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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평점 :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그렇더라도 나는 이 가을에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술술 읽히는 책 말고, 읽다가 자꾸만 덮어지는 그런 책을 골라 읽을 것이다. 좋은 책이란 물론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다.그러나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 정말 이 책에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한다.
황현산 선생 최초의 산문집이라고 하는데 칼럼을 모아 놓은 책이라 대부분 서너 페이지의 짧은 글들이다. 좋은 시집을 읽을 때에 단숨에 읽을 수 없고, 매 행이 또는 매 연이 끝날때마다 멈추게 되는 것처럼, 매번 산문 한편을 읽을 때마다 자꾸 덮게 되고 먼 곳을 쳐다보게 한다. 심지어 어떤 글은 읽고나서 또 다른 한편을 읽으면 그 감정이 희석될까봐 일부러 책을 덮고 다음 날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 분량이 많지 않음에도 다 읽는데 꽤 오래 걸렸다.
읽는 내내 나는 작가의 깊은 성찰에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감탄했고, 시대를 꿰뚫는 혜안에 고개를 자꾸 끄덕이기도 했다. 가끔은 작가의 안타까움에 공감해 한숨이 쉬어지기도 하고, 또 가끔은 시대를 또는 우리나라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같이 미소를 지어 보기도 했다.
3부로 되어있는데 개인적으로는 1부가 제일 좋고, 3부가 그리고 2부는 좀 아쉬웠다. 적어도 이 책에 실린 선생의 글은 짧을수록 더 좋은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수첩에 옮겨 쓴 글>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 만한 시간이 현재 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 현재가 두텁다는 말은 뭘까? 나의 현재는 어느 정도의 과거까지 포함하고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은 사람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 납골당이나 묘지가 들어온다면 동네사람들은 아주 잘 뭉친다. 우리 동네에 들어온다면 나는 과연?
대학에 입학한 남학생들이 한두 해를 방황 속에 허송하다가 '복학생 아저씨'가 되고 나서야 공부에 전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군대 생활이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군대 문제가 해결되기 전가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 나도 군대가기 전까지 '허송'했고 군대를 늦게 갔다온 덕에 학점이 별로 안좋다. 나도 그냥 군대가 사람을 만든 줄 알았고, 그냥 쉽게 그런 말을 진리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청춘이라는게 안그래도 정해지지 않은게 많아 근심도 많은 때이다. 갔다오기전까지 한국 남자들에게 커다란 물음표 일수밖에 없는 군대문제에 대한 대단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 쓰는 사람이 된다.
-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하는 나이지만 글을 쓰는 것이 게을러지고 있다. 다시 시작하고 다시 기억하자.
Some write to remember, Some write to forget!
외국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효과는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이 삶의 안팎에 퍼져 있으나 그것을 의식한 사람은 적다. 그 효과가 어디서 오는지 아는 사람은 더욱 적다. 불어불문학과에서 무엇을 공부하는지 설명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 요사이엔 국문학과도 없앤다는 말이 나온다. 참... 우리나라에는 경영학도들만 필요한 걸까? 그건 아닐텐데...
지금 어떤 사람들이 학생들의 교과서에서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써서 민주주의에 선을 그으려한다. 자유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말이 이 땅에서 자유를 억압한 적은 없지만,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말은 민주주의도 자유도 억압했다. 이를테면 '한국적 민주주의'가 그렇다.
- 어린 시절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 참 많이 들어봤다. 가끔씩 들려오던 북한의 "우리식~"이란 구호가 본질 보다는 '우리식'에 힘을 주어 북한 통치자의 사정에 맞게 갖다 썼던것 만큼 '한국식'도 그렇게 편리한 도구였던 것 같다. 비교적 최근에는 청와대 대변인이 '한국식 정서'를 참 잘도 이용해 먹었다. 참 유용한 표현일쎄 '한국적', '한국식'....
그러나, 가령 신동엽 시인이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라고 외쳤을 때, 거기에서 허위의 언행과 빈 관념을 배척하고 진실한 실천과 구체적 희망을 끌어안으려는 의지를 읽어내는 한 젊은이가 그 속에 키질을 하는 한 농부의 감정이 어떻게 스며 있으며 이 감정이 저 의지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끝내 감지하지 못한다면 적지않게 섭섭한 일인 것도 사실이다.
- 레미제라블을 읽으며 미리엘 주교에 대해, 워털루 전투와 파리 하수도에 대해 각각 100페이지 내외로 서술한 저자의 의도가 궁금했었다. 그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다. 빅토르 위고는 자신의 작품이 오랫동안 살아 남을 것이라 생각했고 후세 사람들이 읽을 때 그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라고 이런 긴 잔소리를 덧붙인 것이 아닐까? 응축된 시만 읽었을 때는 다소 오해하고 있었는데 이 해석을 읽고 나서야 시골마당에서 키질을 하는 농부의 주름진 얼굴이 떠오르며 그 농가적 배경이 제대로 읽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