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헤르타 뮐러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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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공포에도 미학이 있을까?

대답을 보류하고 작은 제목 중에서 일부를 추려본다.

손안의 남자, 빵 한 조각의 가치를 지닌 사람, 여름의 내장, 멜론의 생리주간, 호박의 생리주간, 고막염, 가장 작은 남자가 가장 큰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는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머리는 암흑이다, 손키스. 날씨가 추우면 난 물속을 들여다볼 수 없어,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야, 손톱이 자란다, 투명한 잠, 흑백 하늘, 괜찮아.

내 경우, 소제목만 읽어도 서늘한 느낌이 다가온다.

공포를 아름답게, 그래서 더 공포스러운 뮐러의 문장. 그러니 공포의 미학은 성립되는 말이겠다.

뮐러의 글을 읽으며 지독한 전체주의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느낀다. 동시에 저 북녘사람들에 대한 부채감도.

카펫 대신 사용하는 여우 가죽. 발과 다리가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잘려나간다. 나날이 더해가는 공포.

이런 건 상상으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학이 문학답고, 삶이 어려워도 희망을 갖는 것은 글의 미학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내게는 그렇다. 뮐러의 시적 문구. 공포스럽고 어둡고 암울하지만 그의 문장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희망을 잃지 않는다. 뮐러의 위대함이다.

사족 - 마지막 소제목 ‘괜찮아’는 책 서두에 적은 베네딕트 예로페예프의 글과 상응한다. 그 글은 이렇다. “괜찮아, 상관없어. 나 자신에게 말한다. 괜찮아.”

그래, 괜찮다. 서정주의 시처럼 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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