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내가 있었네 (양장) - 故 김영갑 선생 2주기 추모 특별 애장판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제주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내가, 그리는 제주도의 모습이란 흘려들은 소문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 읊어보자면, 봄이면 노오란 유채꽃이 만발하고, '삼다도'라 하여 돌, 바람, 여자가 많고, 소담한 돌담집들이 보이고, 말들이 초원에서 풀을 뜯고, 나이든 여인들이 해녀복을 입고 전복과 문어를 따는 섬, 쯤 이다. 누구나 제주도, 하면 떠올릴만한 요소들.

 

  그 모든 것들은 제주도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해본 제주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 날 우연처럼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선택한 이유도 알라딘의 '책 미리보기'를 통해 본 몇 페이지에 걸친 제주도의 사진이 낯설고도 아름다워서였을 것이다. 이 낯선 제주도를 경험해 보고 싶다, 는 욕망이 순간 스쳤는지도 모른다.

 

  제주도에 반해 그곳에 머물며 쉬지 않고 순간순간 변하는 자연의 풍광을 렌즈로 담아내던 사람, 김영갑. 그가 카메라를 통해 본 제주도는 호흡이 느껴지는 섬, 살아있는 자연 그 자체였다. 그의 사진 어디에서나 바람이 느껴졌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 중에서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하도 많이 인용돼 이제는 거의 관용구처럼 여겨지는 구절 아닌가) 이라고 할 때 그저 시적 상징으로나 생각했던 ‘바람’, 우리를 스쳐 지나고 때로는 나의 내부를 떠도는 형상 없는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게 하다니. 그러기 위해 그는 얼마나 오래 기다리고 얼마나 거푸 셔터를 눌러댔을 것인가. 찰나의 제주도를 담으려는 그의 긴 기다림과 노력, 열망이 놀라웠다.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는 사진사가 피사체와 사랑에 빠져야 한다는 말을 절감하게 하는 사진들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제주도는 빛과 결, 소리가 느껴지는 생동하는 자연이다.

 

  그의 사진이 주는 감동은 다름 아닌 작가의 삶이 주는 감동,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의 산과 오름, 바다, 들녘, 억새, 일몰, 구름 등을 찍으며 행복한 사진작가였던 그는 어느 날 의사에게서 루게릭 병 진단을 받는다.

병원에서 루게릭 병 진단을 받고 내 생의 유효 기간이 정해졌을 때, 머릿속에 맨 처음 떠오른 것은 그동안 찍어둔 사진과 필름들이었다. 내가 죽고 나면 그것들을 나만큼 사랑하고 아껴줄 사람이 어디 있을까. -p205

  투병 중에도 그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제주도의 사진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이 자신의 방에서 먼지와 함께 낡아가는 것을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는 근육이 퇴화하는 무서운 병과 싸우면서도 제주도에 ‘두모악 갤러리’를 만들기에 이른다. 그 후로 시간이 더 흘러 그는 제주도에 영원히 잠들어 있다.

 

  어느 비 오는 봄날, 충무 아트홀에서 열린 ‘김영갑 사진전’에 갔었다. 두모악 갤러리에 가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던 내게 퍽 기쁜 소식이었다. 전시된 사진 속 자연의 색채가 참으로 풍부하고 경이로웠다. 그리고 벽 곳곳에 나무처럼 자리한 담담한 그의 글들. 카메라 밖의 내가 렌즈를 통해 그 모든 것들을 응시하는 듯했다. 그는 제주도를 열렬히 사랑한 사람이었다. 물질이 주는 만족이 아닌 영혼의 즐거움을 구하고 곧 사그라질 영감이 아니라 나날이 번지는 예술혼을 간직한 치열한 사람, 삶과 사람과 자연을 아끼고 그 속에 녹아들었던 사람, 아무도 찍지 못한 제주도의 숨겨진 모습을 담은 사람. 그의 글과 사진은 일상의 나태함을 걷어내고 자연의 살아있는 아름다움을 보게 하며, 한 번도 발길해본 적 없는 제주도를 사랑하게 만든다. 마음의 눈을 촉촉하게 적셔줄 한 예술가의 삶과 제주도의 황홀 속으로 김영갑은 부단히 우리를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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