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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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수월하게, 막힘없이 읽었다. 책의 내용에 몰두해서도, 흥미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쉽게 읽혔다. 왜 그리 쉽게 읽혔을까. 내러티브는 시종 내가 예상하는 대로 전개되었다. 내가 어디선가 자주 들어본 이야기가 김지영의 인생, 정확하게는 상담가의 김지영의 일생의 재정리를 통해 쓰여 있었다. 성적 불평등에 대해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내용임에도 둔감한 반응을 보이는 스스로에게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사회의 불평등과 모순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분노하고, 해소하고자 자부심을 가졌던, 호기롭던 청년이 무슨 연유로 무상(無常)하게 된 것일까.


  모든 개개인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개인의 차이성은 개별적인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일정한 기준에 따라 (자의든, 타의든) 자신과 공통된 특징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모여 하나의 집합을 형성하고, 이 집합 속에서 하나의 집단적 정체성이 나타난다. , 개인의 차이성은 집단적 차이성으로 확장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개인적 수준에 머물러있을 때와는 달리,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차이는 담론의 대상이 된다. 특히 이 소설에서 중심이 되는 논의처럼 차이와 차별과의 상관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뜨거운 화두였다. 집단적 차이성이 구분되는 대표적인 기준으로는 성, 인종, 나이, 국적 등이 있다. 그 중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바는 이다.


  성은 다양한 맥락에 따라 구분될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 다수의 집단적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는 남성과 여성으로 양분된다. 흔히 성평등을 남성과 여성 간 성적 차이를 배제하고 동일한 집단으로 여기자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사고이다.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부터 성평등을 지향하는 출발점이 된다. 비단 집단을 가르는 차이로서 생물학적인 잣대만 들이미는 경우가 다수 존재하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 역시 생물학적 차이로만 파악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러나 중점적으로 직시해야하는 차이는 (소설에서 주목했던 것처럼) 역사성이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를 피부색의 차이로만 바라보지 않고, 그들이 경험했던 역사의 차이를 포함해야하는 것처럼 말이다.


  남성과 여성의 성정체성은 경직되어 왔다.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규정한 성역할에 종속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사회적 약자에 여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오랜 기간 남성은 강자, 여성은 약자라는 프레임 속에서 성정체성이 구분되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라는 보부아르의 말처럼 김지영의 여성성은 철저히 길러진다. 여성이기 때문에 남자 형제의 학비를 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으며, 여성이기 때문에 아이에게 모성애를 가져야했으며, 여성이기 때문에 직장 경력을 이어나가지 못 했다. 여성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갖은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여성들의 많은 공감대를 이끌어낸 82년생 김지영은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영화로 개봉되어 흥행에도 성공했다. 동시에 수많은 비판이 쏟아져 나왔는데 바로 남자는 악, 여자는 선으로 설정한 이분법적인 구도로써 남자를 잠재적인 가해자로 상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개별성을 호도하고 전체로 몰고 가는 추악한 비판에 불과하다. 소설 속 등장하는, 여성성을 강조하고 여성을 차별하는 인물들을 모든 남성으로 환원시키는 연결고리는 어디에서 도출되었는가. 어느 구절에서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인가. 안타깝다. 왜 이렇게 남성들은 피해의식에 침윤되어있는가. 남자라고 해서 길러지지 않은 존재가 아니다. 남자도 남성성이라는 고정된 성관념으로 차별을 받아오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설은 오랫동안 약자로 살아왔던 여성들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여성이 겪는 차별을 하나의 이슈로서 작금의 사회에 다시금 불러일으킨 것일 뿐이지, 남성의 고정된 정체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이 문학적으로 높은 위상을 차지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에 읽었던 소설과 비교했을 때, 맛깔나고 유려한 문체도 아니며 서사성이 존재한다기보다 사례나열에 치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지영의 인생도 입체감 없이 오직 평면적으로만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사회비판적 소설로서,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던 부분은 마지막 장이었다. 3인칭의 시점에서 전개되던 서술자의 정체가 마지막 장에서 상담가로 밝혀진다. 상담가는 김지영과의 상담을 통해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가, 김지영이, 더 나아가 여성들이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을 자유로이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다. 열린 마인드를 가진 상당수의 남성 독자들도 상담가가 작성한 김지영의 회고록을 읽고 상담가와 비슷한 깨달음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상담가는 이내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을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는 바람처럼 성찰을 중단하고, 다시 남성중심사고로 퇴보한다.


  성불평등이 잠재된 획기적인, 특유한 사건을 보고 다수의 남성들이 여성들과 같이 분노하고 분개하지만 이내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는, 작금의 세태를 신랄하게 보여주고 있다. 내가 소설을 읽고 무상했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진부한’(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성차별적 이야기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더욱 강도가 센 사건에 일시적으로 반응하는 것일 뿐이다. N번방 사건, 모든 국민들이 이에 분노했다. 최대 26만명에 달하는 남성이 여성의 성을 착취했다. 기울어진 사회구조, 여성들의 성착취, 작금의 불평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후 우리는 반성했는가. 다시 망각의 공간으로 구겨 넣고, 현실로 되돌아온 것이 아닌가. 우리가 상담가와 다른 바가 무엇이 있는가.


 ‘김지영 씨는 한 번씩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죽은 사람이기도 했는데, 모두 김지영 씨 주변의 여자였다.’ 김은영은, 김지영은, 오미숙은, 차승연은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았다. 김지영의 빙의 현상은 다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여성은 획일화된 존재가 아니라 모두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구로 파악될 수 있다. 성적 차이는 존중의 대상이지, 차별의 대상이 아니다. ‘길러진 차이는 더욱이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 당연히 참으로 여겨지는 명제가 통용되지 않는 사회가 과거의 우리이자, 작금의 우리 사회임을, 조남주는 고발하고 있다.


  앞선 논의로 되돌아가보자. 남성들이 이 소설이 자신들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상정했다는 비판은 우연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급진적인, 변질된 페미니스트는 남자의 가치를 절하시키고, 여성들의 지위를 되찾고자 하며 남자들을 한남이라는 프레임에 가두어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가고 있다. 모든 남성들이 소설 속 산악 동아리 회장, 남학생만을 기업에 추천하는 교수, 몰카를 공유하는 상사와 같이 여성들을 착취하는 몰상식한 인물이 아니다. 김지영을 괴한으로부터 구해준 여자의 근데,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라는 말처럼, 여성을 존중하고자 하는 남성들도 다수 존재한다. 작금의 세태에서 페미니즘과 남성의 갈등은, 남성혐오와 여성혐오로 변질되고 있다. 일부 극단적인 남성혐오자와 여성혐오자는 자신들의 의견을 여성과 남성의 전체 의견을 대변하는 듯 주장하며 서로 간의 갈등과 분란을 조장하고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인위적으로 규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에 의해 개인의 자율·정체성이 제한받지 않는 사회, 차이가 차별로 직결되지 않는 사회, 즉 남녀 간의 공생과 평화를 지향하는 사회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어디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가. 아직도 경쟁을 통해 다른 성을 밟고 올라서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이러한 불평등에 분개하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당당하게 외쳤던 청년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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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9
알베르 카뮈 지음, 최헵시바 옮김 / 더클래식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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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 시절, 캐치볼을 즐겨 했다. 공이 내 의도대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치 인간을 세상에 던져 버린 조물주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수업 종이 치기도 전에 갑작스레 교실에 들어오신 탓에 공을 창문 너머로 힘껏 던져 버렸다. 수업이 시작되자 풀숲으로 던져버린 공의 존재는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 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에 내가 던졌던 방향으로 날아가 풀숲에 안착했던 자리 그대로 있을 것이다. 공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단지 내가 그곳으로 던졌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평생을 그곳에서 나뒹굴다가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투수인 내가 공의 잔인한 운명을 결정했는지도 모르겠다.


  1부를 읽는 내내 이상야릇한 감정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뫼르소는 천태만상을 둘러봐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다. 아니 사람이 맞기는한가 의심스럽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라든가 본래적 자기 가능성을 실현한다든가 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부모 장례식에서는 슬퍼해 야 한다는 식의 키치 따위도 관심 없다. 결혼이라는 관습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다. "상관없다" "중요하지 않다" "의미 없다" 등 부정적인 동사들만 반복해서 열거된다. 어떤 신념과 가치를 들이밀며 그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매번 수포로 돌아간다. 그 어떤 언어로도 그를 규정할 수 없다. 자신의 언어가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의식과 성찰의 시간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다. 자유의 바다에 몸을 맡긴 채 오직 자신이 존재하는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한다. 바다의 물결 따라 흘러가는 행위는 철저히 타인을 배제한다. 인간은 제아무리 섬으로 들어가 고립되고자 한들 타인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뫼르소는 무관심한 태도로 타인과 접촉한다. 그가 레몽과 살라마노 영감에게 도움을 주는 이유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이다. 그들을 동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마리와 정사를 나누는 이유는 육체적 욕망 때문이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타인은 순간이라는 장면을 구성하는 조연배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의 물아일체가 문제시되는 지점은 바다의 파도가 너무도 거세게 일어나 타인을 잡아먹더라도 그것조차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든 무관심하든 중요하지 않다. 어찌되었든 타인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그것이 사회가 정한 규칙이다.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다면 처벌을 받는다. 그것은 모든 폭력 수단을 독점한 국가가 강제하는 명령이다. 그는 태양 때문에 사람에게 총을 쏜다. "마치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 같았다." 더 이상 자유의 바다에 몸담아 유유히 흘러갈 수 없다. 한 번의 총성과 뒤이은 네 번의 총성은 그를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육지로 끌어올렸다.


  1부가 "가볍고 꿈도 없는 잠을 잘 수 있는" 뫼르소의 안락한 인생을 그려냈다면 2부는 묵직한 분위기가 글자 하나하나를 꾹꾹 누르고 있는 듯 하다. 고립. 폐쇄. 억압의 속성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어둡고 퇴폐적인 이미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인식하다"라는 동사를 처음으로 발설 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감옥에 갇힌다. "하루하루가 어찌나 길게 늘어지는지 하루가 다른 하루로 흘러넘쳐 경계가 없어지고 마는" 하루를 산다. 하루를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흘러가게 해버리는 무수한 자극을 상실해 버린다. 남은 건 인식의 시간뿐이다. 그는 재판을 받는다. "내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내 운명이 결정되는 식이었다." 자신과는 전혀 무관했던 타인이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남은 건 그가 인식하는 '자신'뿐이다. 그의 외적 상황이 비극으로 치달을수록 내적 상황은 인식의 아름다운 광채가 비치는 희극으로 치닫는다. 그는 감옥에서 처음으로 자유가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자유에 함몰되어 있으면 자유를 인식하지 못하는 법이다.) 양철 밥그릇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대자 존재인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자기 객관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자기객관화를 가능케한 그는 재판 도중 자신이 '이방인'임을 깨닫는다. 소설의 제목으로서 이야기에는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단어. 그럼에도 서사의 핵심을 담아내는 단어. '이방인'에 대해 파고들어가보자.


  카뮈는 [이방인]의 부제로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어느 한 사람"을 생각했다고 한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지 당황할 것이다. 앞서 어디를 보더라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 유형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사회에 찌든 필자의 사유는 갖가지 세론으로 덧칠해져 있다. 세상 사람의 이야기가 조미료로 첨가되지 않은 사유는 얼룩덜룩한 시야 반경에 들어 오지 않는다. "거짓말이란 없는 어떤 것을 있다고 주장하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니고 대개의 경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기를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있는 데에도 있다. 뫼르소는 검사의 편에도, 사회의 법의 편에도, 약속한 느낌의 편에도 서 있지 않다. 그는 거기에 거짓말하지 않고 놓여 있는 돌이나 바람, 또는 태양 아래의 바다처럼 존재하고 있다." 그는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가 분리된다는 논리에서 변수 하나를 제거한다. 기억하는 자아는 사회의 장막 속에 경험하는 자아를 은닉하지 않는다. 그는 장례식에서 슬프지 않았다. 태양 때문에 살인을 했다. 법정에서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다. 세상 사람은 자신과는 너무도 달라 보이는 그를 시샘하듯 마구잡이로 난도질 한다. 자신의 입맛대로 흰 도화지에 물감을 쏟아버리고 그것이 스며들기를 강요한다. 그럼에도 그는 '사회'라는 단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냥 철저히 무시한다. 사회가 원하는 기준에 맞춰 억지로 느낀 것 이상의 발언을 하지 않는다. 사회에 득실거리는 아무개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는 그가 이방인이지만, 실존하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공명하는 고유한 목소리 속에서는 그를 제외한 모두가 이방인일지도 모른다.


  이방인은 결국 사형을 선고받는다. 죽음을 앞둔 이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죽음을 회피하고 싶어 한다. 살고 싶다는 잡념이 그를 괴롭힌다.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어느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새벽, 사형 판결을 뒤집을 상고, 특별사면... 삶을 갈망하는 덧없는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하다. 그때 사제가 들어와 그가 전혀 관심 없는 말을 우수수 쏟아낸다. 구세주의 등장이다. 하나님의 믿음으로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때문이 아니다. 검찰이 그랬듯이, 배심원이 그랬듯이, 사람들이 그랬듯이 사제는 그의 언어를 박탈하고 그를 사지로 몰아 인식의 꽃이 만개할 수 있는 거름을 준 것이다. 비극 속에 희극이 살아 숨 쉬듯이 말이다. 한 가지 확신이 깊은 통찰 속에서 용솟음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쳐온다는 확신. 모두가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이라는 확신.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는 확신. 인생은 부조리하다는 확신. 그는 이미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느끼며 살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인생의 부조리가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라 그것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시지프가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무의미한 일을 영원히 반복하면서도 좌절하거나 순응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이를 똑바로 응시하며 살아내는 것처럼- 부조리를 향한 뚝심 있는 인식으로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뫼르소는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 마치 형제 같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문득 잃어버린 공이 보고 싶어졌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학교 뒤뜰 풀숲으로 달려갔다. 우거진 풀을 이리저리 헤치며 공을 찾아다녔다. 왜 그렇게 공을 찾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디선가 공이 나를 하염없이 부르는 듯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더럽게 오염되고 찌그러진 공 하나를 발견했다. 풍파의 세월 속 무수한 눈비를 이겨내고 억센 풀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닌 듯했다. 얼핏 봐서는 학창 시절 갖고 놀았던 공이 맞는지 알 수 없어 수돗가로 가져가 공 에 묻은 얼룩을 하나씩 지워냈다. 그 순간, 공에 깊이 박인 각인이 눈에 띄었다.


"피투된 기투"


불안은 현존재를 '단독적인 자기'(solus ipse)로서 단독자화하고 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존론적 유아론(唯我論)은 고립된 주관을 무세계적(無世界的)인 공허함 속에 고립시켜 놓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현존재를 극단적 의미에서 세계로서의 세계에 직면시키며 현존재 자신을 세계내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직면하게 한다.


_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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