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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건축의 건, 'ㄱ‘자도 모른다. 이 책을 읽은 지금조차 건축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 말할 입장이 아니다.

올해 들어 뒷골목 기행이나 시시한 것들의 아름다움, 등등의 책을 읽으며 삐뚤삐뚤하고 울퉁불퉁한 것들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입장이지만 전문 건축가의 작정하고 만든 건축물에 대해서는 여전히 문외한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승효상이라는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건물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이따금 볼일을 보러 그 곳에 들를 때면 짙은 밤색의 녹슨 깡통 같은 커다란 네모가 나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본다.

녹슨 깡통이라 말하는 이유는 건물의 외벽이 무광의 녹이 예술적으로 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벨벳처럼 아름답고 때로는 녹물이 내 피부에 스며들지는 않을까 자못 아슬아슬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 건물을 따라 들어가는 도로변에는 가로등조차 밤색의 녹슨 기둥이다.  마치 넥타이와 가방을 같은 색으로 신경 써서 맞춰 입은 근사한 신사를 보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겉이 멋들어지다고 개인적인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과연 이 건축물이 효율적인 공간인가 가끔은 의구심이 일기도 했다.

건물 전체는 쓸데없이 노는 공간이 많고 미로처럼 복잡하고 창에 인색한 사방 네모의 단면들이 냉정하고 무심하게 보여 도무지 정이 가질 않았다.

한쪽의 계단 폭은 지나치게 넓어 보폭의 박자를 맞추기도 어렵고 오르고 내릴 때마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리길이가 짧은 내가 문제인가, 아니면 인생을 좀 더 찬찬히 생각하며 느리게 살라는 건축가의 배려인가......이런 불만을 속으로 삭히던 차에 승효상의 건축에 대한 비평서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시 내가 생각하던 부분들이 그 책에 들어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심정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다.

‘감각의 단면’은 기대치도 않았던 많은 부분에서 내게 즐거움을 안겨준 책이다.

왼편은 한글이고 오른편은 영어로 기술되어 있다. 전문가들이나 읽는 책이란 뜻인가, 하면서도 독자들 기죽이려고 영어로 깔았나? 투덜거리며 읽다보니 저자는 영어로 글을 쓰고 번역은 다른 사람이 했다.

애초에 영문으로 쓴 책이라면 문장은 별로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읽다가 놀랐다. 알곡처럼 잔잔하고 단단한 문장들이 섬세하게 배려되어 있다.

‘네가 모르는 것과 아는 척 지나쳤던 것들을 재미나게 알려주마. 잘 들어봐’하며 어느 한 가지도 은근슬쩍 지나가는 법이 없다.  

“수백당의 벽이 명분 없이 싸우는 무사들이고,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라면 수평요소인 바닥은 풍부한 표정을 담고 있다”

페이지 가득 들어있는 문장들이 고집스런 현학에 물들어 제 멋대로 잘난 체를 하지 않고 다양한 은유를 사용하여 전반적으로 문학적으로 읽혀진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힌다.

잔재미 못지않게 승효상의 건축물 이상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바닥과 벽과 평면을 지닌 건물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다.

“건축은 삶의 징표인 동시에 죽음의 징표이다. 수천년동안 서 있도록, 불멸을 상징하도록 지어놓은 건축은 사실은 죽음을 전제하고 세워져 있는 것이다. 건축의 폐허는 삶과 죽음의 주기적인 교차를 웅변하는 것이다. 문학의 신화적 기원과 마찬가지로 기념비적인 건축도 주죽음을 미루는 장치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소설가 이병주가 남긴 문장 한 대목이 떠올랐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많은 사람들이 100년 후에는 누구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뻔한 내용이지만 사람은 유한하다. 지금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도 새로운 후대가 주인이 된 건축물은 굳건하게 남는다. 오래된 유적지에 가면 그 부분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저자의 날카롭고 해박한 미학적 시선이 우리가 흔히 보고 지나는 많은 것들의 덜미를 붙잡아 차근차근 해석해준다.

페이지 중간에 삽입된 사진이나 그림도 꽤나 매력이 있다. 정선의 금강전도, 자코메티의 작품, 김정호의 지도, 그 모든 부분에 굵직하고 해박한 설명이 미어터지게 붙어 있으니 보면 볼수록 배가 부르다.

사진으로 인용된 김환기의 그 유명한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보며 예전에는 작은 네모 안에 든 동그라미의 나열이 인식이나 규범에(네모) 든 인간(동그라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건축물에 들어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승효상의 건축물에 대한 얄팍한 관심보다 저자의 식견에 찬탄하며 앞으로도 그의 해석이 깃든 많은 저작물을 읽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물론 나는 아직도 건축의 ‘건’자도 모른다.

지금도 승효상이 지은 ‘아시아 출판센터’에 헌책 사러 갈 때면 폭이 넓은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를 때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감각의 단면’을 읽은 후의 나는 사방 좌우를 훑어가며 승효상의 건축물을 다시금 새겨본다.

감각적인 면들이 새롭게 보인다. 저자 배형민 덕분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속에서·솟구쳐 오르는 불만을 삭힌다.

계단이 불편한 것은 내 다리가 짧아서 문제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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캥거루가 있는 사막
해이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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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 나가면 예전보다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

외따로 떨어져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수속하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놀러가는 게 아니로구나, 하고  혼자 짐작해버린다. 

그들이 돌아올 때는 그 손에 뭐를 쥐고 올까.

공항에 나가 '그들'을 볼 때면 해이수의 소설이 생각나곤 했다.

호주라는 낯선 이국에서 지내온 젊은이의 모습이 이 책에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 책은 매우, 신선한 작품집이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었다.

단편 소설집을 사면 다 읽기는 힘들었지만 이건 어쩐 일인지 후루룩 읽었다.

하나하나가 같지 않고 또 다르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중 '환원기'는 제일 품격 높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이야기가 조직되고 흐르는 것이 물처럼 유연하다.

해이수라는 사람,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작품이 환원기라면,

등단작 '캥거루...'는 무엇보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쥐고 있는 작품이다.

다른 작품에 비해 소품이라 할 수 있는 '어느 서늘한 하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류이다.

나는, 자신이 알면서도 자꾸만 함정에 빠지는 인간 부류들을 사랑한다.

이 작가의 말대로 '산다는 건 전쟁이 아니겠지만'  나는, 때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러모로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낯설다는 것도 좋지만 내가 선뜻 동의할 수 있는 소설을 읽으면 기분이 충만해진다.

맞아, 맞아, 이런 거야, 하면서 백전백패 하는 내 삶에 다시한번 대들 용기를 가져본다.

해이수의 소설이 내게 그것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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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무-책임 사랑은 무한책임
조석율 지음, 송영의 그림 / 이소북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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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이 꽃그림과 새그림을 좋아해서 그런 종류의 책들을 비싼 값에 사들이곤 했었다.
그런데 이 책의 삽화는 그동안 내가 틈틈히 보던 외국 꽃일러스트 집이나 삽화집 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우리 야생화가 다소 거칠지만 시원스런 붓터치로 표현되어 있었고 알기 쉽게 이름을 달고 있었다. 세밀화보다 야생화의 생래적인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듯하였다. 찔레와 벌개미취, 고마리...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우리의 귀한 꽃들이 시집 가득히 수 놓아져 있으니 자꾸만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짧은 시들이 표현하는 바, 우리의 평범하고 무심한 일상속에 사랑이 있음을 시인은 단정하고 부드럽게 노래한다. 그가 표현하는 사랑은 치근거리지 않고 구질스럽지 않다. 봄날의 미풍같이.... 벌판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야생화처럼 당연하고 친근하다. 친구들에게 이 책을 보여주니 대부분이 탐을 낸다. 신세진 이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이들의 두번째 책도 기다려진다. 왜 저자와 그림 그린이의 사진이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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