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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비, 메이비 낫
김언희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해* **달이 TV에서 핫이슈가 될 때도 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판타지 로맨스에는 몰입이 안 된다. 말 그대로 판타지소설이라면 모를까. 로맨스소설을 읽는 것은 삶으로부터의 잠깐식 일탈...위로가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넘 동떨어진 시간 이동, 주인공들의 신비한 요소들은 탄탄한 시나리오나 웬만한 구조적 장치가 설정이 안 되면 더 어설프고 황당하기 그지없다. 말도 안 되는 군더더기로 책장을 넘기기 싫다. 허무맹랑한 판타지 없이, 페이지를 채우는 막장 없이 주인공들의 스토리만으로 완성도 높은 로맨스소설을 쓴다는 게 작가들에겐 너무나 어려운 작업일 것 같다.

*구판-가장 짜릿했던 장면
나는 이 책의 세련된 문장과 애달픔, 절제된 감정들이 좋다. 로설의 하이라이트는 차가운 듯하면서도 다정하고 멋있는 남주, 여주의 설렘, 남녀의 밀고 당기기, 간질간질한 애틋함, 먹먹함, 애타는 갈등 구조 뒤의 해피엔딩..등등이다. 메이비, 메이비 낫은 이 조건들을 충족시킨다. 이런 면에서 김언희 작가님은 최고다. 한국 로설을 업그레이드시킨 메이비, 메이비 낫을 열네댓 번은 넘게 읽은 거 같다. 하나에 꽂히면 그런데 이 책은 심하게 꽂혔다.
이런 책도 있구나 감탄하며 때로는 준우가 되어 때로는 재희가 되어 대사들을 읊조리듯 반복했었다. 준우가 결혼을 거부하는 게 왜 그렇게 이해가 되는지, 재희가 가족을 왜 그렇게 원하는지, 또 재희가 준우를 사랑하면서도 왜 떠나는지, 그 입장이 되어 너무 이해가 된다. 그것은 그들이 자라온 배경과 상처받았던 과거에서 너무나 잘 읽힌다. 이 책은 남녀 주인공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깊다고 생각된다. 유리그릇 만지듯 준우와 재희의 심리가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개정판을 주문하면서 책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어떻게 바꼈을까 정말 궁금했다. 굉장히 고심해서 수정하고 정성을 들인게 느껴진다. 페이지도 늘고 부록까지 얻은 기분이다. 구판에서 준우는 감정의 남발 없이 좀 깍쟁이 같은 면이 있었는데 난 그것도 좋았다. 남주의 절제된 감정에 워낙 열광하니까. 개정판에서 적극적으로 맘을 표현하는 준우도 좋았다. 결론은 다 좋다. 난 준우가 뭘 하든 그에게 빠져든다. 헤헤..
<< 본문 중에서 >>
키보드 근처를 톡톡 두 번 두드렸다. 겨우 용기를 내어 올려다보니 준우가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상체를 숙여 말하였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괜찮아. 이 정도 가지고...재희, 굉장히 잘하고 있는데, 뭐."(재희가 처음 설렜던 순간이라고 생각된다.)
"왜, 왜 그러세요." 바보처럼 말했다.
"널 원해."
"나를 왜...."
"예뻐. 미치도록."(미치도록은 구판에는 없음)
준우는 조금 웃으면서 오른쪽 입가를 털어 주고 손등으로 볼을 쓸었다.
"처음부터, 계속 그랬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척했다. '처음부터 뭘 묻히고 먹었다고요'?라고 말해야 하나 싶은데 준우가 더 빨랐다.
"재희였어. 그걸로 늘 충분했어."
"이건 꽤 자주 했던 건데요."
"후후, 역시 귀고리까지 기억하는 건 무리다."
귀볼에 한참 머무르는 준우 시선 때문에 볼까지 뜨뜻해졌다.
'예뻐, 예뻐, 예뻐....'
'그렇게 속삭이면 진심 같아요. 착각하거든요. 나 굉장히 예쁜 공주라도 된 건가.'
'너는 눈이 멀도록 예뻐.'
"남편이 되게 해 줘."
"재희야, 그런데 대답 기다리느라 심장이 타들어 가겠어. 이제 그만 울고 답해 주면 안 될까."
"....남편이, 되어주세요."
준우는 후우, 긴 숨을 쉬었다.
"너한테 손들었어. 평생 손들고 살 테니까 이제 그만하라고."
"왜 그런 말을 해요...."
"속지 않아. 순한 척하지마. 무릎 꿇게 만들어 놓고서."
어깨를 감싸 안은 채로 준우는 가만가만 재희 뺨을 쓰다듬었다.
"가자."
"이제 그만 가자."
"떨어져 있는 거 너무 힘들다."
"....네."
준우가 재희 생각만으로 가슴 깊은 곳이 간질거리듯이, 나도 준우 때문에 간질거리던 장면들이다.
뭐 많지만 맛보기로 이 정도...
나쁜 남자라며 준우를 쪼금 미워했던 분들은 아마 이번에 그런 아쉬움은 충분히 해소됐을거라 생각된다. 개정판에선 많이도 친절한 그가 되주셨다. ㅎㅎ 구판에서 재희는 수줍고 여리고 좀 불안정했었는데 그새 하고 싶은 말도 하고, 나이 서른이 주는 여유와 안정되고 단단해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스럽고 참한 그녀다. 8년을 한결같이 성실함과 믿음으로 신뢰를 쌓은 그들, 사랑해 버리면 그런 관계마저도 잃을까봐 남녀 벽의 경계를 무너트리지 않는 그들이 안됐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이슬비처럼 스며드는 끌림과 애정은 단번에 불같이 일어나는 열정적 사랑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변치 않는 믿음직한 신뢰가 바탕이 된 만남은 사랑과 같이 붙어다니는 변수들...불안함과 배신, 굴레 따위보다 강한 영속성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을까.
<< 본문 중에서 >>
재희를 볼 때면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웃곤 하였다.
서준우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대신 깊이 신뢰하기 사작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얼굴을 보지 않고도 이 여자의 표정과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는지 준우는 문득 당황스러웠다.
8년 세월을 하루같이 그녀가 발음하는 '상무님' 혹은 '사장님'에는 변하지 않는 진정성과 성실함이 진득하게 베어났다.
그 시절 재희만은 결코 잃을 수가 없기에 준우는 다만 그녀가 정해둔 안정된 관계 속으로 깊이 몸을 숨겼다.
재희는 준우에 대해선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안면 근육의 움직임까지 모조리 읽을 수 있다.
그 사람이 만나는 여자가 되는 순간 온정적이고 안정적이며 편안했던 관계는 부서지고 끝이 보이는 위험하고 불안한 관계만이 남을 뿐이다.
사랑해, 답한다면 지옥이 시작되겠지 , 사랑의 순도와 경도를 저울질하고 그 사랑에 영속성을 부여하려 꼴사납게 발버둥 칠 테니까.
이상은 준우와 재희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에게 끌리면서도, 서로를 잃을까봐 안쓰러울 정도로 참았던, 서로를 알아가는 순간들이다.
연애는 좀 이래야 하지 않을까. 참고 걱정하고 지켜보고 망설이고 또 망설이고....그랬기 때문에 더 사랑하고 더 배려하고 더 동화(同化 )하고..
나도 좀 이랬더라면...오래전 이 책이 나왔었더라면 헤어지지 않았을지도.(아줌마! 정신차리세요.ㅠㅠ)
버려지지 않으려는 재희의 아픔에 눈물이 난다. 재희의 떠남으로 그들은 결국 헤어진다. 준우는 몰랐다. 화성에서 온 수컷들은 그런 거 같다. 말을 직접적으로 인지시키거나 따지지 않으면 여자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 깨달았을 때는 벌써 가버린다. 감정의 흔들림이 없던 준우가 재희가 너무 보고 싶어 울었을 때 카타르시스가 일어났다. 준우가 재희를 미친 듯이 찾아서 뉴욕으로 가는 모습은 그동안 원망스러웠던 그의 행동들을 다 상쇄시킨다.
준우는 죽어도 하지 않으려 했던 두 사람이 같이 설계하는 달콤한 미래, 이를테면 같이 눈을 뜨고 같이 잠이 드는, 아이 강아지, 찌개 냄새와 하얀 드레스 같은 거를 재희와 함께하려고 한다. 독선적이었던 그가 평생 잘하겠다는 맹세를 그녀에게 했다. 와우^^ 멋지다.
이제 결혼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알아가는 그들이기에 맘이 뿌듯했다. 재희의 결핍을 채워주고 준우의 결함을 보듬고...그런 것들이 새로운 가족이 되는 과정이 아닐까.
**김언희 작가님의 또 다른 책들도 추천한다. 검증된 작가의 책들은 적어도 후회하지 않는 초이스가 된다. 그녀의 책 모두 내겐 베스트다. 처녀작인 사랑을 기억하며와 그녀를 사랑하세요 1,2가 있다. 전자북 론리하트도 물론 강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