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홍신 세계문학 9
앙드레 말로 지음, 박종학 옮김 / 홍신문화사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그런데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 자신에 대해서, 목구멍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일종의 절대적인 긍정이다. 미치광이의 긍정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나라는 존재는 결국 내가 한 일 만이 전부인 것이다.<P.68>

오랜만에 너무 머리 아픈 책을 읽어서 그런가. 올해 시작하고 읽은 책들은 어쩐지 포기하지 않고 완독한다 했는데, 이번 책은 조금 애를 많이 먹었다. 한 달여를 들고 있었으면서도 사실 아직도 내가 읽은 이 감정이 맞는지 의심이 되는 책. 누군가 그랬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기쁜 이유는 별반 다를 게 없지만 슬픈 이유는 오만가지라고. 이 책은 딱 그런 책이다. 제목에 혹해서 들었다가, 한참을 고생할 수 있다.

책은 중국의 1920-30년대. 혁명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중국사를 몰라서,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사정을 몰라서 앞부분에서 한참 헤맸다. 번역 탓도 해봤지만 결국은 내가 무지한 탓에 처음 몇 주 동안은 한참 헤매며 책을 봤다. 격변하는 시대에 장제스에, 국민당에 맞서는 코뮤니스트들. 그리고 코뮤니스트는 아니지만 엮여있는 인물들. 각각의 인물들 속에서 결국 인간은 무엇인지를 묻고자 했던 이 소설. 분명한 것은 내가 이 리뷰를 남겨두는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 책을 집을 나와 대화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아직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사상도 정치처럼 왼쪽, 오른쪽을 나눌 수 있다면 어느 방향인지는 알 수없지만 가장 끝 쪽에 서 있을 인물이 바로 첸이다. 첫 장면에서 첸은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살인을 하는 역할을 지령 받았다. 그는, 아마 그 때부터 첫 단추가 잘못 껴졌음을 알았다. 그의 운명은 그때 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신념은 사상을 위해 사람을 죽였던 그 시점부터 사상은 피를 먹고 자라며, 그것을 알 수 있는자는 많지 않기 때문에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자기만이라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첸은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면, 그 정열이 남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법이다...'하고 말한 지조르의 말이 생각났다. 별안간 첸은 깨달았다. 촨도 깨닫기 시작했다. (...)

"종교가 아니야. 인생의 이미지."(...)"...자기를 완전히 파악하는 거란 말이야"<P.221>

그는 결국 그의 신념에 따라, 광적인 믿음으로 장제스가 타고있다고 믿었던 차로 돌진했고, 그의 죽음은 그로써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 차 안에 누가 타고있느냐는 중요치 않았다. 그는 그의 신념을 지켰던 것이다. 물론, 그가 테러했던 차에 장제스는 없었다. 밀란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가 생각나는 첸의 말로였다. 그는 그의 신념을 지켰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이었을까?


대학교에서 다름을 외치다 뒷방으로 쫓겨난 교수의 아들. 프랑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기요는 인류애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공산당의 엘리트로서 작전을 기획하고 진두지휘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아버지 지조르의 사상을 이어받은 그는 전선의 최전방에 서 있었으나, 그것은 인간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죽음을 각오할 수 없는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혼자만이 죽는 것이 아닐 때, 사람은 쉽게 죽을 수 있는 법이다. 이와 같이 동지의 떨리는 말소리로 가득 찬 죽음, 많은 사람들이 마침내 순교자로 발견하게 될 패배자의 집합, 황금전설을 만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설! 이미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그가 어떻게 생명을 바친 인간의 중얼거림을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중얼거림은 죽어가는 자들에게는 인간의 씩씩한 마음이야말로 영혼의 세계 못지않은 은신처라고 부르짖는 것 같았다. <P.365>

반란죄로 붙들린 기요는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다. 사실 이 책을 읽고 이해가 안 돼서 몇가지 서평을 찾아보았다.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면서 기요가 선택한 자살의 길은 자의적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유명한 서평들은 강요된 죽음(자신의 신념이 다른 신념에게 져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상황)이 아닌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자살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카토프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조금 더 불안해하는 동료들을 위해 포기하고 신념을 지키지 못한 자가 되는 것인가? 참 어려운 부분이다. 대략적인 감정선만 알 수 있을뿐. 아직 독서력이 얕은지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기요가 매력적인 이유는 마지막 장면뿐이 아니다. 그의 독일인 아내 메이와의 담화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끊임없이 고뇌했다. 인간의 조건이 자신을 이해하는데 있다면 그는 가장 완벽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기요는 가던 발길을 돌려 성급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봉황실은 비어 있었다. 아버지는 외출하고 없었다. 메이는 여전히 거실에 있었다. 그는 문을 열기 전에 걸음을 멈추었다. 죽음을 나누는 친근감에 압도된 그는 이 마음과 마음의 융합 앞에서 육체 따위가 흥분하는 것이 그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가를 깨달았다. 이제 그는 사랑하는 자를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사랑의 완전한 형식임을, 그 이상의 것이 있을 수 없는 형식임을 알았던 것이다. <P. 244>


책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그리고 가장 인간다웠던 인물은 에밀리크였다. 그는 공산당원이지만 소시민적인 모습을 가진 자였다. 큰 뜻보다는 그의 가족들이 눈에 밟히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에멜리크에게는 아내가 있었다.(...)그는 그녀에게 친절했다. 차차 두려움에서 벗어난 그녀는 그가 아플 때 간호도 해주고, 대신 일도 해주며 그의 무기력한 증오의 발작에도 잘 견디었다. 그녀는 마치 학대받은 눈먼 개와 같은 애정으로 그에게 매달려 있었다. '당신도 나와 같이 학대받은 눈먼 개가 아닌가?'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러다가 아이도 생겼다. 그런데그는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었던가? 간신히 먹여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P.216>

그는 가족들에게 해가될까봐 동료를 본인의 집에 숨겨주지 못했다. 그는 사상과 현실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했지만, 마침내 사상은 그의 가족들을 짓밟았다. 아내를 죽였으며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까지 죽였다. 그는 그가 믿었던 사상이 모든것을 허물어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마침내 잃을 것이 없어졌던 그가 그의 신념을 향해 참전했을 때, 아뿔사. 그는 기관총을 다룰 줄 모르는 사내였다.

혹시 인간의 조건이 신념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게 아닐까. 에밀리크가 가족들을 잃었듯이. 그리고, 마침내 신념을 향했을때 그는 방법론을 알지 못하는 무능한 인간이었다. 신념도 현실도 지키지 못한 에밀리크. 어쩌면 나랑 아주 많이 닮은 인물이 아닐까.


책에선 나를 닮은 고독한 인물이 하나 더 있다. 직업적 혁명가로 소개되어있는 카토프. 그는 '마을청소'로 불린 공산당원 학살에서 마을의 남자들이 모두 죽어나갈 때 살아남았다. 그는 끊임없는 고독 속에서 사상을 위해 살았다. 의학을 전공한 인텔리이지만 그는 끊임없는 고독 속에서 안식을 찾지 못했다. 상하이 폭동 후 잡혀들어왔던 그는 주머니에 가지고있던 청산가리를 기차 연료로 죽을 본인의 운명에 질린 동료에게 나눠주고 그 운명에 직면한다. 카토프야 말로 본인의 운명에 그리고 본인의 신념에 가장 끝까지 닿아 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불에 타 죽는 것과 죽어서 불에 타는 것. 그 순서가 그리 중요치 않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의 리뷰를 괜히 읽어본 것 같다. 타인의 리뷰에서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있기에... 그러나 지금의 나는 카토프야 말로 신념에 끝까지 가 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읽고 난 나에게 묻고싶다. 지금의 나는 온전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이 책에서 등장하는 작가를 찾아보자면 아마도 지조르영감이 아닐까 싶다. 기요의 아버지인 프랑스인 교수. 그는 혁명의 정면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정신적 지주로서 각자에게 필요한 역할을 다하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그의 사상을 물려받은 아들은 공산당의 인텔리였으며, 비록 비뚤어진 방향으로 가긴 했지만, 첸의 대부 역시 그였다. 소설의 말미에 어떻게든 기요를 살려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지조르는 기요의 사상을 생각했다. 인간이 이해타산을 초월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는 모든 사상은 이 조건의 바탕을 막연하나마 인간의 존엄 위에 놓고, 그 올바름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이를테면 옛날의 노예에게는 그리스도교가, 시민에게는 국가가, 그리고 노동자계급에게는 코뮤니즘이 그것이다. <P.273>

"신은 소유할 수 있지요." 하고 노인은 다 알겠다는 듯이 미소를 띠면서 계속했다. :하지만 정복하는 힘은 갖고 있지 않아요. 신의 이상은 자기 힘을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의 꿈은 자기의 인격을 잃지 않고 신이 되는 것입니다......."<P.275>

인간의 조건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라고 쉽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조르영감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잃지 않고 신이 되는 꿈을 꾸지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인간이 가지고있는 특유의 정복욕에 의해 기꺼이 목숨을 사르는 어리석음을 가졌을 뿐이다.


사람은 언젠간 죽는다. 책에서는 더욱 다양한 죽음이 있다. 결과가 어쨌든 소멸될 인간들은 각각의 생각에 잠긴다. 인간의 조건. 어떻게 죽을것인가?

지조로 영감이 했던 말들 중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럼, 왜 목소리가 바뀌었지?"

"바뀌긴 뭐가 바귀어요, 당신 목소리 그대론데. 자기 목소리라도 알아듣기 힘든 법이에요, 처음 들으면 말이죠."루가 대꾸했다.

"축음기 탓인 게로군!"

"그건 틀림없이 방법 문제야. 우린 다른사람의 목소리는 귀로 듣지만..."

"그럼 자기 목소리는요?"

"목구멍으로 듣는거지. 왜냐하면 귀를 막아도 들리거든. 아편도 또한 귀로는 들을 수 없는 하나의 세계지..." <P.55>

나의 목소리는 목구멍으로만 들을 수 있다. 두 귀를 막고 노래를 불러보면 아마 아주 잘 들릴것이다. 물론 그런 물리적인 대답을 지조르 영감이 원한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언젠가 다시 이 책을 읽고 리뷰를 돌아보며 이불을 찰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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