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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런 글은 본 적이 없다. 시간이 없거나 이 책을 다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글만 읽어도 좋을듯. 강렬하다."<한번 더 읽기를 바라며 쓰는 글>에 대한 나의 메모.
작가 김연수는 생각의 깊이가 남달라 가슴을 크게 울리는 작가는 아니지만 재치있는 산문을 잘 쓰는 사람인 것 같다. 소설<원더보이>를 읽을 때에는 세세한 70,80년대 풍경 묘사에 "그땐 그랬었지"하는 생각을 하게 했는데 이 글은 주로 현재를 사는 우리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다시봐도 제목을 참 잘 지은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기라고 말한다.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직 살아있고 아직도 휴전상태인 우리나라에선 특히 더 이기라고 가르치며, 이기는 것의 미덕을 심하게 강조하는 것 같다. 하지만 모두가 이기면 지는 사람은 없나? 가끔은 win-win이라 하기도 하고 상생이란 말을 쓰기도 하지만 마음속 바탕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이런 말들은 좀 그렇다. 윈윈이라고 해도 협상이나 계약이 끝났을 때 집에와서 아쉬움이나 속은 것 같은 기분에 이불속에서 발길질을 해대는 누군가는 분명 있지 않을까? 작가는 그냥 지지않은 것으로 끝나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고 있다. 승패가 명확해지는 축구 같은 운동보다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작가의 건강하고 멋진 결론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각박한 세태라는 말을 한다. 이런 세상에서 이기는 것은 너무 힘들고, 적당히 져주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면 지지않는 선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정리해 보는 것은 또 어떨까?
수첩에 적은 내용은 아니지만 카페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커피값에 따라 구성원이 달라지고 결국에는 매상도 달라진다는 내용이 흥미로웠다. 커피값이 비싸면 예쁘게 잘 차려입은 '언니'들이 주로 오게되고 그 언니들을 따라 젊은 남자들이 들어온단다. 그러나 3천원 이하로 팔면 노스페이스 등의 검정 등산 자켓을 입은 '아저씨'들이 오기 시작하고 그들이 큰 소리로 전화통화라도 하기 시작하면 그 이후로는 언니들이 안오기 시작해 결국 매상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당시 카페에서 그 부분을 읽고 있었고 때마침 나도 문제의 그 '교복' 점퍼를 걸치고 있어서 웃기기도 했고 '커서'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도 해봤다.
<수첩에 옮겨쓴 글>
결국 최고의 삶이란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뜻이다. - 중략- 여름에 할 수 있는 최고의 달리기란 뜨거운 햇살과 서늘한 그늘을 번갈아 가며 지나가는 달리기다. 30도가 넘는 낮에 달린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두 달만 지나도 이제 그런 달리기를 하긴 어려워질 텐데. 최고의 달리기를 하는 건 정말이지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렇다면 최고의 삶도 마찬가지다.
- 내 아버지가 말씀하신 '이야기거리가 많은 인생'과도 닮은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많이 도전해 보고 노력하는 것이 멋진 인생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할만한 인생이야기라 하셨다.
나는 모든 화가와 작가는 보편적인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나에 대해서 그리고섰던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거나 읽은 대가들의 작품은 예외없이 나를, 나 자신의 삶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처럼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동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 아무도 모르는 또는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니고... '있음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소설이라 했던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기억에 남아 세월이 흐른 후에도 다시 새로운 판으로 찍혀 나오는 책들 그런 것이 고전일 것이다. 고전 작품들은 그래서 대단히 사적인 것들인 것이다.
달리기에도 질문이 있다면, 그건 "달리고 싶어서 달린건 언제가 마지막인가?"가 될 듯하다. ...... 전자를 '달리기'라고, 후자를 '후달리기'라고 하자. ...... 만약 나의 달리기가 후달리기 같은 것이었다면, 나는 아마 정신분열에 시달렸을 것이다. ...... 당연히,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후달리기로는 사흘이상 달리기 어렵다. 채찍질을 사흘동안 당한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달리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달리지 않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다.
- 요즘 말로 잘 풀어낸 것 같다. '후달리기'라니...20년쯤 지난 후에 스무살 쯤된 젊은이들에게도 이 단어의 뜻이 쉽게 이해될 지는 잘 모르겠다. 속어라는 것이 시절이 바뀌며 많이들 사라지지만 또 '정규'언어에 편입되기도 하며 가끔씩은 여러 세대를 거쳐 살아남기도 하니까. 하여간 요즘 21세기 초반에는 참 잘 고른 표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