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 우주인
야로슬라프 칼파르시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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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를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장르소설로 흥미 본위가 아닐까 싶었는데, 이 책은 민족의 굴곡진 역사를 뼈아프게 보여주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이나 이청준의 '광장' 같은 묵직한 느낌을 준다. 다만 그런 소설들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은유적인 표현이 압도적으로 많고, 문장이 양파껍질처럼 다층적으로 다듬어져 좀 곱씹으면서 봐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아마 문예 창작을 공부한 작가의 필력 때문이지 않나 싶은데 심오한 깊이로 좀 어렵게 읽히는 맛(?)을 선사하는 소설이다. 대신 우주 비행에 수반되는 테크닉적인 요소들은 서술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매우 적다.
소설 속에는 지난 시대에 강대국의 이념적 희생양이 된 체코의 한 험난한 가족사를 배경으로 아버지의 원죄를 늘 어깨에 무겁게 메고 다니는 우주 비행사의 독백으로 표출되는 어두운 고뇌와 사념으로 온통 차 있다. 3대가 나오는 400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 소설인데도 등장인물은 10명 정도로 단출하다. 소설 속 현실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은 적으며 주로 주인공의 독백으로 체코의 역사와 가족사를 반추하며 이루어지는 의식의 흐름을 따른 소설 같다.
아무튼 정리되지 않은 상처가 많은 데다 과거의 족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세속적 야망으로 도주하는 복잡다단한 주인공의 의식을 반영하듯 한 문장에 여러 가지 은유를 겹겹이 넣어서 좀 생각해 하면서 읽어야 하는데, 중간중간 만연체가 있어 번역가가 좀 쉽게 끊어서 번역해도 좋았을 거 같다. 단적으로 어떤 문장은 쉼표로 연결해 11줄이나 되어 읽기가 까다로웠다.
전체적으로는 체코도 우리 민족처럼 아픈 역사가 있구나, SF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소재만 SF인 심오한 인문학적 소설)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여러 가지 상징과 은유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운데 주인공이 하나하나 상처를 해결해 나가고 과거로부터 벗어나 나름대로의 홀로서기를 시도하여 성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주의 먼지 구름 덩어리 속으로 태초의 신비를 알아내는 민족 영웅이 되고 싶은 야망으로 갔는데 (덩달아 가문의 복권도 노리는), 어두운 우주 공간에서 처절하게 과거와 고독과 맞서 치유 여행을 하고 온 느낌이랄까. 일독 보다는 재독하면 작품의 가치가 더 드러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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