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 모멘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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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굉장히 저명한 양반이라는 말을 들었다. 더군다나 마르크스주의자라는 흔치 않은 base를 지닌 분이라니... 알고 있는 어휘가 남달라서 그런지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지 모르겠다만 2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을 읽어내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단락을 읽고는 이해가 안 되서 다시 되풀이해서 읽는 식으로 책읽기가 진행된 경우는 아주 오랜만인 것 같다. 그리고 워낙 넓은 학문적 토대를 기초로 말하고 있는 문장들이 많아서 그의 조롱섞인 표현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알고보니 이 양반은 원래 이렇게 시크한 독설을 하는 방식을 즐겨한다고 한다. 철학과 문학적인 깊이가 있지 않고서는 이글턴의 글을 접하는 것은 큰마음을 먹어야 할 것 같다. 원제는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이다.

 

계몽주의에서 발전한 무신론자들의 주장.... 이제 겨우 2~300년에 지나지 않는 과학과 이성의 발전은 신이라는 망상에 대해서 아직 명확히 증명하지 못했지만 그 방향만큼은 틀리지 않았으며 종국에는 이를 넘어설 것이라고 외친다. 도킨스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욕망을 해소하려는 인간 스스로가 만든 것이 바로 종교이며 여기서 벗어나야 참 인간해방이 일어날 것이라 꼬집는다. 히친스는 여기에 덧붙여서 돈이 없으면 아무런 능력도 없는 신을 섬기는 종교는 이 지구상에 병폐만을 일으키는 악이라고까지 언급한다. 과학과 이성은 과거 종교가 독점하고 있는 진리의 영역을 점차 정복해가고 있고 이 역시 생명의 진화의 한 흐름이라 말한다. 허나 이러한 신의 비합리성에 대해 끊임없이 증명하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전히 다양한 종교의 신들은, 그 중에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그 영향력이 막강하다.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인간은 결코 합리적이고 이성적 판단만을 내리는 동물은 아님에 분명하다. 단지 인간이 종교의 족쇄에 사로잡혀 있는 노예근성이 남아있어서일까?

 

내가 보기에 이글턴은 이 책에서 시종일관 강도 높은 비판과 조롱을 빗대어 크게 3가지를 주장한다. 도킨스와 히친스가 말하는 과학과 이성을 근간으로 하는 무신론이 갖고 있는 맹점, 그들의 말하는 것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도, 표현되어지지도 않지만 인류와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소중한 부분들이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신앙과 이성을 통합하여 지구 문명을 건설적으로 발전해 갈수 있는 주요 솔루션이 될 수 있는 사회주의의 비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글턴은 디치킨스(도킨스와 히친스)를 비롯한 소위 계몽주의의 후예인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일으키는 유해한 점만을 추출해내고 이를 확대 재해석해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기독교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발현은 자생적이라기보다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로 인한 반발에서 비롯되었을 확률이 매우 크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종교가 초래했다고 주장하는 일련의 사건들의 이면에 있는 추악한 자본과 권력의 실체에 주목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문제는 신의 존재보다는 인간의 내면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디치킨스는 이러한 구조적 폭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들 자신들이 이미 높은 계급에 있는 인텔리들이라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비꼬기까지 한다. 그저 생명과 진화의 신비를 과학으로 밝혀내어 신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짐을 보임으로 종교가 사라진다면 지구는 낙원으로 바뀔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듯 그들을 조롱한다. 폭력과 야만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열쇠라 여겼던 계몽과 이성이 문화와 문명의 이름으로 또 다른 폭력과 야만으로 둔갑해버린 지금의 현실에 대해 디치킨스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또한 이글턴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반박할 때 도킨스가 신 존재 증명에 대해 비난했던 아퀴나스의 신학을 이용한다. 오히려 그의 신학적 이해부족을 비판하며 문제시하는 기독교가 진짜가 아니라고, 경험과 실험으로 통해 신의 존재는 결코 입증될 수도 없고 부정될 수도 없다고 말이다. 이성이라는 것도 정의되어지는 비이성적인 가치들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본질에서 멀어진 것은 박애 즉 사랑이 실종되어서이며 이를 유발한 것은 권력과 결탁한 권력자들의 정치적 야욕에 의한 것들이 매우 많다고 말한다. 일례로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문제들 중에는 선진국들의 석유에 대한 욕망으로 자신들과 닮아 있는 탈레반들에게 뒷돈을 대고 있는 CIA와 그 뒤에 있는 열강들이 문제가 된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무신론에 대해, 이성과 과학만능주의로 흘러가게 될 때 나타나게 되는 문제점에 대한 이글턴의 날카로운 분석과 진단에 대해서도 충분히 눈여겨 볼만하다. 기독교와 이슬람 근본주의가 생겨난 원인은 오히려 이성과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생겨난 자유주의의 과잉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적, 초자연적 유일신론의 왜곡에 대해 인격적이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설명, 알게 모르게 실험과 검증을 하지 않는 “믿음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바로 이성이요 과학이요 다원주의이자 포스트모더니즘이지 않냐는 지적 등,,, 이 책 곳곳에 어렵지만 재기넘치는 언급들은 그의 날카로움을 대변해준다.

 

이 책은 적어도 내게는 의역한 제목처럼 신을 제대로 옹호한다고는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오해를 사지 말아야 할 부분은 디치킨스에 대한 비판이 그들이 지적하고 있는 종교비판을 조금도 퇴색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순간 디치킨스의 지적은 어떤 면에서는 진보에 가깝다고 여겨도 무방하겠다. 이글턴은 무신론자들이 바라보는 기독교에 대한 문제점은 지적하되 그럼 “제대로 된 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유신론에 대한 반론을 하는 수단이 아퀴나스의 신학이라는 것도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아퀴나스 이후 근대에 와서 더욱 폭넓게 발전적인 신학적인 담론은 이글턴의 전공이 아니어서 일까? 그는 과거의 왜곡된 유일신론을 잘 고쳐서 쓰면 되는 듯이 말하고 있다. 허나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을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근대 이후 새롭고 폭넓은 현대 신학과 그 흐름은 오늘날 이성과 과학을 배척하지 않고 서로 공존하는데 매우 유의미하다. 그저 디치킨스의 의견에 반박한다고 끝나면 안된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아퀴나스의 신학을 든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디치킨스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에 비해 신학적인 반박은 허술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터라 아퀴나스의 신학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만 있는 상태에서 그것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말하긴 힘들다. 허나 이전의 책 『종교전쟁』에서도 말하듯이 진화론적 유일신론 같은 의견이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책은 원제목처럼 이성의 의의와 한계, 믿음의 역동성을 보다 집중해서 이야기한다.(개인적으로 『만들어진 신』에 대한 대척점 느낌을 주려는 외도가 보이는 의역한 제목이 좀 아쉽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종교와 신앙보다 그가 토대로 삼고 있는 사회주의와 막시즘적인 생각이 더 중심에 자리잡고 있음이 느껴졌다(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종교라는 수단을 차용한 것처럼 말이다. 문득 드는 생각은 종교 혹은 기독교와 사회주의운동이 동일시하거나 혼용될 수 있냐는 점이다. 나는 좀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인간해방과 구원을 위한 기독교에서 파생되어 나온 열매들 중 하나가 막시즘이요 사회주의라고 생각한다. 그 무게감을 뒤바꾼 듯한 후반부 서술은 기독교인으로써 아쉬운 부분이 든다. 그럼에도 이처럼 압축해서 강렬하게 글을 쓰는 저자의 신랄한 글은 매력점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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