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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은 허밍 ㅣ 문학동네 시인선 59
천수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불을 끄고 눈을 감으면 예민하게 열리는 감각은 바로 청각입니다. 밝을 때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마법처럼 그것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집니다. 그중 가장 선명한 한가닥을 따라가면 가청권의 안의 소리 중 최고의 소리를 만납니다. 그 소리로 드디어 사물과 소통합니다. 그 사물에 청력이 닿기전에 허공에서는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부딪히고 있는가요. 그것은 마치 소리의 공동묘지 같은 거겠지요. 소리는 평면적이던 우리의 몸의식을 입체로 바꿔줍니다. 그러다가 소리가 멈추면 우리는 다시 평면적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지요? 참 재미있는 상상력입니다.
소리 탄환이 뚫은 길
가로등이 하늘을 휘어서
평면이던 하늘이 입체가 될 때
저 곳곳의 마이크 시스템들이 작동하면서
감겨있던 눈 속으로 터널이 뚫린다
빛의 괄약근이 붉은 사이렌을 깜빡인다
소리가 허공 구멍을 비집고
내 귀를 조준할 동안
수도 없이 꿈틀거릴 허공 근육들
저 관(管)과 관들을 다 묻어서
공중은 소리의 공동묘지
좁은 터널이 터지도록 달려서
네 목소리가 내게로 왔다
구름 갈비뼈 속에 갇혀도
결국은 터져서 저기 달 가듯이
소리의 길이 열렸다가 흔적 없이 닫히는 순간
나는 다시 평면으로 돌아간다
소리와 소리는 끊임없이 서로 간섭합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생물체와 생물체끼리의 간섭, 인간과 인간끼리의 간섭이겠지요? 소리의 간섭 중에 특히 맥놀이는 간섭이 다시 화합을 이루게 되는 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소리는 빨리 가고 어떤 소리는 한정없이 더디게 가지만 그 소리는 겹치게 되고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게 됩니다. 물소리 끝에 풀벌레 소리를 덧대면 그것은 또 사물과 생명체가 만나는 자리가 됩니다. 이처럼 소리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함께 느끼게 합니다.
간섭하는 귀
물소리와 풀벌레소리 맥놀이가
내 귓바퀴를 오래 달리게 한다
(귀가 달리면 토끼가 될까 거북이가 될까)
자정(子正)의 귀를 갉아서
일 년을 만든다고 말하지 말자
(귀가 늘어져 토끼가 된 하루가 웃는다)
물소리 끝에 풀벌레소리가 다리를 덧댄다
용접불꽃을 튀기는 소리에 눈감지 말자
목 놓아 우는 것들이 지천이다
(소리 내어 울지 않는 건 토끼뿐이다)
늦매미 울음이 가을을 간섭하는 소리에
귀 곧추세우지 말자
(귀 떼일까 쫑긋하는 것은 토끼의 소관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귀는 더 길어진다고
사방천지 간섭하며 신음하는 소리들
(이 맥놀이 저 맥놀이가 서로 귀 부비고 있다)
소리가 만드는 이 세계...이제 소리가 커피를 내리기도 합니다. 똑 똑 떨어지는 소리가 모여서 더치커피가 됩니다. 커피 방울이 소리를 만들 때까지 소리는 공중에서 묵언정진 합니다. 그렇다면 용기에 담기는 그 커피는 어쩌면 귀를 엮어서 만든 세상에서 가장 오래 듣는 말이 아니던지요? 그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는 누군가의 얘기를 끊임없이 듣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그녀의 눈물도 보게 되는 것이구요.
악마의 눈물이라는 더치커피
2초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커피가 있다
세 번 실망하고, 단 한 번에 만사(萬事)가 되는 무덤이 있다
떨어질 동안 다섯 번 멈추는 공중이 있다
그것을 뜸 들인다고 말하다가
밥을 먹지 못한 저녁이 있다
귀와 귀가 잘 엮여져서
세상에서 가장 오래 듣는 말을 만든다
똑, 똑,
검지의 두 번째 마디와 세 번째 마디 사이
침묵보다 끊기 어려운 당신의 눈물
이렇듯 소리의 백발 한 가닥을 따라가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과 만날 수 있습니다. 늙은 마술사의 손바닥에서 한 귀퉁이씩 뽑아 올려지는 손수건처럼 신비롭게 따라는 나오는 사물들. 그것은 간혹 툭툭 끊기는 크리넥스 티슈처럼 관계를 단절시키기도 하지요. 이것이 하루를 만들고 한달을 만들고 또 1년을 만드는 것이구요. 또한 이것은 세월을 만들고 죽음을 만드는 것이겠지요. 소리, 소리를 따라가면 읽는 한 권의 시집......결국 우울까지도 허밍으로 바꾸고 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