앞길을 열어줬다면. 그 여성은 분명 삶의 구원자였을 것이다.

일본 소설은 즐기지 않지만 이런 인간의 이면들을 다뤄내는 솜씨는 참으로 놀랍다. 한 여성이 이토록이나 많은 면면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꽤나 오랜 시간 동안이나 치밀하게 끌고 올 수 있었다는 것에 놀랍다. 그리고 가장 소름 끼치는 것은 이렇게나 치밀한 플롯과 세련된 구조의 책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점이다. 최근 출간되는 서적들의 시초인 걸까.


"하야카와 씨, 숫자라는 건 정말 아름다워요. 별을 닮은 것 같지 않나요? 복식 부기로는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어요. 부기 공부가 이렇게 재밌는 줄은 몰랐어요. 저기 좀 보세요, 저 별이 1이고, 저쪽은 3, 5, 7, 8. 숫자가 점점이 박혀 보석처럼 빛나는 것 같아요."<P.17>


도미노코지 기미코가 사망한 뒤로 이런저런 기사가 나왔잖아. 실제로는 1936년생 이었다, 덴헨초후 저택은 이중 삼중 담보로 잡혀 있었다, 그래서 대출해준 은행들이 서둘러 그 빌딩을 차압하려고 나섰다...... 나도 그런 기사 다 봤어. 근데 그렇다고 악녀랄 것 까지는 없잖아. 그게 왜 악녀야? 나이를 속이는 것쯤이야 우리 업계에서는 상식이야 <P.314>


"요시히코와 요시테루, 왜 두 아이 모두 요시義가 들어가게 지었지?"

그때 그녀가 당당히 가슴을 내밀며 했던 대답은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나는 '의'라는 단어도 좋고 그 한자도 정말 좋아."

그녀에게 나는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요. <P.429>


이런 장르의 책들이 그렇듯 이 책 역시 그녀가 자살했는지 타살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책의 주제가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읽었고, 순식간에 그녀의 삶이 소름 끼쳤고, 외로웠으며. 아마 리뷰를 적는 이 순간에도 잊히고 있는 중일 것이다.

역시나 이런 장르의 소설은 소모성이 짙다.

소설에서는 그녀가 죽었기 때문에 화자로 나타날 수 없었지만, 그녀를 증언하는 증언자들 사이에서 그녀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으면 조금은 갈증이 해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렇게 증언 속에서 그녀를 구성해 나가는 것도 즐거운 독서였지만 이렇게나 다양한 모습을 가진 여성이었다면, 그녀가 한 번쯤은 변론을 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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