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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강 - 2012 볼로냐 라가치 상 수상작 Dear 그림책
마저리 키넌 롤링스 지음, 김영욱 옮김, 레오 딜런.다이앤 딜런 그림 / 사계절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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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감춰진 성장의 마법>

-성장의 비밀, 세계의 내면화-

 

  한 세계가 열리고 소녀가 성큼 들어선다. 소녀가 떠나온 세계는 이제 더 머무를 수 없을 만큼 좁고 작게 줄어들어서 소녀에게는 신생의 세계가 필요한 것이다. 헤르만헤세가 <데미안>에서 이야기했듯 한 인간이 자라는 데는 세계가 깨어지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식물이 발아하는 데에도 대지를 뚫고 나오는 가느다란 떨림이 있듯이. 생명의 맥박을 받아내는 자연의 아픔은 성장의 아픔을 겪고 있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세계는 소녀의 성장과 함께 자라나고, 해체되고, 변형된다. 그렇게 세계는 원형을 달리함으로써 번성한다. 새 땅에 안착해 빠른 속도로 종을 퍼뜨리는 민들레처럼.

 

  소녀의 이름은 칼포니아. 열대의 숲을 연상케 하는 이름이다.

  어느 날, 소녀는 ‘불경기’로 인해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는다. 불경기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문에 아빠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는 것을 소녀는 이내 알아차린다. 어른들의 세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자 칼포니아 아빠의 근심은 늘어간다. 소녀는 아빠의 세계가 자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직시한다. 어른들의 세계가 소녀의 세계로 전이하는 과정이다. 아빠의 고민이 엄마와 자신의 고민이기도 하며 마을 모두의 고민이라는 이해. 칼포니아는 아빠의 세계를 짊어지고 충직한 강아지 버기 호스와 함께 미지의 세계로 걸음을 옮긴다.

 

  지혜로운 사람만큼 자비로운 이가 또 어디 있을까. 마을에서 가장 지혜로운 알버타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칼포니아는 드디어 <비밀의 강>에 다다른다. 비밀의 강은 자연의 충만함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녔다. 강 밑에는 무수한 물고기들이 호흡하고 멋진 나무가 장승같이 서서 강을 지키고 있다. 빨간 배 한 척이 칼포니아와 버기 호스를 기다리고 있는 강. 마을 안에서는 체험할 수 없었던 신비가 이 곳 비밀의 강에서 칼포니아의 것이, 칼포니아만의 세계가 되었다. 칼포니아는 자연이 주는 무한한 선물 앞에 감격한다. 뿐만 아니라, 마을을 살리기 위해 물고기 몇 마리를 가져가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말한다. 필요한 자원만을 고맙게 가져갈 뿐인 칼포니아의 태도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적정 수의 물고기만을 낚싯대에 꿰어서 칼포니아와 버기 호스는 비밀의 강을 떠난다. 빨간 배를 원래의 자리에 묶어놓은 것도 물론이다.

  비밀의 강이 주는 신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원시의 자연에게서 느껴지는 경이와 찬탄일수도 있겠지만 비밀의 강이 그토록 신비로운 것은 칼포니아와 버기 호스가 한순간 발견한 세계라는 데 있다. 환상처럼 소녀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 칼포니아는 그 세계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존재만으로 신비가 되는 세계를 소녀는 만났다.

 

  위험이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가오는 법. 비밀의 강을 뒤로 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칼포니아는 맹수들과 맞닥뜨린다. 힘으로나 민첩함에 있어서나 칼포니아는 그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순간, 칼포니아는 기지를 발휘한다. 배고픈 맹수들에게 자신이 잡은 고기를 나누어 준 것이다. 시장했던 맹수들은 칼포니아가 던져준 메기를 먹느라 소녀와 강아지를 그대로 놓아준다. 위험천만한 정글의 세계를 잘도 통과해 나온 칼포니아. 두려운 상대를 대하는 법을 소녀는 깨우친 것이다.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한 정글의 세계를 빠져나오면서.

 

  무사히 마을에 도착한 칼포니아는 알버타 아주머니를 찾아가 고마움을 표하고 약속대로 메기 한 마리를 아주머니에게 건넨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둘러싼 숱한 약속들. 일상의 세계로 돌아온 칼포니아가 피곤을 무릅쓰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약속의 이행이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대견하다.

칼포니아가 비밀의 강에서 잡아온 물고기 덕분에 아빠는 활기를 되찾고, 마을 사람들도 기운을 차려 칼포니아의 마을은 이전처럼 살만해진다. 마을은 회복되었고 칼포니아와 버기 호스도 빠르게 일상성을 되찾는다. 일상의 세계란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그 안에 있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안도감과 활기를 찾는다. 일상의 세계야 말로 소녀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거울 속의 얼굴은 조금씩 변해 가기 마련이다. 언젠가는 소녀도 일상의 거울에서 타인처럼 낯선 얼굴을 마주하고 말리라.

 

  비밀의 강은 이제 소녀에게 다시 찾을 수 없지만 영원히 꿈꿀 수 있는 진정한 신비의 장소로 남았 다.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진 세계. 공공연해질 수 없는 금기. 비밀의 강은 칼포니아에게서 한 편의 시(詩)가 되었다. 칼포니아의 가슴속을 헤엄치는 생생한 기억의 감촉. 이로써 하나의 비밀이 완성되었다. 비밀을 간직한 소녀의 눈은 우물물처럼 깊어진다. 수심(水深)을 헤아리기 힘든 눈빛의 소녀. 생각에, 혹은 한 세계에 잠긴 소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소녀만은 그 사실을 끝내 모르겠지만.

 

  세계는 움직이며 멈춰서고 때로 뒤바뀐다. 소녀는 매번 다른 역에 내리는 여행자인지도 모른다. 소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세계는 무한히 확장되며 영역을 넓혀간다. 스포이트의 용액이 빠른 속도로 종이에 번지는 것처럼.

  하나의 세계는 아직 씨눈을 틔우기 전이고, 다른 하나의 세계는 꽃망울을 터뜨리기 전이며, 또 다른 세계는 활짝 피어 있다. 소녀가 저를 피워주기를 세계는 기꺼이 기다리는 참이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세계, 즉 세계의 확장은 한 인간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매개체이다. 모험을 끝낸 칼포니아에게서 나는 열린 세계를 보았고, 무한히 확장될 세계를 통해 자연이 키운 한 소녀의 아름다운 비밀을 가슴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소녀 안의 세계, 그 다채로운 생장점들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소리를 들으며 또 하나의 우주가 열리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세계라는 거대한 껍질을 깨고 나왔다. 껍질 밖의 우리는 마침내 칼포니아가 된다. 세계의 껍질 위에 하나의 독립적 존재로 우뚝 선 것이다. 이 모든 여정은 험난하고 두렵지만 우리의 가슴을 부풀게 하고, 영혼의 눈을 트이게 한다.

  비밀의 강을 간직한 모든 칼포니아의 노래가 잊고 지나온 우리의 한 세계를 들여다보게 한다. 다시 소녀처럼,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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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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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서점가를 휩쓴 ‘힐링(healing)' 열풍은 해가 바뀐 올해도 여전히 유효할 듯싶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좇는지 모르는 채 사람들은 행진하고, 행렬에 섞여 보폭을 맞추느라 제 발 아래 차이는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 격동하는 21세기 숨 가쁜 행군 속에 쓰러지고 분열하며 뒤처지는 이가 우리들이며, 행군 밖에서 제자리걸음으로 대열에 들 준비를 하는 이도 우리들 혹은 우리의 벗들, 가장들, 어머니들이다. 행군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은 지쳐있고 방향을 잃고 아파하며 분노한다. 그리고 자신 안의 까닭모를 우울은 어디서 온 것인지 알지 못해 헤맨다. 우리를 찾아온 돌풍 같은 상처와 공허는 무엇으로 다스릴 것인가? 우리에게는 지금 상처를 감싸줄 위안과 치유의 힘이 절실하다.

 

 

  누가 우리의 폐허를 알아줄 것인가? 우리 곁을 떠난 수많은 선지자들을 떠올려본다. 그분들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그 빈자리에 고맙게 피어난 치유의 꽃이 故 박완서 작가의 <세상에 예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작가의 마지막 가르침 같은 이 산문집이 참으로 반갑고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이유다.

 

 

  당신이 왜 소설가가 되셨는지, 작가는 독자와 자신의 삶을 어떻게 껴안아야하는지, 여성성의 부드러움과 평화로움에 대해서, 작은 풀 하나도 사랑하는 마음이랄지, 남편과 아들을 잃은 고통을 자연과 시간이 어떻게 치유 하는지, 병상의 환자도 웃게 하는 생명의 눈부심이나, 작은 동물에게서 배우는 자연의 이치, 당신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떠난 분들에 대한 편지, 화난 마음을 유쾌하게 다스린 친구의 지혜라든지, 조부의 내리사랑과 배려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손자에게 쓰는 당부의 편지 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그 글들 속에서 이 시대의 어른으로 사셨던 한 위대한 작가의 삶과 사랑(가족의 범위뿐만이 아니라 동식물과 사람, 자연, 조국, 언어에 이르는 넓고 무한한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삶이 가르쳐준 지혜의 보고였고, 작가 자신이 살아온 삶에서 우러나는 당당함과 자애로움의 산실이었다. 작은 것에 상처받고 잔뜩 독 오른 마음을 할머니의 약손이 살살 풀어주는 느낌이다. 살갑고 다정한 할머니의 온기와 체취가 내부로 스며들어 우리를 순한 ‘강생이’로 만들어주는 기분. 뭉쳐있던 마음이 눈 녹듯 풀어진다.

 

 

  너나 할 것 없이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도 집에 온 손님을 그냥 보내는 일 없이 끼니를 해 먹이셨던 어머니의 성정이 고스란히 작가에게 전이되었나보다. 전쟁의 혹한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살뜰히 챙겼고 아낌없이 나누었다. 우리에게 흐르는 민족의 정신이 그렇게 숭고하고도 박하지 않은 것이라면 차디찬 세상의 빗장을 여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않을까. 박완서 작가의 <세상에 예쁜 것>을 읽다보면 어느새 인간 내부의 감춰진 힘, 자연과 보다 약한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알게 된다. 우리의 뿌리가 자연에 있고 더불어 사는 넉넉함에 기인한 것임을 깨닫자 멀게만 느껴지던 타자도 이웃처럼 가깝게 다가온다.

 

 

  행군은 계속된다. 발은 부르트고 사람들은 지쳐간다. 하지만 대열 안팎의 우리가 모두 아픔을 짊어진 사람들이며,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과 다르지 않음을 알기에 끝까지 행군을 해나갈 힘을 얻는다. 작가가 우리에게 심어준 것은 삶과 인류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이제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언 발을 녹일 시간이. 우리에게는 시간이라는 신(神)도 예비 되어 있으니 머지않아 이 행군에도 끝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발끝에 힘이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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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양장) - 故 김영갑 선생 2주기 추모 특별 애장판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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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내가, 그리는 제주도의 모습이란 흘려들은 소문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 읊어보자면, 봄이면 노오란 유채꽃이 만발하고, '삼다도'라 하여 돌, 바람, 여자가 많고, 소담한 돌담집들이 보이고, 말들이 초원에서 풀을 뜯고, 나이든 여인들이 해녀복을 입고 전복과 문어를 따는 섬, 쯤 이다. 누구나 제주도, 하면 떠올릴만한 요소들.

 

  그 모든 것들은 제주도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해본 제주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 날 우연처럼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선택한 이유도 알라딘의 '책 미리보기'를 통해 본 몇 페이지에 걸친 제주도의 사진이 낯설고도 아름다워서였을 것이다. 이 낯선 제주도를 경험해 보고 싶다, 는 욕망이 순간 스쳤는지도 모른다.

 

  제주도에 반해 그곳에 머물며 쉬지 않고 순간순간 변하는 자연의 풍광을 렌즈로 담아내던 사람, 김영갑. 그가 카메라를 통해 본 제주도는 호흡이 느껴지는 섬, 살아있는 자연 그 자체였다. 그의 사진 어디에서나 바람이 느껴졌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 중에서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하도 많이 인용돼 이제는 거의 관용구처럼 여겨지는 구절 아닌가) 이라고 할 때 그저 시적 상징으로나 생각했던 ‘바람’, 우리를 스쳐 지나고 때로는 나의 내부를 떠도는 형상 없는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게 하다니. 그러기 위해 그는 얼마나 오래 기다리고 얼마나 거푸 셔터를 눌러댔을 것인가. 찰나의 제주도를 담으려는 그의 긴 기다림과 노력, 열망이 놀라웠다.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는 사진사가 피사체와 사랑에 빠져야 한다는 말을 절감하게 하는 사진들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제주도는 빛과 결, 소리가 느껴지는 생동하는 자연이다.

 

  그의 사진이 주는 감동은 다름 아닌 작가의 삶이 주는 감동,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의 산과 오름, 바다, 들녘, 억새, 일몰, 구름 등을 찍으며 행복한 사진작가였던 그는 어느 날 의사에게서 루게릭 병 진단을 받는다.

병원에서 루게릭 병 진단을 받고 내 생의 유효 기간이 정해졌을 때, 머릿속에 맨 처음 떠오른 것은 그동안 찍어둔 사진과 필름들이었다. 내가 죽고 나면 그것들을 나만큼 사랑하고 아껴줄 사람이 어디 있을까. -p205

  투병 중에도 그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제주도의 사진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이 자신의 방에서 먼지와 함께 낡아가는 것을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는 근육이 퇴화하는 무서운 병과 싸우면서도 제주도에 ‘두모악 갤러리’를 만들기에 이른다. 그 후로 시간이 더 흘러 그는 제주도에 영원히 잠들어 있다.

 

  어느 비 오는 봄날, 충무 아트홀에서 열린 ‘김영갑 사진전’에 갔었다. 두모악 갤러리에 가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던 내게 퍽 기쁜 소식이었다. 전시된 사진 속 자연의 색채가 참으로 풍부하고 경이로웠다. 그리고 벽 곳곳에 나무처럼 자리한 담담한 그의 글들. 카메라 밖의 내가 렌즈를 통해 그 모든 것들을 응시하는 듯했다. 그는 제주도를 열렬히 사랑한 사람이었다. 물질이 주는 만족이 아닌 영혼의 즐거움을 구하고 곧 사그라질 영감이 아니라 나날이 번지는 예술혼을 간직한 치열한 사람, 삶과 사람과 자연을 아끼고 그 속에 녹아들었던 사람, 아무도 찍지 못한 제주도의 숨겨진 모습을 담은 사람. 그의 글과 사진은 일상의 나태함을 걷어내고 자연의 살아있는 아름다움을 보게 하며, 한 번도 발길해본 적 없는 제주도를 사랑하게 만든다. 마음의 눈을 촉촉하게 적셔줄 한 예술가의 삶과 제주도의 황홀 속으로 김영갑은 부단히 우리를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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