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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속이 소란한 책이다. 최근 우리나라 소설들을 줄곧 읽으면서 과연 내가 사랑할 작가는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보는 중이다.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소설책을 읽다 보면 가끔, '이유 없이' 읽어야 하는 책들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감정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살지만 그래도 이유
없는, 논리가 없는 책들을 피부로 당겨 읽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와 빨강은 참 좋지 못한 책이었다.
선후관계를 잘 알지 못할 책. 그리고 줄거리 자체도 친절하지 않은 책이다.
그럼에도 재와 빨강은 어디선가 많이 읽어본 듯한 느낌이 든다. 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쥐들의 세계에 대한 묘사와 인간세계에 대한 비유가 카뮈의 페스트를 닮아있다.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카뮈의 이방인과도 닮은
듯하고, 쥐가 터지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카프카의 변신을 닮았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지나간 생애가 너무나
사소하고 볼품없어서, 그런 인생에 회한이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사소하고도 사소한 일로 채워진 현실의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영영 멀어지게 될 지도 몰랐다. 그의 불행은 이처럼 사소하고 미세한 생활의 결을 다시 매만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이 그를 짓눌렀다. <P.168>
책의 뒤편에는 장황한 해설이 담겨있다. 어쩌면 그 해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더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이 책에 대한 나의 첫 기록은, 참으로 어수선한 책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싶다.
쥐를 잡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실패의 역사라고 해도 좋다. 쥐를 잡기 위해 더 자극이 강한 독성물질을 사용하려 하다가는 쥐약을 살포할 때마다 무시무시한 방독면을 쓰고
두꺼운 방역복을 입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일이 게속되면 결국 쥐를 잡으려다가 사람을 잡는 일이 생기고 만다.<2부
P.111>
<재와 빨강>은 소설의 주인공인 그가 전염병이 창궐한 C국으로 파견근무를 가게
되면서부터 시작한다. 문제는 전염병에서부터도 오지만 그는 C국의 언어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의 파견근무는 확정된 일정이 아니었다는 곳에도
있다. 책은 1,2,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와 그리고 쥐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다룬다. 모든 이야기들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 "왜"라는
물음은 어떤 책에서나 그렇겠지만 유독 이 책에서 더 의미가 없다. 그동안 나의 독서는 '어떤 책의 줄거리는 이래 이건 이런 것을 의미해' 라는
도식 속에서 안정을 찾았기 때문에 더 힘든 책이었다.
C국으로 파견근무를 오기 전 그는 전처와 이혼을 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결국 전처를
죽인것은 그라는 것이 밝혀지지만 그는 기억하지 못한 채 C국에서의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책은 친절하지 않다. 갑자기 그는 쫓기고, 노숙자가
되었다가, 쥐를 잡는 사람이 되었다가. 마침내는 나름 번듯한 회사의 사원이었다가. 아무튼 흐름의 연결을 일부러 끊어놓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줄거리가 매끄럽지 않은 것 만은 사실이다.
전처의 죽음에 대한 실감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전처 때문에 온몸에 통증을 느낀 후라야,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이 쌓여 체기를
느끼면서도 전처가 없어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어 혀가 굳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라야 실감 할 수 있을 거였다. 그러니 이 슬픔은
전처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P.97>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이미지는 선명하다. 재와 빨강. 대비되는 색상의 책 제목에서
그리고 분위기에서 어렵지 않게 추리해 낼 수 있는 이미지.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이 재와 빨강이라는 제목이 여실히 드러난, 쓰레기
소각장의 장면이다. 그가 공원의 부랑자를 쓰레기 소각장에 던져 버렸던 날, 아마 그는 그 역시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는 C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전염병에 대한 의심을 받았고, 고립되었다. 책의 주된 주제의 한갈래가 쥐라면 한 갈래는 고독일 것이다. 그는
여러 종류의 고독을 씹는다. 아내에게 사랑을 받지 못해 생기는 고독과 C국에서의 고립감. 부랑자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두려울 정도의 고독함과,
다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고독감까지.
쓰레기장이 가장 아름다울때는
쓰레기가 타고있을 때다(...)불꽃은 처음에는 조금 흐리다가 점차 색이 선명해지고 이윽고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이 타들어가면서 나는 연기이다.<P.117>
그는 온몸에 힘을 주어
모든 구멍을 한껏 벌렸다. 침이 흐르도록 입을 크게 벌리고 대기 중에 떠도는 소독약과 소각장에서 흘러오는 검은 연기를 들여마셨다. 연기가 맵고
검었지만 여느날보다 심한 것은 아니었다. 내장이 쏟아질 듯 지독한 기침이 터져나왔다. 기침 때문에 눈물이 났다. 쓰레기는 다른 날보다 오래
탔다. 잔불은 오랫동안 남아 밤을 밝혔고 영혼처럼 가벼운 재가 밤새도록 공원을 떠돌아 다녔다. <P.151>
세상의 모든 것은 이면과 내면이 존재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이게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재와 빨강은 쥐를 생각나게 한다. 회색의 겉껍질 안에 가지고 있는 쥐의 내장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끊임없이 쥐에게 집착한다. 그리고 상황은 계속 극한으로 몰고 간다. 소설의 주인공
그는 부인을 죽였고, 쥐들을 죽였고, 공원의 부랑자를 죽였으며 방역을 하다가 마주친 여인을 죽였다. 익숙한 죽음과 익숙한 견딤. 책은 비현실적인
것들을 엮어서 회색도시를 건설했다.
무엇보다 다시는 쥐를 잡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죽은 쥐를 치우려고 일어서는 그를 피해 동료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들이 자신을 쥐 보듯 하는 것은 다 쥐
때문이었다. 내장까지 터진 징그러빅 짝이 없는 쥐를 들고 쓰레기통으로 가면서 그는 다시 한번 쥐를 잡았다가는 스스로를 사람이
아니라 쥐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1부 P.32>
C국에 전염병은 쥐가 원인이 되지는 않았다. 단지 사람들의 불안 때문에 쥐는 당연히 이곳에서
저곳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타나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방역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쥐는 단지 인간에게 해롭기 때문에 죽임을
당해도 되는 건가? 갑자기 책이 소름 끼치게 된 부분은 쥐가 사람으로 읽히기 시작한 시점부터이다. 그가 스스로를 사람이 아니라 쥐라고
생각하겠다는 말을 비웃듯 2부에서 그는 쥐를 죽이고 쥐와 생활하며 3부에서는 직업까지도 방역원이 된다. 쥐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사실 별반
다르지 않다.
도시는 외형적으로 건물과 집과 다리와 각기 다른 상점으로 이루어진 지상의 공간이지만,
실제로는 수십개의 관과 여러개의 층을 가진 지하공간이다. 지상이 인간의 세계라면, 지하는 쥐의 세계이다.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하수도 밑에는
전선이 매설된 관이 있다. 쥐는 그런 관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다. 도시의 심층구조와 쥐의 분포도는 그래서 비슷하다. 도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개의 층을 가지고 있고 쥐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수십만 마리가 존재한다.
<P.114>
작가의 문장은 왠지 모를 심해어 같다. 나에게 특별히 해를
끼치는 것도아닌데 어딘가 모르게 오싹한 그 특유의 문장 방식 때문에 줄거리가 매끄럽지 않은데도 불평불만이 없었다. 도시의 이면은 아주
깨끗할지라도, 내면에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쥐는 쥐의 세계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의 눈에는 다 띄지 않는다. 아마 쥐의
입장에서도 사람의 세계는 내 세계가 아니니 눈에 띌 필요가 없겠지.
그는 어쩌면 그의 고독을 견뎌내는 방법 '파괴'에서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경계심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쥐를 한 번에 때려잡을 때는 생소한 쾌감에 젖었다. 그는 햇볕에 농익은 석류가 속을 내버리듯 쥐가 더러운 회색 가죽 바깥으로 붉은
내장을 툭 터뜨리는 걸 똑똑히 바라보았고 피와 엉겨붙은 털이 바닥에 얼룩으로 남고 누군가 지나가면서 밟는 걸 지켜보았다.
<P.176>
평범한 괴로움과 평범한 외로움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괴로움과 특별한 외로움 역시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책을 읽는 내내 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대가로/스스로를 고스란히 내놓아야 하며,/인생에 대한 대가로 인생을
바쳐야 한다.'<P.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