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 - 정치의 도구가 된 세계사, 그 비틀린 기록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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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를 읽었다. 꽤 오래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명절 연휴에 이르러서야 다 읽게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주제였기 때문에 읽기가 많이 버거웠다. 때로는 이렇게 조금 어려운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불편함이 오히려 독서를 성장시키게 하니 말이다. 책 내용을 살펴보자. 
 

​모든 인간이 똑같은 기억과 생각을 가진 사회는 권력자에게는 유토피아이나 국민들에게는 디스토피아다. 국민을 길들이려는 권력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명분을 민족의 신성한 역사와 동일시하며 국민들의 동참을 요구한다. 이로 인해 권력자들은 종종 역사 교과서를 고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는데, 이 역시 국민을 변하지 않은 지지층으로 만드는 데 방해되는 기억을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물론 어떤 권력자들은 1~2년 뒤 총선에서 유권자가 될 고학년들을 친정부 성향으로 만들기 위해 역사 교육 내용을 급격하게 바꾸기도 한다). 

이 전 정권에서도 국정교과서라는 이름으로 역사 교과서를 통일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참 어리석은 짓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눈. 즉 역사관은 다양한 것이 상식이며, 절대 획일화될 수 없다. 저자는 권력자가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명분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 과거 잘못된 그리고 부당한 역사적 사실이 현재의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더 소름 끼치는 일은 그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은 아직 의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고, 사고의 완전함이 완성되기 이 전이라는 점이다. 이런 학생들에게 획일화된 역사관을 심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당이 마오쩌둥을 보호하는 이유는 공산당의 생존을 위해 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시자이며 그의 이념은 곧 국가 이념이다. (..) 그와 그의 처세를 부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하다. 공산당 일당지배의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모택동의 잘못된 판단으로 벌어진 대량 살상과 문화대혁명이라는 가혹한 계급투쟁으로 중국 전체를 병들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중국은 모택동을 부정하지 못한다. 저자의 지적처럼 자가당착에 빠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덩샤오핑, 시진핑도 모택동을 비판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결국 당이 선택한 방법은 '침묵의 강요'였다. 마오쩌둥 사후 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을 포함한 중국 현대사에 대한 연구와 토론을 통제했다. 역사교과서는 대약진운동 실패의 원인이 가뭄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렸고, 문화대혁명에 관해 당의 공식적인 평가와 다른 견해를 가진 학자들을 탄압했다. (...) 당은 더 이상의 연구를 막기 위해 마오쩌둥 시대의 기록물을 비밀로 지정해 학자들의 접근을 아예 차단해버렸다.

국가 주도로 치밀하게 과거 역사를 통제한다.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명분을 위해서 말이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마오쩌둥 시대의 수난을 잊고 오히려 그를 국부 이상으로 찬양하고 있다. 수많은 중국인들을 굶주려 죽게 하고 사회주의 이념의 광기로 중국인들끼리 서로 증오하게 만들었던 최악의 독재자가 오늘날 중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현실은 모순 그 자체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기억상실증 전략이 성공적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마오쩌둥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라 이미 중국의 절받을 넘었고, 이들은 공산당에 의해 은폐된 역사를 배웠다. 

​이런 흐름이라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모택동의 과오는 희미해 질 것이며, 그의 위상은 더욱 견고해 질 것이다. 

"마오쩌둥은 치욕의 100년을 끝냈다. 비록 말년에 잘못 판단한 것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중국도 없었을 것이다."

문화대혁명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

두산백과 > 지역 > 아시아 > 중국 > 중국일반

출처 : 지식백과

 
 

​사실 ISIS가 진정 원하는 것은 7세기 이슬람의 순수성 복원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적, 심리적 환경을 조성하기를 원한다. 이들은 공포와 혼란 불만과 적개심으로 끓어오르는 물에 이성과 지성이 세척되어 모든 사람들이 ISIS의 추종자로 표백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저자는 IS가 이슬람의 순수성 회복을 명분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입증하려 하지만, 그 속내는 현실세계의 불만과 적개심을 교묘히 이용해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이유로 학자들은 이 청년들의 심리 상태를 분석했는데, 그 결과는 종종 '자유로부터의 도피'현상으로 요약된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자유의 짐을 감당하지 못하고 복종에 의지한 채 심리적 안정을 얻는 인간의 본성을 지적한 바 있다. 과거에 비해 사람들은 매우 자유로워졌지만, 동시에 고독한 존재가 되었다.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적극적 자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겨주었다. 인간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해왔으나, 정작 자유라는 열매는 달면서도 씁쓸한 것이었다. 이러한 자유의 양면성을 인식한 프롬은 1941년 명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이 자유를 버리고 나치즘에 의지했던 기이한 현상을 같은 이유로 설명했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ISIS에 가담한 서구의 청년들이 이와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분석한다.

어쩌면 탈북한 주민들이 느끼는 심리가 이와 같지 않을까. 자유가 없는 북에 살다 정 반대 상황인 남한에 정착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프롬의 지적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군중들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 과거에 비해 자유로워졌지만 동시에 고독하다. 인간의 한계라고 해석해야 하는 걸까. 반대로 이렇게 자유를 만끽하다 통제된 상황에 처해진다면 그 상실감은 오히려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IS에 자신을 내던지는 서구 청년들도 비슷한 심리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일한 전대미문의 자유를 두려워하는 청년들도 있다. 다원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은 희미해졌다. 공동체의 연대의식은 느슨해지고 사회는 파편화되는데,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은 고독과 불안을 느끼게 된다. 특히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의지가 약한 청년들은 강력한 사회체제가 자신들을 이끌어주기를 갈망한다."

묘하게 군 생활이 떠올랐다. 군 시절 어찌 보면 참 편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고, 적절한 보상(?)도 주어지니 나름대로 지낼만했고, 오히려 수동적인 환경에 적응되어 편하게만 느껴졌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이슬람국가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인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 ISIS로 일컬어지기도 함)가 2014년 6월...

시사/상식/종합 > 시사상식사전

출처 : 지식백과

 

​20세기에 세계는 이미 반지성의 시대를 경험했고, 이를 통해 한나 아렌트는 악과 무념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위기의 시대에 지성인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들이 대중을 무념으로 이끄는 권력의 시도에 용기 있게 맞서길 희망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과거를 지배하려는 정권에 불편함을 주는 지성인들은 블랙리스트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각종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이다. 가만있자. 그러면 우리가 얼마 전까지 겪었던 또 지금 겪고 있는 상황들은 권력이 역사를 지배하려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찌꺼기들이 아닐까.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

작가
윤상욱
출판
시공사
발매
2018.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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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맛에 맞는 역사 >


​입맛에 맞는 역사 앞에 '권력자' 가 빠졌다. 권력에 정당성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념과 결이 맞는 역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 반대라면 고쳐서라도 자신 위주로 재 편집한다. 권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그래서 참 어렵고 무섭다. 일개의 권력자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권력과 국민들을 지배하려 하고, 자신들의 편을 더 많이 생산하려 한다. 역사교육을 통해서 말이다. 비단 역사가 권력투쟁에만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국제관계-가까이는 한일 관계가 그렇지 않은가. 아베 정권은 끝까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과는커녕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오히려 이전 정권에서 자행된 졸속 합의를 들먹이며, 논쟁하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깨어있어야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특히 역사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늘 속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허탈해진 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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