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 독점계약 번역 개정판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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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마디의 구호나 주장보다 한 줄의 ‘팩트’가 중시되는 세상이다. 글이나 주장은 그것이 담고 있는 진실성보다는 외형적인 사실성으로 평가받는다. 외형적 사실에 대한 절대시의 원인은 무엇일까?  한편 이렇게 팩트를 중시하는 경향의 이면에는 주의 주장에  냉소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나는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 이 두 문제를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하고 해결하는 실마리를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리뷰에서는 이와 같은 개인적 의문이 해결되는 과정을 정리해보았다. 


1. 사실에 대한 숭배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선 사실은 주장하지 않고 단지 드러내보일 뿐이라는 사고방식을 살펴보자. 팩트는 주장하지 않는다. 팩트는 공정하고 객관적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팩트가 절대적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에서 사실이 가진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다.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 즉 수용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타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용자의 청각을 자극하는 시끄러운 소리는 여기에 없다. 그저 조용히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냉소주의자에게 사실이 매력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냉소주의자는 자신의 귀를 시끄럽게 하는 주의와 주장을 혐오한다. 심지어 자신의 생각과 같은 것이라도 그것이 주장되는 순간 그것을 혐오한다. 그는 진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생각과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어진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가 확인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의 문제다. 물론 모든 이가 어느 정도는 이러한 태도를 지니고 있지만 냉소주의자에게 이는 절대적 원칙이다. 


 물론 사실이 주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카는 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에서 단순한 사실과 역사적 사실을 구별한다. 수많은 과거의 사실 중에서 역사적 사실이라는 지위를 얻으려면 역사가의 해석을 통과해야 한다.  이는 비단 역사적 사실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학적 사실, 경제학적 사실, 정치학적 사실 역시 그 나름의 해석자의 판단을 통과해야 한다. 냉소주의자가 중시하는 팩트 역시 이런 해석자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사실이 객관적이라는 표현 역시 일면적일 뿐이다. 사실과 가치를 단순한 이분법을 적용해 분리하는 것은 사실과 가치가 서로를 형성한다는 점을 보지 못하게 한다. 카는 제5장 <진보로서의 역사>에서 ‘진리(truth)’라는 단어가 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를 양쪽에 걸쳐 있는 이중적인 개념임을 상기시킨다. 카는 극단적 사실의 세계와 극단적 가치의 세계라는 “양 극단 사이의 어딘가에 역사적 진리의 영역이 놓여져 있다”라고 주장하며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2. 진보적 역사관 거부


 가치에 대한 사실의 우위를 주장으로부터 더 나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냉소주의적 역사관 역시 파생되어 나온다. 어떤 이들은 과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인간사회는 언제나 똑같이 어리석다는 나름의 진리를 펼치기도 한다. 카가 본 책의 제2판을 낼 당시에도 역사의 진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사적 사건들이 많았다. 핵 멸망의 위협이 동반된 냉전, 산업국가들을 황폐화시키는 경제위기, 폭력과 테러리즘 등이 낙관주의를 순진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진보적 역사관은 낙관주의 외에도 더 깊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진보의 출발점과 최종점을 어디로 설정할 것이며 진보의 본질적인 내용은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카는 진보적 역사관이 최종 목적을 설정하는 등의 법칙화를 이루는 것을 언급하는데, 이 경우 위에서 말한 극단적 가치의 세계에 함몰되어버리는 위험이 존재하며, 따라서 냉소주의자의 냉소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에 대해 카는 5장에서 역사를 단순히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아닌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로 재차 정의하며 이 문제에 답하고 있다. 3장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에서 말하듯 사회과학자와 역사가는 “자신의 연구대상에 연루”되며 여기서 제기되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역사가의 과거에 대한 해석은 “새로운 목표들이 서서히 출현함에 따라서 발전하게 된다.”(5장)  즉 역사가에게 있어 본질적인 내용이나 최종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적 역사관은 고정된 하나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서술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카는 오로지 정치적인 해석에 집중했던 과거의 역사서술이 현대로 오면서 점점 경제적, 사회적 해석을 도입하면서 발전해간 것을 지적한다. 이처럼 역사가는 예전의 해석을 새로운 해석에 포함시켜가면서 더 폭넓은 발전을 이뤄간다. 


3. 맺음말


 카는 제2판 서문에서 역사에 대한 당대의 비관주의를 서구 지식인 집단에만 국한되어있는 것이며 많은 나라의 주민들은 50년전 100년전보다 사정이 나아졌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카는 근대사의 사건들이 그 자체로 진보적이라고 보는 낙관주의자였다. 카는 또한 그 사건들을 탐구하는 우리의 인식 역시 발전해간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이중적인 신념을 가지고 역사를 저술하였다. 우리가 비록 전자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더라고 후자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의 단견으로 오늘 날의 냉소주의는 이마저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나는 그런 태도를 비판하고자 이 글을 썼다. 카의 낙관주의는 시대에 뒤쳐지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나는 그의 책을 통해 우리의 인식은 여전히 확장되고 발전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카는 5 장에서 역사가의 객관성은 단순히 사실을 조사하는 데에 있지 않고 “사회와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로 인해서 제한되어 있는 시야를” 넘어서며 “자신의 시야를 미래로 투사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말했다. 객관성의 여부는 사실과 가치의 분리에 있는게 아니라 올바른 기준을 확립하고 적용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오늘 날의 냉소주의는 사실과 가치를 분리한 후 가치를 주관적인 것으로 격하하면서 오히려 진정한 객관성 성취의 가능성을 폐기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이와 같은 냉소주의를 교정해주는 역사학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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