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
김지우 지음 / 홍익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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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어떤 이는 에세이나 시를 통해 달보드레한 감성의 바다에 순풍에 돛단듯 노를 젓는 이들도 있는가하면, 난해한 학술서적을 붙잡고 폭풍우치는 바다를 거칠게 거슬러가는 듯이 항해하며 지성의 고배를 마시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독서가 단지 과시용으로만 사용된다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일게다. 단순히 내가 이런 책도 읽는 사람이라는 지적허영에 도취되는 것 역시 sns에서 명품백을 사거나 차를 사면서 타인의 인정을 원하는 왜곡된 욕구와 별다른 것이 없으리라. 빼곡히 책장을 채우면서 자신만의 요새를 만든다한들 그런 마음으로는 활자의 세계에 갇혀 세상을 바로보지 못하는 우물 안의 정저와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 -
소설이란 모름지기 서사를 가진 문학작품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인물, 배경, 사건 이런 요소들을 설명하는 것은 뒤로 제쳐두고 과연 어떤 소설이 좋은 것이냐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좋은 소설은 훌륭한 소설가에게서 탄생된다. 소설가라는 직업은 그렇다면 어떤 직업인 것일까? 국문과를 나오고 신춘문예에 이름을 날리고서야 그 성배를 취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문인들의 등용문이어왔다. 왜 필자가 이어왔다 라는 표현을 썼는지 짐작이 가는가? 요즘 소설가라는 직업은 더이상 문학전문가들의 창작물의 단계를 넘어서게 되었다. 예전에 어떤 원전기술자가 현정부의 원전정책을 비관하며 쓴 짤막한 소설을 읽어보면서 문학과 무관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소설가로서의 면모가 당연히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인간본성에 대한 촌철살인의 부분을 가장 좋은 소설의 조미료라고 생각한다. 아아,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 인간들이 만드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그것이 잘 드러났다면 나는 그 누가 쓴 소설이든 박수를 쳐주고 싶다는 것이다. 필자는 아기자기한 에세이도 좋지만 때로는 세상의 추악한 것들을 유머러스하게 다루며 우리에게 찔림을 주는 문학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문학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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