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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 - 미국인도 모르는 미국 이야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박상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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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시리즈.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이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쓴 칼럼을 모은 것이다. 빌 브라이슨은 일단 재미를 보장한다. 그리고 읽고나면 뭔가 유식해지는 느낌도 갖게해서 고민없이 책을 집어들게 하는 작가다. 내 책장에 있는 것도 4권 정도가 된다. 이 책을 읽고나서 빌 브라이슨은 왜 재밌는가 생각해봤다. 더 정확히 말하면 빌 브라이슨은 왜 웃긴가.


왜 웃긴가.


그의 유머가 어떤 식인지 알 필요가 있다. 내가 파악하기로 몇가지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의 유머를 생각해보는 글은 그의 글만큼 재미가 없다. 핵노잼이 예정되어 있는 글을 시작해보자면.


첫번째로 '과장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늘 늦은 밤에 TV를 켜고 '개방대학'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그 안에는(아마도 남은 시간을 모두 역전류 검출관 앞에서 보낼 생각으로)1973년에 단 한 번 간 '쇼핑여행'에서 앞으로 입을 옷을 몽땅 사가지고 왔을 것처럼 보이는 강사가 나와서 이상하게 단조로운 목소리로 "따라서 발산하지 않는 두 개의 해(解)를 더했을 때 또 하나의 발산하지 않는 해가 얻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같은 말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또 이런 것도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대체로 말이 뛰다 나왔나 싶을 정도로 푹 꺼진 침대에 냉방장치라곤 열린 창문이 전부고, 한밤중에 가구 부서지는 소리와 '총 내려놔, 비니.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게'라고 말하는 여자의 째지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 잠이 깰 것만 같은 모텔 방에서 야영을 해야 했다. 이런 경험들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거나 불합리하게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 <싸이코>에서 재닛 리가 모텔 욕실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고 '그래도 저기엔 샤워 커튼이라도 있네'하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건조하게 어떤 광경을 묘사하는 글들은 차고 넘친다. 이런 글들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 건조한 문체는 눈이 글을 따라가면서 차분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가 어설프게 구사하는 끼를 보지 않아도 된다. 대부분의 경우에 어설픈 유머는 건조한 문체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웃기려고 노력하는 상대방을 지켜보는 일은 일상생활에서는 그나마 견딜만한 편이다. 딴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고,그 가상한 노력을 나를 위한 호의라고 여겨 고맙게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책을 집어 던진다. 아니면 뭐라도 있을거라 기대하면서 참아본다. 이 두가지 선택지 밖에 없는 상태에 놓인다. 그리고 전적으로 이 사태의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다.

따라서 잘하지 못할 바에야 하지 않는 것이 백번 나은 이런 '대놓고 유머'는 외줄타기의 심정으로 쓸 수 밖에 없어보인다.

빌 브라이슨은 실재를 부풀려서 당시의 기분을 묘사한다. 그리고 그런 묘사로 기분은 더 잘 표현된다. 놓치고 넘어가는 감정이 없이 이것과 저것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적확한 상황에 이어붙여서 묘사의 정확성을 극대화 한다.


두번째로 '불평한다.'


미국사회의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대목이 나오는 데 이런 식이다. 아내의 사화보장카드가 어디 있는지 모를 때 사화보장번호를 알아내려고 사회보장국에 전화를 걸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본인에게만 알려주도록 되어 있는데요."

"카드에 이름이 적혀 있는 사람 말인가요?"

"맞아요."

"하지만 그녀는 내 아내인걸요."

"카드번호는 본인에게만 알려주도록 되어 있어서요."

"만약 내가 내 아내라면 전화상으로 내게 그 번호를 말해줄 수 있나요?"

"그렇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내 아내인 척하고 전화를 걸어서 물어볼 수도 있잖아요."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전화한 사람을 그 사람 본인이라 여기고 알려주는 거지요."

"잠깐만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아내가 외출을 했으니 그녀를 불어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모든 과정을 반복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다시 수화기에 대고 보통 때의 내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저는 신시아 브라이슨인데요, 제 카드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신경질적으로 킬킬 웃는 소리가 들렸다.

"빌, 당신이라는 거 알아요."

"아니, 정말이에요. 나는 신시아 브라이슨이라구요. 제 카드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알려드릴 수 없어요."

"내가 여자 목소리로 말하면 상황이 달라질까요?"

"그래도 안 돼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지금 당신 컴퓨터 화면 속에 내 아내의 번호가 떠 있나요?"

"그래요."

"그렇지만 말해주지는 않겠군요?"

"말해줄 수 없어요, 빌."

그는 진심인듯 했다. 나는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미국 공무원들이 규칙을 어길 일은 전혀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불평하기는 빌 브라이슨의 전매특허 같은 것이다. 비꼬기와 빈정거리기를 기반으로 과장을 섞어서 유머를 구사한다. 불평하기를 시전할 때 빌 브라이슨은 당연해보이는 일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사춘기 반항아로 자기 자신을 설정한다. 이게 왜 당연하다고 여겨지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고, 그게 불평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준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하는 행동들이 실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투덜거린다. 투덜거리는 그의 글을 읽으면 배가 나오고 머리가 벗겨지고 전체적으로 곰돌이 같아서 해로울 것 같지는 않지만 뭔가 사회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은 아저씨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런 아저씨는 깍쟁이스타일보다는 매력적이라서, 적어도 이런 사람이 내 앞에서 허세를 떨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읽는 사람과 비슷한 수준 혹은 그 이하라는 설정으로 쾌적한 유머환경을 조성하는 셈이다.


세번째로 '재치만점' 이다.


"나에 관한 한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는 세 가지 장점이 있다. 앉아서도 잠을 잘 수 있고, <사인펠드> 재방송을 이미 본 것인지도 모르고 몇 번씩 다시 볼 수 있으며, 세 번째가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은 노화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유머를 구사하려면 적재적소에 양념을 쳐야한다. 이 상황에서 웃긴 게 다른 상황에서는 전혀 웃기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 늦은 타이밍에 치고 들어가면 이미 배는 떠났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오면서 아까 이 얘기를 그 때 했어야 하는데 하면서 후회를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 다양한 구종을 가지고 있는 투수는 제구도 완벽해서 어느 곳에라도 원하는 속도와 원하는 코스로 공을 보낼 수 있다. 타자 입장에서는 내가 원하는 공이 올 때까지 신중하게 걸러내는 선구안이 필요하다. 그 공이 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모든 공을 다 쳐내기에는 실력이 모자라다. 그리고 원하는 코스로 공을 보내서 안타로 만드는 건 또 많은 변수가 도와줘야 가능하다. 모든 공을 다 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건 어떤 상황에서라도 유머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과 비슷하다. 요기로 오면 이렇게 쳐야지 저기로 오면 요렇게 쳐야지 답이 나와 있다는 건 너무 어려워서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다. 고로 현실적인 유머는 효율적인 환경을 만들어놓는 것이 최우선이다. 빌 브라이슨은 과장을 써서 불평을 하면서 공이 어디로 날라올 지 대충 선을 그려놓는다. 그리고 재치를 양념으로 안타를 만들어낸다. 이쯤되면 완벽에 가까운 준비이고, 그가 이렇게 웃긴 이유가 납득이 간다. 물론 그게 쉬운 거면 지금 이 글이 이렇게 핵노잼일리가 없을 것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늘 늦은 밤에 TV를 켜고 ‘개방대학‘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그 안에는(아마도 남은 시간을 모두 역전류 검출관 앞에서 보낼 생각으로)1973년에 단 한 번 간 ‘쇼핑여행‘에서 앞으로 입을 옷을 몽땅 사가지고 왔을 것처럼 보이는 강사가 나와서 이상하게 단조로운 목소리로 "따라서 발산하지 않는 두 개의 해(解)를 더했을 때 또 하나의 발산하지 않는 해가 얻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같은 말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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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명남 엮고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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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하다 현란해!!!


2008년에 46살로 세상을 떠난 미국 소설가. 믿고 읽는 번역가 김명남 '님'이 엮고 옮겼다. 이 책에는 애초에 한 군데 모여있던 글이 아니라 그가 발표한 몇 권의 책들에서 선별한 글들이 실려있다고 한다. 이 글들을 엮어 낸 믿고 읽는 번역가 김명남 '님'의 안목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솔직한 형아

에세이 형식의 글들이 400쪽 조금 넘는 책을 채우고 있다.

처음 나오는 글부터 이 사람은 솔직한 사람이고 믿을만 하다는 인상을 준다. 믿을 만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마나 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세상의 많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들은 '하나마나 패리스토리우스'의 자식들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하나마나 한 이야기들을 만들었고, 후세 사람들은 그의 말들을 섬기면서 살아간다. 그가 만든 이야기의 특징은 어디서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아서 거부감은 안 느껴지지만, 그 자체로는 정보값이 없어서 시덥잖은 이야기가 되기가 쉽다는 것이다. 하나마나 한 이야기들은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인 시간과 자리에서 그 능력을 발휘한다. 뭔가를 들었으되, 유익한 것 같기도 하다. 딱 여기까지만 다다르면 대성공이다. 하나마나 한 이야기들은 시간이든 지면이든 비어있는 꼴을 못 본다. 세상의 수 많은 하나마나 한 이야기들이 뭔가를 채우려고 하는 인간들과 하나마나 한 이야기 자체의 속성에 의해 지금도 여기저기 널려있다. 그렇다면 하나마나 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왜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가? 하나마나 인들은 대체로 자신의 생각을 내보일 능력이 없거나 내보일 의사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무능력자 아니면 음흉한 사람이기에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믿을 만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들은 무능력을 숨긴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기 속 내를 숨긴다는 점에서 솔직하지 않다. 하나마나 인들과 정 반대에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사람이 바로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다.

예를 들면 이런 솔직함들.


"카페테리아에서 내 쟁반을 반드시 스스로 나르고 작은 서비스라도 받을라치면 침 튀기게 고맙다고 말한다. 동료 승객들 중에는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는 영어가 서툰 직원들에게 각별히 조용조용 말하는 것을 특히 자랑스럽게 여긴다."


"대기자들 중 많은 수가-카리브해답게 옷을 입었는데도-유대인으로 보이지만, 나는 외모만 갖고 유대인성을 판별할 수 있다는 내 생각이 곧 부끄럽게 느껴진다. (각주: 내게는 미국 동해안의 모든 공공장소가 이처럼 나도 모르게 인종주의적 관찰을 하고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내면의 반발에 움찔하는 짜증스러운 순간으로 가득하다.)


나는 우리가 하는 위선적인 행동들이 어떤 메커니즘일까 생각해본적이 있다. 얼마전에 햄버거를 사먹으러 버거왕에 갔는데 거기에는 정신지체를 앓는 사람이 일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라에서 의무적으로 강제하고 있는지, 아니면 글로벌 프랜차이즈의 인도주의적 행보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모습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그 가게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어서 오세요 라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일을 하기 싫어 죽겠다 하지만 별 수 있나 하는 표정으로 손님을 맞는 종업원들이 우리가 만나는 그 세계의 가이드였는데 말이다. 큰소리의 인사를 들어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게 어딘가 어눌하다. 정신지체를 가진 사람들 특유의 명랑함이 목소리에 배어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좀 모자라는 사람이구나.'그리고 나서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안되지' 라는 생각으로 연결이 된 후 '장애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거부되어져야 하는 이유가 아니야.'라는 생각을 거친 다음 '우리 사회는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있어야 하고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해서 예외는 아니지.'라는 생각을 통과하면서 '그들에게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니 나는 정말 반성해야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도달하게 되었다. 이 일련의 과정들을 해내는 나를 보면서 이것이 성숙한 교양인이 되는 교육을 받은 결과인지 그것 보다는 성숙한 위선인이 되는 교육을 받은 결과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헷갈리게 되었다. 정확히 이 지점을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도 고민하고 있었다.


위선이란 무엇인가, 정치적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위선과 그것이 가지고 오는 또다른 종류의 불편함에 대해서도 그는 입장이 분명하다.

이와 관련해서 영어 어법과 관련한 글들이 나온다. 그는 영어어법과 관련된 논의가 크게 보아 규범주의자와 기술주의자의 대결이라고 판단한다. 규범주의자는 어법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서 이른바 근본없는 어법들은 올바른 어법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기술주의자는 어법이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민주적 관용이 들어서야 한다고 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는 주어진 현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제대로 된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논의를 해보자고 이야기 한다.


"미국의 일부 문화적,정치적 현실 그 자체가 인종 문제 측면에서 둔감하고 엘리트주의적이고 불쾌하고 불공평하기에,그 현실을 완곡어법과 애매한 표현으로 얼버무리는 것은 위선적일 뿐 아니라 장차 그 현실을 바꾸는 과업에도 해롭다."


"전통적으로,규범주의자는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이고 기술주의자는 진보주의자인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공적 영어규범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히려 엄격하고 깐깐한 형태의 진보적 규범주의다. 내가 말하는 것은 흔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어라고 불리는 언어다. 이 영어의 관습에 따르면, 낙제하는 학생은 '잠재력이 높은'학생이고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불리한'사람이고 휠체어를 타는 사람은 '신체 능력이 다른' 사람이다. "백인 영어와 흑인 영어는 다르고, 넌 백인 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할 거야"같은 문장은 퉁명스러운 것이 아니라 '둔감한'발언이다. 요즘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어를 놀리는 농담을 많이 하지만(못생긴 사람을 가리켜 "미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등),대학과 기업과 정부 기관은 이 영어의 여러 규정과 금지를 대단히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이런 기관들의 공적 방언은 새로운 언어 경찰들의 빈틈없는 감시하에 진화하고 있다." 


"어법은 늘 정치적이다. 하지만 복잡하게 정치적이다. 가령 정치적 변화에 관해서라면, 어법 관습은 두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 어법 관습이 한편으로는 정치적 변화의 반영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변화의 도구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두 기능이 다르다는 것, 우리가 제대로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을 헷갈리면-특히 실제로는 언어의 정치적 상징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을 정치적 효능으로 착각하면-미국이 이제 역사적으로 엘리트주의나 불공평과 연관되었던 어휘들을 쓰지 않게 되었으니까 미국에서는 이제 엘리트주의나 불공평이 사라졌다는 괴상한 확신이 들게 된다. 이것이-즉, 사회의 표현방식을 사회가 취하는 태도의 산물로 여기는 게 아니라 거꾸로 표현 방식이 태도를 만들어낸다고 여기는 오류가-바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어의 핵심 오류다. 당연히 이 오류는 표준 어법의 변화를 저지함으로써 사회변화를 늦출 수 있다고 여기는 정치적 보수주의자 스누트들의 망상을 뒤집어놓은 것과 같다."


세상이 공평해지고 차별이 없어지면 차별주의적인 언사나 표현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이 과연 오기나 할까 의문이다.누군가가 하는 차별적인 언사에 우리는 얼굴을 찌뿌리곤 하는데, 그런 인간들을 비판하는 것은 그것대로 가치가 있다. 아무래도 그 비판의 속내에는 그 인간의 교양없음에, 그 인간의 공감력 부족에, 그 인간의 현실인식 부재에 한심해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불합리와 차별에 맞서는 방법은 여러가지 겠지만, 너와 나는 다르지 않으니까 차별하지 말고 공평하게 대해달라고 소리치는 것은 어떤 허망함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위에 인용한 것처럼 너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너와 나의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는 '정중함과 공정함은 같지 않은데 그렇게 착각하는 오류'가 발생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모든 '정치적 올바름'을 표방한, 정제된 언어들은 가치가 없다는 것인가.

아마도 내 생각엔 그것들이 가치가 없지 않지만, 그 가치를 과대평가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그런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현실세계의 불평등이 없어지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런 언어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실세계의 불평등을 옹호하는 입장이라고 보는 것도 과도한 해석이지 않을까. 물론 위선적이고 애매한 표현은 오히려 현실을 왜곡할 뿐이라는 저자의 시각에는 모든 상황에서 백프로 동의하긴 힘들다. 그 표현으로 뭔가가 이루어졌다는 인식이 잘 못 된 것이다. 위의 내 경우를 예로 들면 '어딘가 좀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나의 표현은 '특정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으로 필터링이 되었는데, 전자의 표현은 그에게 필요 이상의 평가를 내리는 편향된 표현이다. 그에게는 가치판단이 제거된 표현이 적절하고 그 표현을 쓴다고 해서 그가 겪는 상황을 인식하는 데에 왜곡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사실은 나의 도덕적인 우월함을 위한 이기적인 동기가 발현되었다고 한 들 결과값이 받아들일 만 했다. 


즉 우리가 써야하는 언어는 올바른 현실인식(=우리는 불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고, 그 불평등한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은 평등한 세상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의 바탕 위에,위선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상대방을 위한 표현이 아닌 나를 위한 표현, 즉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표현)을 버린 언어여야 할 것 같다.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라는 유머 넘치는 작가의 독후감도 어김없이 핵노잼으로 써버렸다. 앞서 빌 브라이슨의 유머를 꼬치꼬치 따져 본 글을 썼는데, 마침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의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농담의 심리학은 우리가 카프카를 가르칠 때 겪는 문제를 일부 설명해줍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농담을 설명하는 것만큼 농담에 담긴 마법을 더 잘 빼앗는 방법은 없지요."

아...좌절...

"카페테리아에서 내 쟁반을 반드시 스스로 나르고 작은 서비스라도 받을라치면 침 튀기게 고맙다고 말한다. 동료 승객들 중에는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는 영어가 서툰 직원들에게 각별히 조용조용 말하는 것을 특히 자랑스럽게 여긴다."

"대기자들 중 많은 수가-카리브해답게 옷을 입었는데도-유대인으로 보이지만, 나는 외모만 갖고 유대인성을 판별할 수 있다는 내 생각이 곧 부끄럽게 느껴진다. (각주: 내게는 미국 동해안의 모든 공공장소가 이처럼 나도 모르게 인종주의적 관찰을 하고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내면의 반발에 움찔하는 짜증스러운 순간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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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가만한 당신
최윤필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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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하다: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차분하다.'


(상대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차별이나 억압을 알리고 없애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가만한 사람들에 대한 긴 부고 기사.

부고 기사라는 것은 어딘지 쓸쓸한 기분을 불러 일으킨다. 부고기사란 더 이상 이 사람은 세상에 숨쉬고 있지 않다. 더 이상 이 사람에게 어떤 말이나 행동이 나올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 만날 수도 없고, 그가 누군가를 만나러 갈 수도 없다는 선언. 혹은 그것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남아있음'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남긴 것의 의미도 생각한다.

 이 책은 두가지 생각을 머리 속에 남긴다.

첫번째는 한 명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이리도 대단하고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 그 파장은 알게 모르게 남아있는 사람들의 생활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구라는 행성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인간들 중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의 행동 범위를 벗어나는, 말 그대로 대의적인 일을 하기도 한다. 똑같은 눈코입팔다리를 가지고 그런 일들을 해내는 사람들은 뭔가 달라도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저 사람은 난 사람이다 뭐 이런 기분.

두번째는 그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유한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새삼스런 감정. 그야말로 책 몇페이지는 쉽게 채울 수 있게 대단한 성취를 만들어낸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도 병들고 약해져서 결국 세상을 떠난다. 그들이 다 하지 못한 일은 남아 있는 사람들이 해낼 수 있을 것이지만, 아무리 봐도 그와 비슷하게라도 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쉽게 생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역시 우리와 똑같은 눈코입팔다리를 가지고 있기에 그들은 세상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저 사람은 난 사람이었지만 아직 우리가 해내야 하는 일들을 남기고 갈 수 밖에 없었네. 그 남기고 간 일들은 우리가 사는 동안 끊임없이 노력해야할 차별이나 억압 등을 줄이거나 없애는 일이다.


바버라 아몬드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성애라는 관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고, 때때로 누군가를 옭아매어서 성역할이라는 구시대적 관념에 가둬두는 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을 줘야하는 것이라고 학습된다. 이 학습은 엄마역할을 하는 사람 머리 속에만 있지않고 인간 전반에 뿌리 내리고 있다. 그래서 인간 대 인간으로 그 조그만 생명체를 대하며 느껴지는 증오와 무력감에 대해서는 금기시 하게 만든다. 손쉽고 편한 방법이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게 된 엄마를 욕하는 편에 속하는 건 쉽지만, 그 쉬운 판단이 얼마나 허약한 근거 위에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렇다면 아동학대도 방관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가는 다른 층위의 문제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게 된 엄마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는지, 그 상황은 온전히 엄마의 책임 하에 벌어진 상황인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남들도 그 힘든 일 불평없이 다 해내고 있다. 그러니 당신도 그 정도의 힘듦은 감수해야 정상이다. 라는 반론은 그냥 다같이 밭이나 갈고 소나 키우면서 살면 되지, 무슨 자동차고 빌딩이냐 이런 소리와 다를 것이 없다. 한 발자국을 내딛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 발자국을 더 내딛자고 끈질기게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가만한 당신들이 남기고 간 발자취들을 되짚어보면서 다음 스텝을 이어 나가야 한다.

어떤 인간은 유한한 인생을 살다가 갔지만, 그가 뭔가 해보자고 했을때 힘을 보태준 수많았던 (더)가만한 당신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으로써의 유한함들이 결국엔 유한함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과 불행은 능력의 많고 적음보다 의욕(욕심)의 많고 적음에 더 자주 영향을 받는다. 능력은 결핍일 때 주로 문제가 되지만 의욕은 과잉일 때가 더 자주 말썽을 빚고, 경험으로 판단컨대 능력은 충분할 때가 드물고 의욕은 적당할 때가 드물다. 그 간극이 커지면 자신도 주변도 불행해진다. 아마 모성이 놓인 자리가 거기일 것이다.

물론 모성만 그런 건 아니다. 사회가 개인을 평가하는 기준은 능력도 의욕도 다다익선에 맞춰져 있고, 모범에 못 미치는 이들과 사회의 기준을 내면화한 이들은 하릴없이 자책하고 죽도록 분발한다. 모성이 더 치명적인 것은 (내든 안 내든)사표나 이민 같은 탈출구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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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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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의 노래 - 마음에 용기와 지혜를 주는 황선미의 민담 10편
황선미 지음,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 / 비룡소 / 201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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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나 그림작가의 책은 선물용으로도 좋았다. 메시지가 간명하면서도 깊었기 때문에 부담없이 선물하고 의미있는 선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한국에 오셨을 때 강연회에서 뵜었는데 작품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몇 안되는 좋아하는 그림작가라 이 책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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