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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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라는 당시 기성 작가가 자기에 대해 쌓여진 기존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롭게 또다른 정체성의 작가로서 인정받기 위해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을 써서 집필한 두번째 소설이란다.

내용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암울한 환경에서 잡초처럼 살아가는 열 네살 소년의 성장소설 느낌인데, 마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와 비슷하나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소설같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마 창녀일 것이다. 법이 양육을 허락하지 않는 사창가 여인들의 아이를 위탁받아 키우는 로자 아줌마 (65~68세로 나온다)와 아랍계 소년 모하메드. 로자 아줌마는 유태인으로 15~50세까지 창녀로 살았고, 아우슈비츠의 박해에서 생존했고 50세 이후에는 전업을 해 위탁모로 살아가는 할머니이다. 모하메드는 할머니에게 맡겨진 숱한 창녀의 자식 중의 한 명이었지만, 나중에는 늙고 병환이 든 할머니와 단둘이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 책에서는 순수 프랑스인이 극히 일부만 나오고 주로 아랍계, 유태계, 아프리카계, 아시아계 등 이주자(불법 이주민 포함해서)들이 등장인물로 나타난다. 그들은 나름의 이유들로 프랑스에서 도시빈민으로 타향살이를 하는데 자신들만의 어떤 유대감인지 가까운 이웃들도 아닌데 로자 아줌마를 도와주기 위해 기꺼이 찾아 온다.

의지가지 없는 모하메드(애칭 모모)는 - 나중에 로자 아줌마가 죽기 얼마 전에야 어쩔 수 없이 밝히게 된 - 출생의 비밀 때문에 자기의 부모가 누군지 궁금해 발작하고, 영웅이 아니더라도 아버지와 엄마가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마침내 알게 된 아버지, 어머니도 다른 위탁아들과 다를바 없이 창녀와 포주였지만, 정신병자였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였다는 것이 달랐다. 하지만, 모모는 새로 알게 된 이 진실에 그다지 동요하지 않고 로자 아줌마와 끝까지 함께 한다. 10살로 알았던 자기 나이가 실제로 14살이었다는 것을 알고 보다 어른스럽게 행동하려 한 점이 기특하다.

이 작품에서는 여러 가지 부조리도 고발하고 있다. 주요한 것은 창녀는 자기 아이를 양육할 수 없도록 만든 법, 개에게는 허락되는 안락사가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아 곧 자연적으로 죽을 게 뻔한 상황에서도 병원에서 억지로 연명치료를 하여 고통스런 삶을 늘린다는 것. 14살의 모모와 68살의 로자 아줌마는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유대인 동굴'이라 불리던 아파트 지하에서 아줌마가 인간적이고 자연죽인 죽음을 맞도록 한다. 이 장면은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젊었을 때는 아름다웠으나 어떤 상처로 인해 심각한 비만으로 거의 평생을 살다 죽은 어머니의 존엄한 장례를 위해 살던 집을 불태운 장면이 연상되었다. 책 전체에 흐르는 로자와 모모의 우정 혹은 사랑. 유대인과 아랍인이 공존하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 주고 아름다운 작별을 한다.

모모는 시체썩는 냄새로 인해 '유대인 동굴'에서 사람들에게 발견되고 나딘이라는 프랑스 여자에게 맡겨진다. 모모가 자란 환경과는 확연히 다른, 안온하고 부유해 보이는 프랑스 여인의 별장에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모모가 이후 잘 성장했을지 궁금하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고 작품에서 여러 번 나오는데 모모가 로자 아줌마와의 추억으로 살아갈지, 또 새로운 사랑이 나타날지 모르겠다.

이 소설이 나왔을 때는 1975년도로 유대인과 아랍계의 반목이 심했다 하는데 작품 속에서는 위탁 가정에서 함께 의지하고 사랑하며 산다. 로맹 가리가 어떻게 저렇게 유대인의 삶을 잘 아나 했더니, 순수 프랑스인이 아니고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계로 프랑스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주민들의 삶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본인도 정체성에 대해 고뇌했을 듯 하며 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거 같다. 이주한 도시 빈민의 여러 하층민 직업들 중에 창녀와 포주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 작품에서는 도덕적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하긴 사람은 배가 일단 불러야 예의를 아는 법이라고 공자가 그랬던가. 당장 생존이 급한데 도덕이 무슨 소용인가. 작중에 나오는 롤라 아줌마는 세네갈 출신의 권투 챔피언이었는데 프랑스에 와서 여장남자로 동성애자에게 매춘을 하지만, 로자 아줌마네한테는 늘상 호의를 베풀기에 "성녀"로까지도 불린다.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읽었고 너무 빨리 세상을 알고 애어른이 된 모모에 대해 짠한 마음과 함께 응원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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