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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시월의 밤
로저 젤라즈니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작품은 하드보일드 풍 + 크틀후 신화를 비롯한 레퍼런스 + 소설을 여러 번 읽게 만드는 힘인 에피소드이 세개가 돋보인다.
로저 젤라즈니가, 마지막으로 쓴 작품.
이것 만으로도 보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드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 글을 읽지 않고 이 책을 선택할 것이다. 이 글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상으로 썼다. 로저 젤라즈니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니까. 궁금하면 검색해 보시길.
나는 이 작품을 구성하는 방정식이 이렇다고 본다.
+ 하드보일드 풍 구성과 문체가 보여주는 장점
+ 미국의 집단무의식을 배경으로 한 임장감
이에 대해 하나하나 검증해나가고자 한다.
1) 하드보일드 풍 구성과 문체가 도대체 뭐냐?
하드보일드에 간략히 서머라이즈 하면 이렇다.
대사와 행동, 외면 묘사, 객관적인 내면 서술 등으로 사건과 상황을 쌓아올리는 문체.
쉽게 말해, 작가의 개입, 설교, 해설(흔히 어린이용 특수촬영 드라마인 <스필반>이나 <슈퍼 전대 시리즈> 같은 데서 신무기가 등장할 때 나오는 나레이션 같은) 같은 것을 배제하고, 간결하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하드보일드 문체는 사실 로저 젤라즈니의 특기다.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대화가 돋보인다.
각각의 동물들, 게임 참가자라 불리는 등장동물들이 이야기의 초점이다. 이 동물들의 대화가 좋다. 불필요한 것이 전혀 없는 간결하고 위트있는 대화와 유머가 일품이다.
이야기는 특히 스너프의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로스 맥도널드 이후로 초점인물에게만(이 경우 초점동물이지만) 시야가 한정되어 전체 그림의 조각이 하나 하나 전달되어 마지막에 큰 그림이 팡, 하고 떠오르는 것 또한 전형적인 하드보일드(이 경우 장르)의 방식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 게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인물이 어떤 관계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자연스럽게 스너프의 일상을 쫒아가다보면 어느샌가 이 게임에 납득하고 스릴을 느끼게 된다. 이는 하드보일드 풍 구성의 장점이다.
이러한 방식의 좋은 점은, 독자가 한꺼번에 정보를 받아들여 소화불량을 일으키지 않아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배경의 큰 정보를 소화시킨다는 점과, 이야기를 다 읽은 순간 등장인물에 더없이 애착이 간다는 점이다.
2) 미국의 집단무의식
어렵게 써 놓았지만, 사실은 간단하다.
이 작품은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은 미국의 대중문화다.
스티븐 킹이 뛰어난 문체와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미국 만큼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도, 스티븐 킹이 미국 대중문화의 배경 하에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은 역사가 짧은 나라다. 미국인들의 자아를 구성하는 핵심에는 전해져 내려오고 공유되어 온 전통이나 신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나 소설, 만화 등의 대중문화가 만들어 낸 이미지가 존재한다.
임장감은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자아와 기억을 구성하는 성상(Icon)에는 개인적 체험 안에 잠재된 문화나 행동양식이 아닌, 텔레비전이나 은막을 통해 체험한 대중문화가 있다.
이 작품은 그 이미지를 이용해 만들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동물이 아닌) 자들은 모두 실제로 존재했거나 대중작품으로 존재했거나 작품 속의 유형들이다. 이 작품의 배경과 등장인물의 행동목적은 H. P. 러브크래프트의 작품군의 배경과 주제를 바탕으로 후세 작가들이 재구성한 '크툴루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쉽게 말해, 이 작품은 캔버스도 오브젝트도 다 미국인의 기억 속에 있는 이미지들이다. 문체도 엄밀히 말하면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럼 단순히 패러디물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이 작품의 힘은, 이러한 인물들과 동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비틀고 은폐하고 암시해서, 기억을 자극하게 하고, 이들이 살아 있는 것 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만들고, 마치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처럼 느끼게 하는 임장감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읽는 순간 임장감(Reality)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
너무도 당연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느끼고 상황과 상호작용한다. 한 때 범람했던 유행하는 영화의 장면들을 잔뜩 모아 잡탕으로 만든 (무섭지 않은 '무서운 영화'라던가) 싸구려 패러디 영화랑은 그 질이 다르다.
패러디에 기대고 있는 작품이 단순히 패러디를 위한 패러디가 되면, 아무런 내용도 없는 껍데기로 전락하거나 아는 사람만 아는 작품이 되어버린다. 단순한 조건반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작품은 다르다. 어디까지 레퍼런스는 레퍼런스. 여기에 기대지 않는다.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3) 결론.
봐라.
그게 결론이다.
이 작품은 절대 읽고 손해볼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을 통해 수면 아래에 감추어진 레퍼런스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질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잠재력이 있다. 이 잠재력의 근원에는 근대 이후 100년 간의 대중문화라는 서사적 흐름이 있다.
그 흐름 위로 한번 올라 타 봐보길 권유한다.
재미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