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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또 다른 이름, 시네마 천국 - 비 내리는 필름에 웃고 울고
김승구 지음 / 책과함께 / 2012년 11월
평점 :
18번째 대통령을 뽑는 대선정국의 들뜬 분위기와 달리 연말연시 거리 풍경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대선이후에는 출구를 찾기 힘든 긴 경기불황이 이미 예고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당선된 대통령은 임기 5년이 그 어느 대통령보다 고단할 것이란 예상과 함께) 별 상관없다. 청년실업과 희망퇴직과 임금동결과 감봉과 치솟는 물가 걱정에 들뜬 대선 분위기는 앞으로 닥쳐올 위태로운 삶의 신호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에이, 영화나 한편 때려야겠다.
영화관은 비루하고 부박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효과적인 비용으로 지친 마음결을 위무해주는 고마운 도피처다. 그리고 영화는 그 속에서 잠시 근심걱정을 내려놓고 영화 같은 삶을 꿈꾸게 하는 항우울증 처방이다. 언제나 영화관과 영화는 우리 앞에 그렇게 자리 잡고 있었고, 요즘처럼 미래가 불안하기 짝이 없던 모든 시절에 더욱 그러했다. 70~80년전 일제 치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를 통해 지금보다 더 비참했던 식민지 시절을 버텨가던 영화광들이 있었다. 바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들이다.
<식민지 조선의 또다른 이름, 시네마천국>은 제목 그대로 일제 강점기 조선의 민중들과 영화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1940년대 조선의 전 국토가 탄광 붐을 맞아 몸살을 앓았던 것처럼, 빼앗긴 나라와 식민지 2등 국민의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탈주하려는 또 다른 몸짓은 활동사진에 열광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인 영화가 대중에게 어떤 방식으로 수용되고 어떤 의미로 이해되었는지, 그리고 영화가 사회 문화적인 조건과 어떤 관련성을 띠었는지에 대해 탐구”하고자 책을 엮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동안의 일제시대 영화 연구가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영화사적 접근이었다면 맥락을 추스르는 컨텍스트의 영역을 포함해 당시 대중의 욕망을 좆아보겠다는 저술 목적이 덧붙여진다.
프롤로그의 다소 딱딱한 저자의 말을 거쳐 본문에 들어가면, 언제 책장이 넘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하게 된다. 학문적 접근 방식과 의도건 뭐고 간에(저자에게 살짝 죄송) 당시 신문 기사를 바탕으로 풍부한 텍스트 및 사진 자료들을 근거로 한 영화와 영화인,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영화광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당장 영화관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활동사진 배우들의 연기에 그만 쏙 빠져 자신도 영화배우를 꿈꾸며 신문 고민란에 글을 보냈던 열여덞 견지동 총각의 이야기로 풀어가는 영화광 시대는 흥미진진하다. 유니버셜 영화사가 찍어낸 영화를 독점하던 우미관에 손님을 빼앗기던 단성사가 짝퉁 유니버설 영화를 선전하던 모습이나, 영화 한편 보러 간다는 개념이 영화에 막간 공연에 고등어 한손처럼 사이드 영화까지 끼어 반나절 이상 소요하는 문화생활이었다는 사실이 그렇다.
또 조선의 젤소미나, <임자없는 나룻배>로 식민지 조선의 최고 여자배우라던 문예봉의 ‘모던한’ 외모에 눌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집 없는 천사>의 김신재, <반도의 봄>의 김소영 등 당시 또 다른 여배우들 사진을 보면서 역시 군대는 줄을 살서야 하고, 남녀를 불문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외모는 따로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인도의 발리우드 남자배우들을 보면서 아, 이대근 선생님은 인도에서 태어났으면 국민배우였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이후 다시 내린 비슷한 결론이다.
수동적인 소비층에서 매니아 단계를 거쳐 평론에 이르는 진정한 ‘관객’의 영화평 수준이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유사하다는 것도 재밌었다. 문학평이든 영화평이든 지금보다 오히려 더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신문 영화광고나 홍보, 영화제의 시작(그 당시 조선일보가 영화문화진흥을 위해 그렇게까지 노력했구나 싶었다. 지금과 비교하니 다소 정치하지만, 애잔하다)과 같은 한국영화사의 소품들도 차곡차곡 잘 담겨있다.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라는 문화를 소비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비타민과 같은 책이다. 아, 지금은 소리 소문도 없이 철거돼 없어진 단성사가 사진으로 보니 당시나 없어지기 전이나 똑같구나. 단성사가 그렇게 없어진 걸 다시 생각하면, ‘지금 뭐하자는 걸까요?’가 저절로 입에서 나온다
단성사 매점에서 구워준 오징어 들고 이층 관람석 바로 아래 중간 자리에서 영화나 봤으면 좋겠다. 대한늬우스의 그 성우 분은 지금 뭐하실까? 복합상영관의 푹신한 자리대신 메아리가 울릴 정도로 넓고 춥던 그 영화관에서 최신 돌비시스템으로 보던 그 영화가 그립다. 그때는 어떤 영화든 보고 나와서 일주일은 그 영화에 빠져 있곤 했는데. 그 때 그 감성으로 돌아가고 싶구나….
애니웨이.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고 오늘도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영화와 영화관은 식민지 조선 때나 마찬가지로 천국이다. 시네마천국. 그 천국을 찾는 영화광들을 위한 프리퀼과 같은 책. 一讀을 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