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월
존 란체스터 지음, 서현정 옮김 / 서울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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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위는 춥다. 벽에 대해 누구나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이 춥다는 말이다. 배치를 받고 그곳에 당도했을 때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것도 춥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도 춥다는 것이고, 그 위에서 내려와도 기억나는 것은 춥다는 것뿐이다. 벽 위는 춥다. - p. 5

파이낸셜타임즈와 이브닝스탠다드가 선정한 2019 최고의 책이라는 존 란체스터의 더 월. 사실 2019년 부커상 후보작이라는 문구를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배경은 가상의 미래입니다. 그렇다고 SF처럼 지금 보기에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야기는 대격변 이후의 세대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먼 미래, 기성세대가 막아낼 수 없었던 어떠한 대격변 후 인류의 삶은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기후에는 이상이 생겨 해수면은 상승하고 추위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인간이 살기 힘들어진 세상에서 한 섬나라에서는 해안선과 국경을 둘러싸는 콘크리트 장벽을 세웁니다. 이 벽을 둘러싸고 넘으려는 사람과 막으려는 사람들이 대치하게 되는 겁니다.






구체시. 벽 위에서의 삶을 표현하는 데 적당한 문학인 것 같다. 왜냐하면 벽에서 내딛는 인생 출발이 산문보다는 운문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 p. 17

벽 위에서 벽을 넘으려는 침입자들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경계병들이 주둔하고 있는데요. 존 란체스터의 더 윌에서는 이 곳에 새로 발령난 조셉 카바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경계병들은 구역을 맡고, 그 구역을 넘어오는 자들을 저지하며 2년간 무사히 임무를 수행해낸다면 제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벽의 이점을 누리며 벽과는 상관 없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거죠. 하지만 상대의 침입을 허용하게 된다면 벽 안에 살 수 있다는 증거인 칩을 제거당하고 벽 너머의 바다로 추방당하게 되어 필사적으로 벽을 넘어오려는 상대와 같은 처지가 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경계병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상태가 됩니다. 항상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은 있지만 어제와 오늘이 대부분 별다른 일이 없는 하루를 보내는거죠. 더 월의 1부 '벽'에서는 이러한 벽 위에서의 삶에 대해 온갖 묘사와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콘크리트바다하늘바람추위가 한 덩어리로, 단일체로 뭉쳐 몰아치기도 하고, 서로 분리된 형체가 되거나 순서를 바꿔 존재하기도 하는 그 벽 위를요.






우리는 모두 부모님과 말이 안 통한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우리 세대, 그러니까 대격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 연인과 결별할 때 하는 말이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야'라고 하던가? 그때와 이때는 정반대가 된다. 우리 때문이 아니라 부모 때문이다. - p. 63






그리고 2부 '상대'에서 서서히 전투에 대해 풀어냅니다. 그 날이 그 날같아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느끼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던 조셉 카바나는 '놈들'과 대면하게 됩니다.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처음 제대로 인식한 '상대'. 그들 중 하나가 아니라 우리 중 하나라서 기쁘다던 카바나는 곧 실전도 경험하게 되죠. 상대를 제대로 막아내면 훈장을 받게 되지만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다면 바다로 추방당하게 되는 냉혹한 현실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기도 합니다. 그런 아슬한 현실 속에서 카바나는 동료 경계병 히파와 번식자가 되기로 합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하길 죽음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전투 중에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반대의 느낌을 받는다. 죽음이란, 나의 죽음이든 상대편의 죽음이든, 인생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인생의 본질이다. 삶이라는 여정의 정점이자 의미다. - pp. 104-105

3부는 '바다'입니다. 2부에서 이야기의 일부가 끝난 뒤 이제 '벽 위'가 아닌 '바다'에 대한 묘사가 이어집니다. 해수면이 상승한 그 곳에서도 사람들이 있습니다. '벽 위'에서는 제대한 이후의 삶에 대해 상상하던 야망많은 카바나는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 현재를 봅니다. 존 란체스터의 더 월에서는 절망이 누구에게나 느닷없이 아무렇게나 닥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안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지켜내기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서도요. 콘크리트더미에 지나지 않은 것 같던 그 벽에서 벗어나자 더 나은 삶은 커녕 생존이 최우선순위가 되어버립니다. 공동체조차도 순식간에 와해되고, 인간성도 점점 상실되어가는 바다에서 사는 삶. 책에서 카바나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책 이후의 카바나의 삶이 어떨지도 상상해보게 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전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보호막이 내던져진 후 어떻게 삶과 의미를 지켜낼 수 있을지도 생각해보게 되던 존 란체스터의 더 월. 곱씹을 거리가 많은 이야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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