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와 질문들
-『소라게 살이』 Hermit Crab-ism
빈 소라껍질을 은둔지로 삼는 소라게(Hermit Crab)에 비유하여 자신의 작업을 작가는 '소라게 살이'(Hermit Crab-ism)라 명명했다. 지금 통과해야 하는 시간에 압도당하여 꼼짝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과거의 한 순간이 불현듯 날아들었다. 미국의 소도시 다섯 곳과 타이베이, 그리고 귀국 후 난지 미술 창작스튜디오에 머물렀던 시간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기록해 놓았다.
익숙하지 않은 도시의 이름들을 구글 지도에 검색해가면서 그 시간들을 따라가 본다. 지도를 확대, 축소해가며 나름대로 풍경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눈앞의 풍경 너머로 미지의 장소를 불러낸다. 그곳에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그러나 더 넓게는 자신과 접촉하는 세계를 향한 감수성으로 도시를 읽는 작가가 걷고 있다. 산책길에서 마주친 장면들로부터 도시의 역사적인 배경에 관심 갖게 되고 지금의 모습이 된 사회적인 배경을 탐구하며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작업의 출발점과 진행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작업 노트와도 같다. 행간에서 작업실의 땀 냄새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답을 구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중요할지 모를, 질문들을 제기하는 방식으로서 작업은 이어진다. 레지던시 작업을 거듭하면서 작가의 시선이 주변인들을 향해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산타페 아트 인스티튜트에서의 구조물 설치 작업과 난지 미술 창작스튜디오의 망루 작업이 그러했다.
재현해 놓은 설치작품들을 전시장에서 직접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더불어 소라게의 다음 여정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도. 어딘지 모를 낯선 장소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지도... 작가의 다음 전시 소식이 들려온다면 머뭇거리지 않고 전시장을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