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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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십 년이나 더 된 이야기지만, 갓 사회로 첫 발을 디딜 때의 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그 당시의 최저시급도 주지 않는 작은 편의점에서 주인 대신 사람을 맞으며 용돈을 벌어서 화장품을 샀을 때가 생각이 난다. 다행히도 대학은 장학금으로 다닐 수 있어서 다른 친구들보다는 낫다고 위로하면서. 그렇게 기다렸던 이십 대.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인데 점원으로서 손님을 대하는 태도는 점장에게 배울 수 있지만 사람대 사람으로서 사회에서 섞여 들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어디서도 가르쳐주질 않는다. 자연스럽게 무리 안에서 습득해야 하는 지식이었던 걸까? 어쩌면 나는 너무 평범하기에 이 책의 주인공 후루쿠라 게이코가 낯설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바틀비를 알고 있어서 영 낯선 인물도 아니었다. 현대판 바틀비. 그녀는 지금 일본의 한 편의점에서 18년째 일하고 있다.


 

 

"편의점에 계속 있으려면 '점원'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건 간단한 일이에요. 제복을 입고 매뉴얼대로 행동하면 돼요. 세상이 석기시대라 해도 마찬가지예요. 보통 사람이라는 거 죽을 쓰고 그 매뉴얼대로 행동하면 무리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방해자로 취급당하지도 않아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 속에 있는 '보통인간'이라는 가공의 생물을 연기하는 거예요. 저 편의점에서 모두 '점원'이라는 가공의 생물을 연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P.112>

그녀는 매 순간이 이상하다. 우는 사람을 조용히 시키는 가장 큰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의 큰 충격을 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들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다른 방법은 가르쳐주지도 않았으면서. 가르쳐주면 매뉴얼대로 행동할 수 있는데 모진 세상은 그녀에게 정상을 강요하긴 하지만 어떻게 정상이 될 수 있는지는 가르쳐주질 않는다.

다만 편의점에서는 이 정상적인 세계에서 그녀도 정상적인 부품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해준다. 친절하게도 가게 직원이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 매뉴얼을 알려준다.

나는 뒷방 사무실에서 보여준 견본 비디오나 트레이너가 보여주는 시범을 흉내 내는데 선수였다. 그전까지 나에게 "이것이 평범한 표정이고 목소리는 이런 식으로 내는 것"이라고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22>

>> 정상적인 삶은 무엇인가.


편의점은 그녀에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정상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를 이루는 세계의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투를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그녀는 편의점 직원 중 가장 정상적인 사람을 골라 끊임없이 관찰하고 비워져 있는 나를 채운다.

이즈미씨가 전에 일했던 가게에서 친하게 지냈다는 주부가 일을 도우러 왔을 때는 옷차림이 이즈미씨와 너무 비슷해서 착각할 뻔했을 정도다. 내 말투도 누군가에게 전염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전염하면서 인간임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P.36>

그녀의 그런 노력들은 참 안쓰럽다. 그리고 작가가 편의점을 정상적인 삶의 무대로 정한 것이 참 영리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편의점은 항상 같은 물건들이 들어차있는 듯하다. 온갖 물건들이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작은 공간에서, 각자의 역할이 정해져 있다. 물건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몇 시에 교대를 하는지 모든 것들이 정해져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사람도 물건도 매번 새로운 것들로 바뀐다. 트랜드에 따라서 각자의 사정에 따라서 새롭지 않은 것들이 새로운 것들로 바뀌어가며 편의점 속 세상을 정상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참 단순한 사회의 논리이지만 그녀를 둘러싼 세상은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무한대로 넓은 세상에서 그녀는 그녀가 안정적으로 정상이 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찾은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비정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곳. 우는 사람에 대한 대처법이 정해져있는 그곳에서 그녀는 편의점의 부품으로 18년을 고장도 없이 살았다.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차임벨 소리가 교회 종소리로 들린다. 문을 열면 빛의 상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언제나 계속 돌아가는, 확고하게 정상적 세계. 나는 빛으로 가득 찬 이 상자 속 세계를 믿고 있다. <P.41>

그녀는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로 매 순간 새롭게 채워진다. 나이가 들면서 늙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녀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가족들도 그녀의 친구들도 비정상적인 그녀를 탓하고, 그녀는 비정상적인 인간이 된다. 마흔 줄이 가까워지는데 단 한 번도 사회생활을 할 생각도 결혼을 할 생각도 없이 그저 편의점에 부품이었던 그녀를, 사람들은 점점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정상 세계는 대단히 강제적이라서 이물질은 조용히 삭제된다. 정통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처리된다.

그런가? 그래서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치지 않으면 정상인 사람들에게 삭제된다.

가족이 왜 그렇게 나를 고쳐주려고 하는지, 겨우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P.98>


>> 바틀비의 저항

필경사 바틀비와 이 책이 닮았다고 생각한 것은 이쯤에서였다. 바틀비는 필경사일을 하기만 원했다. 다른것들은 필요가 없었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저 필경일외의 일은 하지 않기를 원했을 뿐인데, "가만히 있을 권리"를 주지 않는 사회. 편의점인간의 후루쿠라씨는 현대판 바틀비가 아닐까.

하지만 바틀비가 오로지 자신의 세계안에 있길 바란 인물이라면 적어도 후루쿠라는 조금은 '사회와 친해져보고자 한' 바틀비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선사시대에 사냥할 능력이 없어 무리에서 도태된 남자. 시라하씨를 만난다. 그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나이많은 남성으로 사회부적응자이다. 그 역시도 사회에서는 쓸모없는 부품이었다. 그는 후루쿠라의 집에서 취식하면서 겉으로나마 사회에 적응한 모습으로 보이길 원하는 그녀를 잠시나마 채워준 인물이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척 함으로써 그 나이 먹도록 결혼 생각이 없었다는 것에 대한 방어막이 되어준 남자. 그녀에게 시라하씨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는 그리고 시라하씨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상황에 떠밀려 편의점을 그만두게 된다. 결혼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결혼퇴사를 하게 된 것이다.

18년 동안 그만두는 사람을 몇 명이나 보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빈틈은 메워져버린다. 내가 없어진 자리도 눈 깜짝할 사이에 충원되고, 편의점은 내일부터 전과 똑같이 굴러갈 것이다. <P.168>


일을 할 생각이 없는 시라하는 그녀가 다른 일을 하길 원한다. 좀 더 전문직을 갖길 원한다. 이토록이나 사회적응자처럼 보일 수 있도록 해주는 그를 위해 그녀가 할 일은 새로운 전문직으로의 취직이었던 것일까?


"몸속에 편의점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와서 멈추질 않아요. 나는 이 목소리를 듣기 위해 태어났어요."<P.188>

어쩌면 작가는 그저 현대사회의 괴팍함을 말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는 책을 몇 페이지 넘긴 순간부터 그녀는 또 다른 바틀비라는 것에 꽂혀서 책을 읽었다. 도대체 사회는 왜 바틀비가 죽는 것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것일까. 단순히 교체가 가능한 부품을 왜 그렇게 정성 들여 내 쫓아 버리는 것일까.

정상적인 것은 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왜 사람들은 잉여인간에 대하여, 잉여에 대해서 그토록 강박적으로 부정적인 관념을 갖게 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녀는 왜 편의점의 부품이길 원했던 것일까. 생각해 볼 것들이 많은 책이었다. 사실 신간을 읽기 꺼려하는 나에게 이런 책들은 신선한 울림을 준다. 고전속에서 현대를 찾는 것과는 또 다른 생동성이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 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 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관계적 상태에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한병철_피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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