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내리는 날
김한수 지음 / 창비 / 199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봄비 내리는 날>에 실려 있는 3개의 소설(성장, 봄비 내리는 날, 그 무더웠던 여름날의 꿈)은 87년에서 92년까지의 사회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1964년생인 작가 김한수가 청년기를 보낸 그 시절은 1966년생인 나의 언니가 살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초등학생 어린 나의 정서를 봄비처럼 적셔, 결국 노동운동으로 이끌었던 풍경이었다. 소설의 주인공들의 그러했듯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불편한 감정이 들었던 것은, 신랄하게 묘사된 사회상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자꾸 들추어냈기 때문이다.
   <성장>의 주인공 창진이 가난 때문에 결국 학업을 포기했듯 나의 언니도 입시원서 살 돈이 없어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80% 이상이 대학을 가고, 공부 못해도 돈만 내면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수두룩한 요즘. 그나마도 대학을 못가는 20%의 박탈감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대학을 나왔대도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는 지금이 더 나아진 걸까. 
   치솟는 전세값에 절망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방 두칸에서 방 한칸으로, 다시 변두리로 밀려났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다. 올해 일흔 아홉이 되시는 우리 어머니는 평생을 노동하며 살아오셨지만 한 평의 땅도 갖지 못하고 계시다. 자기 집을 갖는 게 안정된 삶의 척도라 여기시는 어머니에겐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내가 아직도 걱정꺼리다. 작년 어버이날에 마트에서 파는 저렴한 안동간고등어를 갖고 갔더니 “이런 거 사오지 말고 돈 모아서 집사라” 하신다. “TV에서 봤더니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학교 가서도 차별 받는단다”는 정보도 제공하신다. “엄마, 내가 정치 잘 해서 모든 아파트를 임대아파트로 바꿀 테니까 걱정하지마”라고 대답하자, 한심한 듯 쳐다보며 헛웃음을 치신다.

   주인공들이 그러했듯 나도 어린 시절엔 ‘어머니처럼 살진 않겠다’고 다짐하며 공부를 했고, 어머니도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억척스레 이를 악물며 학비를 댔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대를 배신하게 만들었던 건 어머니의 삶이었다. 내 나이 스무 살,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무수한 노동자들의 가난이 결코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님을 학습했다. 아니 유년시절부터 삶으로 이미 그 진리를 깨닫고 있었던 거다. 당장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지언정, 마침내 어머니의 세상을 열 수 있는 길을 걷자고 작정해 버렸다. 
   <그 무더웠던 여름날의 꿈>의 주인공 덕배가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살아온 세월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세상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과 그 속에서의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고 ‘막연하게나마 혼자서 잘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듯이. 
   800만 비정규직, 극단적 양극화의 시대, 자살률 1위… 단 하루도 살아낼 수 없는 막막함에 자살을 택했던 <봄비 내리던 날>의 강대씩 같은 이들이 오늘도 넘쳐흐른다. 강대씩을 죽게 만들었던 부동산 투기로 부자가 된 이들은 이제 장관에 취임한다. 
   이 책이 나온 지 15년, 현상적으로 임금 20만원이 100만원으로 바뀌었지만 본질은 그대로다. 그래서 창진과 덕배가 그러했듯 현실에 눈뜬 수많은 노동자들이 투쟁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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